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242)

밤을 걷는 걸음에 따라,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룬은 흑미와 백야, 제드. 페르디키온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레이스와 아멜리아의 얼굴까지 함께 떠올린 룬이 중얼거렸다.

“……녀석들이 잘 해낼 수 있도록 해 줘야겠지.”

어리고 해맑은 녀석들이 화룡족 소년의 과업을 앞두고, 각자의 자리에서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룬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늘에 보이는 별들 중 그가 아는 별은 단 하나도 없다.

마치,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보고 듣는 이야기들처럼 새로웠다.

‘작은 섬에서 승천을 꿈꾸던 이무기가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무기 시절.

때때로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기에, 그 하늘을 등지고 살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곧 자조적인 옅은 웃음이 흘렀다.

세상을 등지고 수련한 것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적절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이 묘했다.

“사는 게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룬은 걸음을 조금 바삐 했다.

저 멀리 룬의 목표가 보였다.

‘내실 입구 경비들이군. 저 녀석들부터 시작하면 되겠어.’

룬은 갑옷을 입은 드워프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그러자, 두 명의 경비 드워프가 식겁하여 펄쩍 뛰었다.

“커헉?!”

“흐허억!”

“누, 누구냐! ……룬 님?”

무기까지 겨누었다가, 그 대상이 룬임을 깨달은 드워프들.

룬은 태연하게 그들을 보며 물었다.

“너무 놀라는데. 생각보다 겁이 많은걸.”

당황도 잠시.

겁이 많다는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러움이 올라온 드워프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닌 게 아니라, 놀라 창을 들이민 모습은 용맹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 어허험! 놀라긴요. 이건 훈련대로, 경계한 것뿐입니다.”

경비 드워프들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다른 드워프도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럼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룬 님.”

속이 훤한 허세지만, 룬은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대신, 룬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고생 많네. 다름 아니라, 이거 좀 먹어보라고 가져왔어.”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내미는 스프 한 그릇.

심지어 냄새까지 좋았다.

엉겁결에 그릇을 받은 두 경비 드워프는 룬을 재차 보고, 그릇을 다시 바라보길 반복했다.

“냄새가 좋긴 합니다만…… 이게 뭡니까?”

“원래 저희들은 근무 중에 이런 걸 먹으면 곤란한데…….”

흔들리는 시선은 스프에 고정되었으면서도, 한 차례 사양하려 들었다.

그 순간.

꾸르르르륵.

“…….”

“…….”

한창 야식이 맛있을 시간에 풍기는 스프 냄새에 뱃속이 솔직하게 반응했다.

민망한 침묵이 감돌자, 룬이 말했다.

“내가 새로 고용할 요리사가 만든 거야. 실력 좀 보려고.”

그 말에 드워프들이 눈치를 보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룬이 이어 말했다.

“여기 와서 들었는데, 베르딘이 타계한 후 다들 그를 많이 그리워한다더라고.”

그 말에 나이 든 경비 드워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베르딘 님…… 이 성의 어머님 같은 분이셨죠. 제가 신입일 때부터, 종종 챙겨주셨습니다.”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베르딘이 말한 대로네.’

유령 베르딘이 살아난 첫날.

그는 요리를 하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덕분에, 룬은 이 성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페르디키온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들었다.

그중 하나가, 생전에 베르딘은 야간에 일하는 경비 드워프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어 줬다는 거였다.

룬은 당시 베르딘이 했던 말을 회상했다.

***

-룬 님, 제가 유령이라고. 그러니 생전에 기억나는 게 뭐가 있는지 말 해보라셨잖습니까?

“뀨우.”

소생 언령 수련을 하던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딘이 이어 말했다.

-후대의 드워프들이 이 부엌에서 한 이야기들이 기억납니다.

“뀨.”

[무슨 이야기?]

아련한 미소를 띄우며 감자를 깎던 베르딘은, 잠시 손을 멈추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생전에 제가 살아있을 때 먹던, 따끈한 수프. 손맛이 느껴지는 도시락이 그립다는 말이요.

룬은 얼굴을 돌려 베르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라도 떨굴 듯한 표정이었다.

-제 음식을 먹은 모든 녀석들이, 다 가족 같아지더군요. 그래서 더 많이, 더 맛있는 밥을 먹이고 싶습니다.

이어진 말에 룬은 내심 양심이 뜨끔했다.

-그러니, 저를 사라지게 하지 마시고 좀 더 존재하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아무렇지 않게 룬은 베르딘을 돌아보았다.

“뀨우.”

[엄밀히 말해, 너는 베르딘이 아니야. 이 주방에 남은 기운 같은 거지. 차라리 제대로 된 혼이었다면 모를까.]

고개를 약간 기울인 룬은 베르딘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지금의 너는, 베르딘의 잔상에 가까워. 본래는 여기 있으면 안되지.]

이 부엌에는 베르딘의 혼이 담겨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혼이 담긴 주방도구와 남겨진 기원. 소망.

