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드도 한숨 돌린 얼굴로 주스를 집어들었다.
“드워프도 견디기 힘든 열이라니, 무시무시한 장소지 뭡니까요.”
주스를 맥주 들이키듯 꿀꺽거리며 마신 제드가 꺼억, 하고 점잖지 못한 트림을 했다.
‘이걸 아멜리아가 못 봐서 다행이라 해야하나.’
밉상인 모습의 제드를 상대적으로 덜 본 아멜리아를 잠시 떠올린 룬도, 요정수를 담은 컵을 가져왔다.
맛이 들어간 것보다, 시원한 물 한잔이 더 좋았다.
‘생각 같아서는 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만.’
룬은 변신용 황금팔찌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물을 마시며 보니, 페르디키온도 어느새 붉은 머리의 소년으로 모습을 바꾼 참이었다.
레몬 아이스티를 반쯤 마신 화룡족 소년이 운을 떼었다.
“내가 받은 과업부터 알려주겠다.”
직설적으로 본론부터 꺼낸 페르디키온이 불을 그대로 빚은 듯한 보석을 품에서 꺼냈다.
탁.
마력을 주입하고 테이블 위에 놓자, 일렁이는 불꽃이 글자가 되어 허공에 나타났다.
일국의 경외를 얻어라.
“…….”
다들 글자에 시선을 두고 있자,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내 아버지가 제안한 과업은 내 힘을 이용해 한 나라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파괴적이고 힘을 통해 쟁취하려는 파시야스의 방식다웠다.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 그 어떤 상대라도 덤빌 수 없고, 감히 범접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지.”
룬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파시야스의 생각을 짐작했다.
보나 마나 상대를 폭력으로 억압하여 감히 덤빌 생각도 못 하게 하라는 뜻이었을 터.
제드는 당황한 눈으로 혼잣말을 외쳤다.
“히익! 그랬다간 제2의 파시야스 치세국이……!”
“괜찮아.”
제드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룬이 끼어들었다.
“생각보다 할 만한 과업이 나왔으니까. 그렇지, 형?”
고개를 끄덕인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그래. ‘경외심’을 얻는 방법이 폭력뿐만은 아니니.”
페르디키온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실려있었다.
룬 역시 과업 내용을 본 순간, 됐다 싶은 참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쉬운 게 걸렸는데.’
그 말에 흑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라 하나가 페르디키온 님에게 경외심을 갖게 한다는 거죠? 으음. 왠지 어려울 거 같아요.”
“정석대로 가면 그렇지. 하지만 이런 방법을 쓰면 어떨까.”
룬이 적당히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큰 나라, 혹은 제국에 성체 드래곤의 모습으로 몇 번 강림하는 거야.”
사실, 드래곤의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경외쯤은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드래곤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잠시 허공이라도 돌다 간다?
사람들은 이를 길할 징조인지, 흉할 징조인지 점하며 경외를 불러 모으리라.
여기까지 생각한 룬이 말을 이었다.
“과거 레드 드래곤이 강림한 적 있다거나, 불을 숭상하는 문화가 있는 나라라면 더 좋겠지.”
룬은 제드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머스킷 상회가 진출해 있는 곳이라면 소문도 빨리 퍼트릴 수 있잖아. ‘악인들을 벌하는 불의 지배자,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고.”
그 과정에서 진짜 악인인 자들이 나온다면 본보기로 그들만 처리하면 될 일.
‘아무리 좋은 나라여도 정말 선한 사람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거기에 머스킷 상회를 통한 소문만 잘 퍼트려도, 자연스럽게 약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할 터였다.
왼손을 오른손 바닥에 탁, 하고 친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오! 이 제드, 이해했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비록 해츨링이지만, 언령까지 쓸 수 있는 페르디키온이다.
그야말로 불의 지배자에 걸맞은 힘을 키울 자.
인간들이 보기에 불의 지배자의 강림으로 보일법한 기적을 만드는 건 가능했다.
한데,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더니 그를 부정했다.
“싫다.”
“싫다고?”
룬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페르디키온.
그는 한 손으로 테이블 위를 탕, 하고 내려치며 외쳤다.
“그런 숟가락만 얻는 졸렬한 짓은 안 한다!”
“…….”
룬은 역시나, 하는 심정으로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 방법은 절대 안 쓴다는 거지?”
“당연하다. 내 힘으로 정당하게 해내야 할 일이니까.”
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인가. 그럴 것 같긴 했다만.’
사실 룬 역시 이 방법이 썩 내키는 건 아니었다.
제안한 방법이 쉽긴 했지만, 과업을 이룬 후 페르디키온이 떠나면?
이내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그걸 알면서도 진행할 녀석이 아니긴 하지.’
언령으로 진행하는 이상, 과업은 수행하는 해츨링이 납득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룬은 이번에야말로 페르디키온에게 잘 맞는 방법을 꺼냈다.
“그럼, 역시 두 번째 방법을 써야겠네. 사실 이게 진짜긴 해.”
“오잉? 그랬습니까요? 더 없이 좋아보였는데 말입죠.”
룬은 제드의 말에 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작은 나라,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나라를 찾아가서 과업을 수행하는 거야. 쉽지는 않겠지만.”
