소설리스트

218화 (218/242)

드워프는 부정했다.

믿었다가 상실감을 느낄까 봐.

또 상처받을까, 두려운 본능이 방어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룬은 차분히 다시 말해주었다.

“거짓말 아니야. 그 놈 살리느라 고생은 좀 했지만 말이야.”

해츨링이 그런 일을 해낼 수가 있다고?

일개 드워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아무리 어려도, 앞에 있는 자는 드래곤의 후예.

저 말은 진짜일 터였다.

패닉 근처까지 갔던 그녀가, 정신을 잡고 다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런 기적이…….”

룬은 그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기적이라.

“그러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좀 더 파고 들어가면 드워프의 육신은 죽었다는 사실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 마. 그 녀석도 포기하지 않고 나와 함께 이 마을에 와 있으니까.”

……까득.

막대사탕 부서지는 소리 뒤, 달달한 호흡을 흘린 드워프가 물었다.

“그럼, 여기 찾아오신 건.”

고개를 끄덕이며, 룬이 말해주었다.

“나는 제드 녀석 도우려고 여기 같이 와 준 거야. 뭐, 이해관계가 얽히긴 했지만.”

룬은 확신을 얻었다.

눈 앞에 있는 드워프는, 기대를 품었다가 잃었을 뿐.

여전히 이 방 밖으로 나가 살아보고 싶어한다는 걸.

“이 기회를 잡아. 어쩌면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망설이지 마.”

그 말을 들은 드워프는 엉망이 된 몸이지만, 눈에는 희미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회.

또다시 부정하기에는, 그녀는 달콤한 자유의 꿈의 맛을 잊지 못했다.

룬은 가까이에서 그 눈 속의 변화를 확실히 목도하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뭐야?”

룬이 묻자, 당분이 묻은 목소리가 말했다.

“게일드입니다.”

“음, 게일드.”

룬이 의자를 뒤로 밀며 자세를 바꾸었다.

“이 다리 말인데.”

게일드가 살짝 몸을 굳혔지만, 룬은 아무렇지 않게 아공간 주머니에서 백진주를 꺼냈다.

“선천적인 병은 아니니, 이거면 될거야.”

몬스터의 생명을 응축한 백진주.

무릎에 살짝 가져가자, 포근한 유백색의 빛을 뿜었다.

“어, 어?”

게일드가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다리가 낫고 있었다.

단순한 치료 마법도 받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이는 게일드에게 기적과도 같았다.

치료가 끝난 룬이 말했다.

“일어나 볼 수 있어? 아직 힘은 잘 안 들어가겠지만.”

그 말에 게일드가 주저하다가, 발에 힘을 주었다.

어색했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랫동안 걷지 못해, 조금 휘청였지만.

“서, 섰다. 섰다!”

게일드가 기쁜 나머지 가벼운 뜀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휘청이며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다.

“내가 섰어!”

이제, 그녀는 이 작은 방에서 나갈 때였다.

상태를 확인한 룬이 진주를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 재활운동은 해야겠지만, 짐 정도는 혼자 쌀 수 있겠지?”

그 말에 게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나중에 제드 보내줄게. 그때 같이 나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갚는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룬은 주머니를 갈무리하며 여유롭게 말했다.

“나중에 내 부탁을 들어주면 좋겠어. 딱히 해가 되는 부탁을 하진 않을 테지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룬이 미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미도 폴짝, 뛰어 일어나고는 자그마한 손을 흔들었다.

“안녕, 게일드 언니.”

“그래, 그래.”

게일드의 시선이 무척이나 애틋해졌다.

언젠가, 마을을 오가던 흑미를 보고 품었던 꿈, 생각.

그녀가 나갈 수 없는 대신, 그녀가 지은 옷이라도 보내보고 싶어졌던 첫 마음이 떠올랐다.

비록 마담 드워프가 옷값은커녕, 재료값도 주지 않았지만.

창 밖으로 흑미가 오갈 때, 그녀가 만든 옷을 입고 다녔다.

‘잘했어. 옷을 지어주길 잘했었어.’

그 옷에 담긴 마음이 떠오른 탓일까.

게일드는 마른 입술이 트면서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칭찬받았다!

룬은 그런 게일드와 흑미를 보며 생각했다.

‘흑미 옷을 만들던 드워프에게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이상하긴 했다.

옷 퀄리티가 장인대회에 출품한 물건만큼이나 훌륭했으니.

흑미와 게일드의 인사까지 지켜본 룬이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그럼, 이제 나가자. 아까부터 문이 흔들리는 걸 보니, 마담이 참을성 바닥난 모양인데.”

“맞아요!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엄청 문이 흔들려요.”

흑미의 말대로, 문은 소리 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룬은 보일 듯 말 듯 은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내가 해줘야 할 일이 있겠네.”

