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담 드워프의 드세고 고집스럽던 얼굴이 순식간에 겁 많은 초식 동물처럼 변했다.
풍채까지 쪼그라들어 보이는 마담 드워프가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그저…….”
무어라 더 말하려던 드워프를 무시하고, 페르디키온이 룬을 바라보았다.
<룬, 네게 거슬리게 한 게 있다면 말해라.>
“없었어.”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잠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마담 드워프에게 향했다.
<어리석은.>
목소리에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하는 바를 얻어낸 룬이 말했다.
“허락해 준 거지? 바쁜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 형.”
그제야 페르디키온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여왔다.
<저녁 시간 전에는 돌아와라. 간만에 내 성에서 함께 하는 식사잖나.>
“그렇게 할게.”
인사를 나누고 영상이 꺼졌다.
룬은 마담 드워프에게 말했다.
“더 할 말 있으면 지금 이야기 해.”
“아닙니다…….”
“좋아. 아차, 게일드.”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다양한 마력석과 금화, 놀이도구, 그리고 아름다운 손수건 따위를 꺼내 내밀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예절 수업받으면서 받았던 소품들이었다.
‘설마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이야.’
광주리 세 개는 됨직한 물건들을 받게 된 게일드가 물어왔다.
“이걸 다, 제게요?”
주저하면서도 받은 게일드에게 룬이 설명해주었다.
“응. 대륙에 가면 이런 도구들을 쓸 줄 알아야 해. 그렇다고 일만 하란 건 너무하잖아?”
갇혀 살던 게일드로서는 처음 보는 게 많았다.
룬이 말을 이었다.
“이건 대륙에서 쓰이는 옷감이나 디자인이야. 그리고, 간식은 뭘 먹는지, 즐길 만한 건 무엇이 있는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룬의 말을 들은 게일드가 소품들을 훑어보았다.
룬 역시 물건들을 재차 확인하며 생각했다.
‘좋아. 접근성 좋은데다 작고 귀여워 보이는 종류로군.’
제드가 말했던, ‘여성들은 작고 귀엽고 달콤한 걸 좋아하죠!’라는 말을 참고해 내어준 물건들이었다.
거기에 룬 나름대로, 대륙의 문화중 재밌어 보일법한 것도 더 얹어주었다.
룬이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으면, 다른 드워프들에게 물어봐. 아무래도 여성 드워프들이 좀 더 관심 있을 만한 물건들이니, 기왕이면 그들과 의논해 보는 것도 좋겠네.”
“네, 좋아요.”
룬은 게일드와 마담에게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해 두고 주점을 나섰다.
문을 나서며 흑미가 말했다.
“룬 님, 다들 눈이 이-렇게 똥그래졌어요.”
“응. 그러게.”
룬이 의도한 대로였다.
내어 준 물건들이 화자되고, 흥미를 끌면 끌수록 좋았다.
‘마침 마력이 깃든 옷을 만드는 드워프라니. 계획에 딱 필요한 인재야.’
흑미가 룬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 하고는 물어왔다.
“룬 님, 기분이 좋아 보여요.”
“……그럴지도.”
룬의 대답에 흑미가 힛, 하고 웃어 보이더니 백야와 함께 총총 뛰었다.
룬은 남몰래 속으로 생각했다.
‘흑미 녀석도 제법 눈치가 좋아졌는데.’
흑미의 말 대로였다.
룬은 자신의 계산대로 일이 흘러간 점이 만족스러웠다.
‘이걸로, 대륙으로 이동하고 싶어 할 드워프들이 자연스럽게 더 생겨 갈 테지.’
다리를 순식간에 고쳐준 일.
대륙에서 즐겨 볼 만한, 흥미로워 보이는 물건들을 내준 것.
게일드를 통해 알려질 것들은 여성 드워프들은 물론, 평범한 남성 드워프들에게도 흥미를 끌 만한 종류였다.
‘제드가 이걸 알았다면, 좀 더 설득하기 쉬웠을텐데.’
제드가 드워프들의 설득에 실패한 이유.
그건 대륙으로 인력을 빼간다는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은 탓이었다.
‘애초에 외부인이라 여기는 자가 설득하는 건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지.’
현지에 사는 자가 좋은 점을 직접 찾고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다가가기 쉬운 게 당연한 일이었다.
혹여, 흑미에게 아이답지 않은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룬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후우.
아무도 모를 한숨이 흘러가는 바람결에 스며들었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해 하지 않을 방법을 쓰지만.
계산적인 부분이 들어가는 한, 진짜 속내는 늘 조금씩 다르다.
이런 속내를 혹여, 누군가 알게 된다면.
과연 그 곁에 있는 이들이 여전히 곁이 있을까, 하는 생각.
“룬 님!”
쏙!
“……?”
잠시 눈을 감았다가 얼굴 표정을 갈무리한 룬이 흑미를 내려다보았다.
눈 앞에는 분홍색과 흰색이 예쁘게 말린 막대 사탕이 보였다.
우유와 딸기향이 느껴졌다.
“멋졌어요. 이건 흑미의 상이에요!”
“삐약!”
백야가 날개를 파닥이며 울었다.
물끄러미 사탕을 보던 룬이 막대 부분을 잡았다.
“잘 먹을게.”
“네!”
“뺙.”
백야가 자신도 달라며 울자, 흑미가 주머니에서 ‘버터를 발라 구운 감자칩’을 꺼내 주었다.