그때 흑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작은 나라면 더 쉬운 거 아니에요? 작으면, 금방 바뀔 거 같은데!”
그 말에 룬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렇지 않아. 드워프도, 엘프들도. 그들만의 문화를 굳건하게 지키려는 성정이 강했잖아.”
“앗. 이해했어요.”
흑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드가 냉큼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런 나라 하면 이 제드가 또 잘 추천해 드릴 수 있습죠! 머스킷 상회는 대륙의 정보도 제법 빠삭하거든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제드가 마침 벽에 붙어있는 대륙 지도를 냉큼 가져왔다.
“여기가 아주 딱! 좋겠네요!”
모두가 제드가 손으로 가리킨 장소를 확인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섬?”
“예이! 이래 봬도 제대로 명칭이 있는 섬나라입니다요.”
이번에는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이런 건 처음 본다만.”
제드가 손가락으로 톡톡 섬 그림을 두드리며 말을 더했다.
“그럴 만합죠. 저도 여기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안 것도 우연이었어요.”
제드의 말이 길어질 듯하자 룬은 흑미에게 오렌지 주스를 부탁해 마시기 시작했다.
헛기침을 한 제드가 입을 움직였다.
“아시다시피, 머스킷 상회는 대륙 곳곳에 퍼진 조직이잖습니까요? 새로운 지점을 내고 싶어 한 녀석이 여기저기 다니다, 이 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옳다구나! 새로운 개척지로구나! 하고 들어갔는데…….”
극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반짝인 제드가 힘을 잃고 허리를 수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만큼은 들어가긴커녕 문전박대까지 당했습죠. 그 뒤로 조사를 좀 해봤는데,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요.”
제드는 생각을 떠올리며 하나씩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선, 방향을 알려주는 아티팩트들이 자꾸 고장이 난다는 점입죠. 오히려 어둠을 증식시키는 아티팩트는 통한다나요?”
“…….”
탐색을 하러 가야 할 장소가 어둠을 부르는 아티팩트만 가능하다니.
어둠 속을 탐색할 게 아니라면 정말 쓸모없긴 했다.
제드는 흐흐,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이상한 종교가 있다는 소문에, 원래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말까지. 소문은 무성한데 진실된 건 없더라고요.”
룬은 페르디키온의 얼굴을 보았다.
바람직하지 않은 구석을 느낀 화룡족 소년은, 이미 마음을 정한 눈이었다.
“좋다. 거기로 정했어.”
페르디키온의 말에 나름 역할을 했다 여겼는지, 제드는 콧김을 훅 뿜었다.
“역시! 잘만 되면 머스킷 상회가 새 땅에 진출할 기회…… 가 아니고, 상회도 들어가서 도울 수 있을 겁니다요!”
룬은 잠시 어이없는 눈으로 제드를 보았다.
과업을 도우러 가는 순간조차도 상회를 추가로 설립할 기회로 이용하려 드는 저 속마음.
‘불의 신전 관문이 살려보낸 게 용하네.’
속으로 고개를 저은 룬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쉬고 다음에 이야기해. 일어나, 흑미야.”
“앗, 네! 흑미 깨어 있숩니다!”
“삐룻!?”
룬의 말에 살짝 졸고 있던 흑미와 백야가 퍼드득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페르디키온이 파장을 알렸다.
“이만 해산하지. 앞으로의 계획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한다.”
“네에에…….”
페르디키온의 말에 겨우 대답한 흑미와 겨우 날갯짓을 한 백야.
제드가 익숙하게 둘을 데리고 문가로 갔다.
“다들 푹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요!”
“잘자.”
룬이 손을 흔들어주자, 제드와 백야, 흑미가 먼저 사라졌다.
룬도 페르디키온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 녀석, 시킨 일은 제대로 해 뒀겠지?’
페르디키온이 갈 준비를 끝내기 전, 룬 역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번쩍.
눈을 뜬 룬은 베르딘의 부엌을 찾았다.
“뀨우!”
[베르딘! 준비 다 됐어?]
룬의 물음에 유령 베르딘이 씩 웃었다.
-예, 준비 다 되었습니다. 룬 님.
한솥 가득 끓인 스튜와, 수십 박스에 담긴 빵.
물품들을 확인하고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뀨.”
[훌륭하네. 그럼, 이거 내가 가져갈게.]
-예.
베르딘은 룬이 어디 쓰려고 음식을 이렇게 산더미만큼 만들게 시킨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충신답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시간도 딱 좋은데.’
시간은 새벽이지만, 아직 밤이 펼쳐진 하늘.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 모든 물품을 넣고 야간 경비를 서는 드워프부터 찾아갔다.
‘아차.’
……말을 걸기 전, 룬은 대화하기 좀 더 편한 인간의 모습을 바꾸었다.
이 맛은……!
가볍게 숨을 들이켠 룬은 창 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침이 되면 크리스티나에게 연락부터 해야지. 그리고…….’
속으로 일어난 일을 하나씩 셈해보며, 룬은 일의 순서를 정리해갔다.
‘대륙으로 드워프들을 진출시키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동시에 그레이스가 힘을 다스리도록 해주고.’
자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