소생 언령으로 인해, 이 장소 곳곳에 남아있던 그 자취가 살아나 형태를 이뤘을 뿐.

‘물레방앗간의 도깨비 같은 거라는 거지. 저 녀석은 금이나 은을 나오게 하는 방망이 대신, 주걱을 들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룬은 희끄무레한 모습의 베르딘을 주시했다.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한 베르딘은 잠시 덧없이 사라질 듯 투명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하찮아 보였다.

진짜 베르딘은 이미 죽어 사라졌고,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사념.

희미한 손을 꾹 쥔 베르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입니다, 룬 님. 부탁을 좀 들어주십시오. 이 사라지지 않은 마음이 너무나 강합니다. 오죽하면 사라지지도 않고, 이리 부엌에 남아있었겠습니까.

잠시 베르딘을 바라본 룬은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뀨.”

[실은, 나도 그럴 생각이야.]

-!

베르딘의 얼굴이 빠르게 룬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계속 요리할 수 있는겝니까?

룬이 앞발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뀨우.”

[진정해. 아직은 내가 힘을 더 키워야 가능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수련하는 거고.]

그 말에 베르딘이 화색을 띠었다.

-허면, 뭔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베르딘에게, 룬이 말했다.

“뀨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사양 않고 부탁 좀 할까.]

그리고, 룬은 엄청난 양의 스프와 빵을 비롯.

평소 야식으로 챙겨준 도시락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

회상을 마친 룬은 드워프들이 근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로 얼굴을 보며 눈치를 주고받은 경비 드워프들이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험! 룬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번 맛보겠습니다.”

후룩!

나무 그릇에 담긴 스프가 경비 드워프들 목 안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스프를 다 마시기도 전에 놀라 그릇을 입에서 떼어보았다.

“이, 이 맛은!”

“허엇!”

드워프들의 반응을 본 룬은 속으로 만족스러움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건 안 들어봐도 성공이군.’

무어라 말하려다, 다시 그릇에 입을 내고 쭉쭉 들이키는 드워프들.

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숨에 그릇을 비운 드워프가 빵을 입에 넣으며 외쳤다.

“아주, 아주 맛있군요! 어릴 때 기억이 떠오르는 기분도 들고…….”

“그러게 말입니다. 왠지, 그리운 맛이 납니다.”

뭔가 찡하게 감동이 온 표정으로 말을 덧붙인 드워프는 눈시울이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협조해 줘서 고마워.”

룬은 그릇을 가져가며 말을 흘렸다.

“조만간 대륙에서 드워프들 식사를 책임질 녀석이거든. 나중에 먹으러들 오든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던 드워프들이 고민스러운 눈을 해왔다.

“대륙이라면 저희가 휴가를 받아도 가기 어려운 곳인데…….”

“지금은 그렇지.”

대꾸하며, 룬이 자연스럽게 정보를 풀어냈다.

“그런데, 조만간 대륙까지 간단히 오갈 길이 생길 예정이거든.”

“정말입니까?”

“그래. 나중에 개통파 드워프들에게…… 아 참. 이거 아직은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룬에게 물어왔다.

“개통파 드워프들이라면, 저기 보이지도 않는 공방을 차린 녀석들 말입니까?”

그 말에 룬이 어쩔 수 없이 비밀을 말해준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응. 지금은 내부 수리 중이지만, 끝나면 대륙을 빠르게 오갈 물건을 만들어 낼 거야.”

“!”

“!”

이동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축에 속한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드워프들에게, 이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룬이 말을 덧붙였다.

“소정의 이동비용만 받고 운영 시킬 테니, 나중에 편하게 놀러 와서 먹어.”

용건을 마쳤다는 듯, 룬은 주섬주섬 그릇을 챙겨 넣었다.

“그럼, 난 다른 녀석들에게도 먹여봐야 하니까 가볼게.”

무어라 말하려던 드워프들을 두고 룬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날 새벽.

룬은 성 내의 다른 드워프들을 불러 스튜를 먹였다.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건, 이건…… 초대 성의 주방장이셨던 베르딘 님의 손맛!”

“룬 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소년 병사였던 시절, 밤 근무 때 뱃속 뜨끈하게 데우고 일하라던 그분의 맛이 느껴집니다!”

“그분이 손맛 하난 끝내줬죠. 극락에 오른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어느덧 룬이 돌린 스튜에는 이런 이름까지 붙었다.

‘영혼의 산양 고기 스튜, 라니. 묘하게 맞는 말이네.’

룬은 그 소식을 주방장인 베르딘에게 들려주었다.

-그렇습니까? 이거,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군요.

밤새 결과를 기다린 게 틀림없으면서, 반응이 꽤 겸손했다.

룬은 내친김에 물었다.

“너 말이야, 여기 말고 다른 장소에 가더라도 요리를 할 수 있겠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베르딘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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