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 (227/242)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에, 누가 들어온 것인가?]

울림으로만 느껴지는 진언.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생물이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격이 달랐다.

위험하다.

그렇게 직감한 순간, 머리 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덮쳐 내려왔다.

그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굳이 따지면 <손>이라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잘못하면 휘말린다.’

빠르게 뒤로 몸을 뺀 룬이 어두운 통로를 내달렸다.

길지 않았던 통로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거의 끝에 다다른 룬은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

아직 닫히지 않는 통로 너머의 광경이 보였다.

거대한 손에서 도망치려 울부짖는 레드 드래곤들.

그리고, 소리가 된 울림이 들려왔다.

[어둠……인가.]

포식자 같은 울림 너머로.

거대한 손이 붉은 드래곤들을 뒤덮는 장면이 보였다.

혼란스럽게 뒤틀리며 손은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레드 드래곤들.

그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룬이 보았던 통로가 닫혔다.

“뀨후우…… 뀨후…….”

숨을 몰아쉰 룬이 힘겹게 몸을 세웠다.

뜨겁고 신성한 불꽃이 가득한 불의 신전 전당.

룬이 보았던 그 비현실적인 광경은 끔찍한 환상인 양 사라졌다.

하지만 룬의 몸은 차가웠다.

‘대체 그건 뭐였지. 완성되지 않은 세계?’

룬이 생전 처음 보고, 처음 듣는 무언가였다.

특히 그 <손> 같은 것은…….

압도하는 질감과 산보다 거대한 크기.

태양을 삼키는 괴물을 본 것 같았다.

룬 역시 그 손에 닿았다면 분명 레드 드래곤들처럼 쥐어 잡혔을 터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룬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룬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침착하자.’

호흡을 다스리자, 열 섞인 공기가 뱃속을 데웠다.

그제야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뀨후우우우.”

의식적으로 호흡을 계속하자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겨우 진정이 되자 룬은 좀 전에 본 광경을 곱씹었다.

‘크리스티나에게서 받은 전승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무언가였어. 그런데.’

룬은 오른쪽 앞발을 들어보았다.

“……뀨.”

[희미하지만 왠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어.]

룬은 낮게 읊조리며 다시 한번 좀 전의 광경을 다시 떠올리려 노력했다.

거대한 수조에 술을 탄 것처럼 아주 약한 느낌이라, 정확한 파악은 어려웠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속으로 하나씩 짚어가던 룬은 문득 호흡을 멈췄다.

‘알았다.’

믿을 수 없었지만.

조금 전 마주친 <손>이 지닌 것은 룬과 비슷했다.

정확히는, 그 <손> 역시 여러 속성이 뒤섞인 무언가였다.

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마구 뭉쳐져 있었지만, 근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요소들이었다.

콰아아아!

그때, 제단이 있는 자리에서 불기둥이 용솟음쳤다.

“뀨후.”

[페르디키온은…… 끝난 건가.]

룬은 점차 줄어드는 불기둥을 보며, 페르디키온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페르디키온의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캬아!”

[해냈다, 룬!]

식은땀이 마를 정도로 더운 곳이라 다행이었다.

차마 웃어줄 수는 없었으나,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평소 같은 목소리로 맞이해주었다.

“뀨우.”

[수고 많았어, 형.]

“캬. 캬아!”

[그래. 봐라! 이게 내 과업이다.]

앞발에 들고 있는, 과업의 증표.

심장을 걸고 받아 온 보석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특이한 보석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룬은 생각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 이 녀석은 그 일과 얽히지 않았어.’

만약 페르디키온이, 또 다른 장소에 레드 드래곤 족들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끔찍한 모습을 알았다면, 저리 태연하게 과업을 받아 왔다며 환하게 웃을 리 없었다.

“캬아.”

[그런데 열쇠가 하나였던가.]

룬이 제 앞발을 바라보았다.

방금, 기괴한 공간으로 가는 데 사용한 열쇠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몸 속에 기운을 살폈지만, 그 길과 연결된 마력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길이 사라졌어. 완전히.’

길을 끊은 건 아무래도 그 손의 주인이 한 짓인 듯했다.

다른 하나의 열쇠를 마력으로 바꿔 몸에 간직하며 룬이 입을 열었다.

“뀨우.”

[하나뿐이야.]

다행히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을 뿐, 더 파고들어오진 않았다.

“캬아.”