“룬 님이 알려줬는데. 백야는 이게 상이랬어.”
“삐이약!”
새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냉큼 감자칩을 부리로 집어들었다.
흑미가 룬을 돌아보았다.
“룬 님, 저 잘했죠?”
“응. 잘했어.”
헤실 웃은 흑미가 기분 좋은 듯 머리를 내밀었다.
룬은 별 생각 없이 흑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룬 님이 웃는 모습이 좋아요.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해드릴게요!”
“삐약삐약!”
뭘 알고 말한 것도 아닌데, 묘한 감동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룬은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
“진짜요? 와아! 칭찬 받았다!”
기뻐하는 흑미의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겠지. 나도.’
룬은 페르디키온의 성을 바라보며 그렇게 여겼다.
지금 이 현실이 그걸 말 해주고 있다고.
***
“잘못했습니다요.”
얼굴이 새까맣게 된 제드가 면목 없다는 듯이 식사자리에 도착해 머리를 푹 숙였다.
유령 소환
룬은 잘 볶아져 풍성한 머리카락이 된 제드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별 거 아니었다는 듯 유쾌한 어조로 제드가 말했다.
“으허허허! 아니, 그 녀석들이 드래곤 레어에서는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해하더라구요. 그래서 요리도 알려주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해주다가 그만…….”
드래곤레어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불이 날 리는 없다.
룬은 그나마 가능성 있어보이는 쪽을 먼저 물었다.
“요리를 하다 사고가 났다는 거야?”
‘같이 요리해 본 내가 아는데. 제드 녀석, 요리 실력 나쁘지 않았는데?’
불 조절은 오히려 페르디키온보다도 잘했었다.
의외로 대답은 페르디키온에게서 나왔다.
“룬, 그게 아니다. 녀석은 개통파 드워프들에게 허세를 부리다 저 꼴이 된 거다.”
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야기만으로 저런 꼴이 될리 없으니,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소리다.
“또 뭔 이상한 짓을 했길래.”
괜시리 뒷머리를 긁던 제드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말입니다, 제가 어둠의 힘을 쪼오금 다루긴 하잖습니까?”
헤헤, 하고 웃음을 흘린 제드가 말을 이었다.
“대장간에서 어둠의 힘이 담긴 용광로를 보니 대장장이 피가 끓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지 뭡니까요.”
“…….”
룬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변했다.
심지어 페르디키온이 덧붙인 말은 기가 막혔다.
“개혁파 드워프들이 그러더군. 지붕을 수리 해야하니 오시기로 한 분은 이틀정도 뒤에 와 달라고.”
드워프니 불을 잘 다루는 건 안다.
드워프 최초로 어둠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자랑하고 싶을 만은 하다.
하지만 어둠의 힘이 담긴 용광로를 허세에 깃들어 다루다 새까맣게 타서 오다니.
‘생각해보니, 제 무기인 파라리엄으로 성 안에서도 불놀이를 하던 놈이었지.’
룬은 미간이 지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중요한 부분부터 확인했다.
“다친 자는?”
“없습니답. 다들 위기에 꽤나 단련되었더라고요. 그간 어둠이 폭주할 때가 좀 있었던지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페르디키온의 의형제라 하나, 권속인 제드가 레드 드래곤 영역 내에서 드워프들을 상처입혔다간 꽤나 민망한 상황이 될 뻔했으니까.
“제드.”
“옙.”
“다 낫고 한 대만 맞자.”
“……부디 살살 부탁드립니다.”
죄를 알긴 하는지, 아니면 눈칫밥을 잘 먹은 건지 제드가 고개를 굽신 숙여 보였다.
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 나온 김에, 룬은 식사 때 말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 더 빨리 풀어내기로 했다.
“안 그래도 다들 괜찮은 어둠 속성 방어구가 필요해 보여서 내가 괜찮은 녀석을 구해뒀어.”
은근슬쩍 고개를 든 제드가 되물었다.
“그런 자가 있었습니까요? 다른 속성도 아니고 암흑 속성은…… 옷감에 물들일 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없었는데요.”
제드의 의아함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력을 가죽이나 옷감에 넣는 섬세함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했다.
마법 능력이 없는 드워프들에게 이는 천에 하나, 만의 하나 나오는 재능.
룬은 그 의아함에 대한 답을 내주었다.
“혹시 게일드라고, 기억 나?”
“게일드? 게일드라…….”
몸이 없이 에고 웨폰으로만 있던 때, 망각되어 가던 탓에 제드는 기억을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잠시 뒤, 제드는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치며 외쳤다.
“기억납니다요! 그 주점에 있던 다리가 불편했던 아가씨!”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제드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줄줄 꺼냈다.
“맞습니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대륙으로 데려가려 했죠! 마법사나 신전을 통해 치료해 주고 싶었거든요.”
당시를 떠올린 제드가 끄응, 하고 난색을 드러냈다.
“거기 기가 센 마담이랑 장정들이 하도 막아대서 말 거는 것도 힘들었는데. 불편하신 않으셨습니까요?”
제드가 갔을 때는, 술 값 외상이라도 해 주고 장정들까지 써서 물렸을 게 쉽게 짐작이 갔다.
룬은 덤덤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녀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만들었어.”
그냥 듣기에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제드는 정답을 떠올린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어? 어!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