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222/242)

불의 근원과 연결된 맥박 소리가 들렸다.

열이 터질 듯 올랐다가, 휩쓸고 사라지기를 어지럽게 반복했다.

마치 불로 된 거인의 핏줄을 타고 들어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덩어리가 된 이들이 붉은 대리석 위에 나타났다.

털썩!

가장 먼저 제드가 데굴데굴 떨어지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고오! 열탕에 갑자기 들어갔다 온 줄 알았네!”

더위라곤 모르던 흑미가 웬일로 손부채를 파닥이며 말을 이었다.

“아우, 진짜요. 엄청 뜨거웠어요. 앗! 백야 위험해!”

백야는 가장 나중에 떨어진 룬의 몸 아래에 깔려 하얀 날개로 바닥을 쳤다.

“삐야아악!”

흑미가 당황한 눈으로 룬 근처로 다가오며 외쳤다.

“백야가 룬 님 엉덩이에 짜부가 됐어요!”

“……뀨.”

룬은 몸을 일으키며 화난 백야를 달래었다.

“삐이! 삐이이!”

“뀨우.”

[미안, 백야.]

다행히 룬이 몸을 일으키자 찹쌀떡처럼 눌렸던 하얀 새는 원래 모습으로 무사히 복귀됐다.

소란스러운 정리가 끝나고,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하늘.

보글거리며 터지는 용암 가운데에 붉은 대리석으로 된 다리가 놓여있었다.

그 너머, 화염이 곳곳에서 험악하게 용솟음을 치는 가운데에 고고하게 서 있는 붉은 성이 보였다.

“오옹. 성이 빛이 나서 빨간 해님 같아요.”

흑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공감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일렁이는 붉은 빛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

룬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뀨.”

[이게 말로만 듣던 불의 신전이란거지.]

페르디키온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캬우.”

[그래. 평소에는 나도 들어올 수조차 없는 곳이지.]

페르디키온도 감회가 새로워 보였다.

“캬아악.”

[묘한 기분이다. 어릴 적에는 내 아버지가 나는 이 성전에 들 자격도 없는 놈이라며 타박하셨건만.]

그 말에 룬이 대답했다.

“뀨우.”

[그런데, 이렇게 온 거네. 형은.]

“캬아.”

[그래.]

나름대로 이 순간을 고대했던지, 페르디키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면의 문을 보며 먼저 걸음을 떼었다.

“캭.”

[들어가지.]

페르디키온과 다른 이들이 문 앞에 서자, 불로 된 고대어가 허공에 떠올랐다.

자격 없는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와 함께 정당한 목적을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문구였다.

페르디키온이 당당하게 외쳤다.

“캬아!”

[나, 파시야스의 아들 페르디키온이 성스러운 불의 시험을 받고자 왔다.]

고대어로 적힌 글자가 사라졌다.

잠시 뒤, 거대한 성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쿠웅!

룬은 뒤를 돌아보며, 재차 당부했다.

“뀨뀨.”

[미리 말했지만, 여긴 불의 힘 외에는 쓸 수 없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고, 튕겨져 나갈 수도 있으니 조심해.]

“네!”

“뺙!”

“걱정 마십쇼!”

흑미와 백야, 제드 순으로 답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페르디키온이 들어가고, 그 다음 룬이었다.

문 너머에 손을 넣자마자 룬은 묘한 감각을 느꼈다.

‘뜨거운 줄도 모르게 녹아버릴 것 같은걸.’

룬은 감각이 익숙해지도록 잠시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섰다.

불로 된 생명체만 서 있을 수 있는, 불의 금속으로 된 성.

공기마저 불을 삼켰다 뱉는 기분.

붉은 대리석은 분명 단단한 감촉이었지만, 타오르던 불이 그대로 굳어진 듯했다.

‘이런 느낌이군.’

몸도, 정신도.

불에 잠겨 들게 만들었다.

“캬아.”

[첫 번째 관문이다.]

불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문.

그 옆에는 안내를 위한 것인지, 고대어로 글자가 적혀있었다.

끓는 땅은 바다와 같으니, 신전을 방문하는 자는 발을 담가 몸을 정결히 해야 한다.

룬은 문장을 곱씹어보았다.