궁금한 눈치로 올려다보는 흑미와 백야에게, 룬이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지금부터가 진짜지.’

룬이 문 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끼익.

그 앞에는 마담 드워프가 화들짝 놀라며 주먹을 치켜든 채 굳어있었다.

“뭔데?”

그렇게 말하며 룬이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다.

“아, 아니 그게 말이죠.”

문득, 마담은 제 자세가 자칫 폭력적인 오해를 사게 생겼다 여기고 얼른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는 어색하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왜 이렇게 늦으시나 하고 걱정이 되어서. 문을 두드려 본다는 게 그만…….”

속내는 그게 아니겠지만.

룬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보다 할 말이 있는데, 혹시 그 자세로 들을 거야?”

흠칫한 마담이 억지 웃음을 짜내었다.

“물론…… 아니죠.”

어색하게 주먹을 내리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룬이 입을 열었다.

“게일드랑 이야기해 봤는데, 우리랑 대륙에 나가보기로 했어. 조만간 헤어질 테니 미리 인사라도 해 두는 게 좋을 듯해서.”

마담 드워프가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들썩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룬의 뒤에서 흑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룬의 등 뒤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내려갔다.

-눈이 뿅 하고 튀어나올 것 같아요.

그러게.

그런데 흑미 녀석, 등에 글자 쓰는 건 언제 배웠담.

룬은 마담 드워프에게 시선을 둔 채 태연히 입을 열었다.

“게일드도 동의했어. 딱히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

대번에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저 애는 다리가!”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고 여긴 건가?

안 그래도 이쪽의 소란이 흥미를 끈 건지, 술이나 음식을 먹던 드워프들이 계단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룬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알아. 몸이 좀 불편했지. 그럼 직접 봐.”

말로 하기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터.

룬이 몸을 물리자, 똑바로 선 게일드가 마담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

입이 떡 벌어진 마담에게 룬이 말했다.

“내가 치료해줬어. 이게 걸을 수도, 마음껏 다닐 수도 있을 거야.”

“!”

그제야 마담 드워프의 머리에 드래곤이 마법 종족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물론, 몰랐던 사정에 대해 룬이 알 바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래곤이 아닌 해츨링이니, 이만한 치료마법을 쓰리라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룬에게 마담 드워프가 변명을 쥐어 짜냈다.

“호……호! 그렇지만 저희는, 일단은 불의 레어에 묶인 자들이고…… 저 아이를 그렇게 데려가시면 레, 레드 드래곤 님도 혹시 불편해 하실 수도 있지 않겠어요……?”

비굴하게 덧붙이는 말이 순 억지였다.

하지만 룬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 어리석은 변명이 룬에게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스스로 올가미를 만드는 군.’

겉으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준 룬이 말했다.

“그건 그래. 형님의 백성을 내가 함부로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마담 드워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렴요!”

“그러니, 허락을 구하는 게 먼저겠지.”

마담 드워프가 말릴 새도 없이 룬은 태연히 통신석을 꺼냈다.

신호가 가자마자 공중에 페르디키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웬일이냐, 룬? 평소에 통신석은 거의 쓰지 않더니.>

“형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혹시 바빠?”

<아니다.>

영상석 너머를 보니, 긴 테이블에 앉은 다수의 드워프들이 보였다.

딱 봐도 진지한 분위기로 회의중이었다.

그간 룬이 영상석을 쓰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페르디키온도 혹시 급한 일인가 싶어 받은 것이리라 여겼다.

‘얼른 용건만 말하고 정리해야겠군.’

룬이 빠르게 말을 꺼냈다.

“여기 게일드가 대륙에 가고 싶어했는데, 다리가 불편했거든.”

영상석 너머로 게일드의 모습이 비쳐졌다.

삐쩍 마른 몸에, 지저분하게 얽힌 머리카락.

딱 봐도 제대로 못먹고 산 모습이었다.

페르디키온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그랬었군. 그래서?>

룬이 답했다.

“내가 치료해주고, 대륙으로 가게 해 주기로 했어. 물론 본인이 원한 일이야.”

영상석 건너의 페르디키온이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좋은 일을 했군. 레어의 주인으로서도 감사할 일이지. 아주 훌륭하다.>

대화의 흐름이 불길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마담 드워프의 얼굴이 점차 노랗게 질려갔다.

그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여기 이 분이, 형님의 레어민을 함부로 데려가선 안 된다고 해서 허락을 구하려고 연락했어.”

<……뭐?>

노기 어린 시선이 마담 드워프를 향했다.

“그, 그게…….”

입만 어버버하는 그녀를 두고, 룬은 순진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더라고.”

<하!>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흘린 페르디키온이 마담 드워프를 보았다.

<너냐? 네 아우에게 감히 허락이 필요하다고 고한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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