[그런가? 과업을 받으러 들어가는 데에 신경 쓰느라 잘못 본 모양이로군.]

조금 의아하게 여기긴 했으나, 페르디키온은 과업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 커 보였다.

당당하게 무언가를 쥔 페르디키온이 외쳤다.

“캬아!”

[자! 그만 내려가자. 다른 녀석들도 기다릴 테니.]

“뀨우.”

[그러자, 형.]

현재로서는 룬에게도 이게 최선이었다.

그가 본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엔 당장 룬 역시 어떻게 꺼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페르디키온과 전당 밖으로 나가자, 남아있던 이들이 둘을 반겼다.

“이야! 성공하셨군요! 이 제드, 잘 다녀오시리라 믿고 있었습죠!”

“삐이약!”

제드와 백야가 먼저 반겼다.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캬아. 캭.”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다. 당연히 얻어야 하는 것이지.]

좀 전에 룬에게 약한 소리를 한 녀석이 말은 잘했다.

흑미가 웃으며 다가와 폴짝 뛰어 룬에게 안겼다.

“룬 님! 어? 뭔가 시원해요.”

아까는 엄청 뜨거웠는데? 라며 흑미가 룬의 비늘을 툭툭 쳐보았다.

룬은 적당히 대꾸했다.

[암속성과 수속성을 이용하긴 했어. 너무 뜨거우니까, 여긴.]

“룬 님 더위 타시는구나. 흑미도 쪼끔 덥긴 해요!”

씨익 웃은 흑미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하자, 제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불이란 불은 다 다뤄봤는데, 이런 엄청난 열기는 생전 처음입니다요! 드워프 몸이었으면 홀랑 타버렸을지도요?”

물끄러미 그들을 보던 룬이 입을 열었다.

“뀨.”

[그래. 그만 돌아가자.]

“캬악.”

[그래. 나 역시 얼른 돌아가서 과업에 대해 상의하고 싶군.]

“오오옷! 과업! 뭔지 너무나 궁금합니다요!”

호들갑스러워진 제드에게 잠시 눈길을 준 룬이 말했다.

“뀨.”

[귀환석을 써 줘. 제드.]

“후아- 예!”

얼른 떠나 과업에 대해 알고 싶어하면서도, 불의 신전을 떠나는 것이 내심 아쉬운 모양이었다.

주변을 한번 더 눈에 담은 제드가 귀환석을 사용했다.

“어이쿠야!”

“삐이약!”

“아우!”

쿠당탕!

데굴데굴.

제드와 백야, 흑미가 가장 먼저 떨어졌다.

유일하게 흑미만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했고, 백야는 통통 가볍게 땅에서 몇 번 튕겨졌다.

그들 뒤로 페르디키온와 룬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캭.”

[피곤하지만, 과업에 대한 의논까지는 하고 싶군. 다들 괜찮겠나?]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미도 냉큼 찬성표를 던졌다.

이게 진짜긴 해

“좋아요! 하암…….”

영 피곤하긴 했는지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온 흑미.

그를 본 룬이 입을 열었다.

“뀨우.”

[피곤하면 먼저 자도 돼. 나중에 결과만 들어도 되니까.]

그 말에 흑미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으으응! 아니에요!”

분홍장미색 눈이 룬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같이 하고 싶어요. 같이 다녀왔는걸요!”

룬은 눈에 힘을 꽉 준 흑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뀨뀨.”

[그래. 늦게 자더라도 열은 식히는 편이 좋을 거고.]

신전을 나왔음에도 흑미의 머리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불의 신전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열이 끓는 곳.

흑미의 볼이 아직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을 정도로 뜨거운 장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분 좋게 귀를 뒤로 접고 쓰다듬 받는 흑미가 히-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치마에서 자신의 오색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흑미가 이 주머니에 시원한 음료 담아왔어요! 같이 마셔요!”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디키온이 그에게 눈짓했다.

“캭.”

[그럼 가지.]

자리를 옮긴 그들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흑미가 주머니에서 꺼낸 복숭아와 레몬 아이스티, 오렌지와 라즈베리 주스.

그리고 설탕 뿌린 튀긴 과자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뀨우.”

[자, 이건 네 몫.]

룬이 물 접시와 설탕 뿌린 튀긴 과자를 나눠주자, 백야가 냉큼 날개를 파닥였다.

“삐잇!”

더위보다 배고픔이 컸던 백야는 냉큼 제 몫의 과자부터 쪼아먹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