‘의미만 보면 청결한 몸가짐을 뜻하지만…….’

시선을 들어보니, 징검다리 하나 없는 붉은 용암의 강이 보인다.

“캬악.”

[내가 먼저 건너보마.]

해츨링 모습의 페르디키온이 겁 없이 흐르는 용암에 풍덩, 몸을 담갔다.

그러더니 얼굴을 팍 구겼다.

“……뀨.”

[형, 뜨거워?]

“캭!”

[아니다! 하지만 너희들은 좀 힘들겠군.]

땀이 뻘뻘 흘릴듯한 얼굴로 페르디키온은 뭔가 결심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무척 고마운 일. 너희들은 거기서 기다려라.]

뜨거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페르디키온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룬은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리하고 있군.’

아직 성체가 아닌 페르디키온의 비늘이 더 빨갛게 반짝이고 있었다.

“뀨.”

[저 녀석이 뜨거워할 정도면, 우린 그냥 건너갈 순 없겠어.]

화룡족의 비늘조차 달궈질 지경이라면 다른 녀석들도 화상 정도는 감안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사이, 호기심을 못 이기고 용암에 손을 대본 제드가 펄쩍 뛰며 외쳤다.

“아이쿠 뜨거워라! 제드 탄다! 훅! 후욱!”

“제드 아저씨! 손이요 손!”

제드의 벌겋게 익은 손을 함께 후후 불어주는 흑미를 본 룬은 진정 될 때 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여길 건너는 방법이라.’

데인 손을 마구 흔들어대던 제드가 오른손을 눈썹에 두고 저 멀리 가는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멀리도 가셨네요. 벌써 엄청 작아지셨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겁니까요?”

그 말에 룬은 제드를 바라보았다.

“뀨뀨우.”

[따라가야지.]

“하긴,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긴 합니다만…….”

쩝, 하고 제드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제드로서는 불의 신전에 또 언제 와볼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당연했다.

“삐이?”

백야가 고개를 갸웃, 하며 용암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룬은 좋은 방도를 떠올렸다.

“뀨후.”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제드였다.

“예에? 진짜요?”

흑미와 백야도 룬에게 시선을 모았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준 룬은 열심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붉은 해츨링을 바라보았다.

시련은 시련인지, 엄청난 불길에 훅 휩싸였다가 다시 건너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뀨우.”

[저 녀석은 안 되겠네. 이제 와서 부르기엔 너무 멀리 갔어.]

흑미가 물었다.

“룬 님. 그럼 저희도 같이 갈 수 있어요?”

“뀨.”

[응.]

태연히 답하는 룬에게 제드가 은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설마 저를 두고 가시기라도 하는건 아니시죠?”

대답 대신, 룬은 흑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뀨우.”

[흑미야.]

“네에!”

“뀨뀨.”

[네 정령 꺼내 봐.]

“옹! 알겠숩니다!”

제드처럼 눈썹 근처에 손을 올리며 대답한 흑미.

여우귀를 쫑긋거리며, 흑미가 붉은 브로치에 손을 가져가 대었다.

“얘들아, 모두 나와!”

쇽!

쇽!

쇽!

쇽!

쇽!

흑미의 부름을 받은 불의 정령들, 불고양이들이 긴 꼬리를 살랑이며 나타났다.

-냐앙!

“힛. 간지러워 이식아!”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몸을 슥 들이미는 이식이를 보며 흑미가 까르륵 웃었다.

룬은 흑미에게 말했다.

“네 정령들에게 부탁해 줘. 우릴 데리고 건너편으로 가 달라고 말이야.”

“네! 얘들아!”

흑미의 부름에 다섯 마리의 불 고양이들이 동시에 흑미를 바라보았다.

“룬 님한테 일식, 이식이. 제드 아저씨한테 삼식이. 나는 사식이랑 오식이!”

쇽쇽!

쇽쇽!

쇽!

말을 알아들은 불고양이들이 흑미의 지휘에 맞춰 날래게 몸을 움직였다.

-냐앙!

-냐아앙!

백야는 날개를 파닥이며 냉큼 선봉을 차지했다.

“끼야악! 고양이한테 물렸습니다요오!”

난쟁이 제드는 삼식이에게 장난감처럼 물려서는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룬은 제드를 바라보고는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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