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242)

-혹시, 그곳에도 드워프가 있습니까?

“응. 특히, 타지에 나가 있느라 네 손맛을 그리워할 녀석들이.”

그 말에 베르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굳은 결심을 마친 베르딘의 유령이 입술을 떼었다.

-가고 싶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고개를 끄덕인 룬은 한쪽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산양 인형을 바라보았다.

‘베르딘을 옮기는 건 좀 더 연습해야겠지만, 이 속도라면 곧 해낼 수 있겠어.’

조만간 드워프들에게 추억의 맛으로 기억된 베르딘의 손맛을, 대륙에 가면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이곳 드워프들이 대륙으로 갈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만들어 주는 건 이걸로 충분해.’

대륙에 대한 호기심도, 결혼에 대한 목적도 없이.

전통파든 개혁파든, 누구나 끌릴만한 이유.

그저 맛있었던, 좋아했던 밥을 해 다시 맛볼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소정의 이동비를 낸다면, 개통파가 커지는 데 필요한 자금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겠지.’

그 자금과 함께 대륙에서 활약할 개통파 드워프들이, 추후 룬의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유령 베르딘과 이야기를 마친 룬은 방으로 이동했다.

바로, 크리스티나에게 불의 신전에서 본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변했어.

룬은 자신의 방에 도착한 후, 크리스티나와 통하는 통신석을 꺼냈다.

마력을 흘려넣자, 한 손에 커다랗게 잡힌 옐로 다이아몬드가 가벼운 진공음을 냈다.

그리고, 싱그러운 목소리로 크리스티나가 인사를 건네왔다.

<룬, 이번에는 연락이 제법 빠른 편이구나.>

룬은 내심 양심이 찔렸다.

자잘한 사담을 나누는 취미가 없다보니, 룬은 크리스티나에게 간단한 안부 전화를 하는 일이 적은 편이었다.

“……앞으로는 종종 이렇게 연락할게.”

룬은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작게 웃는 소리가 영상 너머로 들렸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룬이 고개를 저었다.

“난 잘 지내고 있어. 그레이스랑 아멜리아는 좀 어때?”

금발이 흔들리며 고개를 살짝 움직인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둘 모두 무척 노력하고 있단다. 그레이스와도 이야기를 나눠봤고, 아멜리아는…… 얼마 전 네가 만든 연습용 곰 인형 하나를 부숴서 미안해하더구나.>

“그랬구나.”

심해에서 강력한 드래곤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 아멜리아.

아무래도 전투에 있어서의 힘 조절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들의 상황을 확인한 룬은 그레이스를 데려오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내일 통로를 열어주렴. 그레이스에게도 준비 하라고 일러둘테니.>

“고마워, 크리스티나.”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룬은 잠시 생각하듯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했어.”

<그렇구나. 무슨 일일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햇살 같은 편안함이 맺혀있었다.

‘평소라면 긴장 풀리기 좋았을 텐데.’

공허하고 거대한 공간에, 뒤엉킨 화룡들.

그들을 움켜쥐는 거대한 힘.

그를 떠올린 룬은 긴장으로 비늘이 떨리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혹시, 레드 드래곤족이 신전에서 과업을 받아오는 거…… 실패한 경우도 있었어?”

룬의 목소리에서 진지한 기색을 읽은 크리스티나가 차분히 물음을 되돌렸다.

<왜 그런 걸 묻는 거니?>

가벼운 심호흡.

그 후, 룬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페르디키온 형이 과업을 받을 불의 신전에 갔었어.”

<…….>

대꾸는 없었다.

하지만, 룬은 하나하나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리스티나는 가벼운 맞장구를 쳐 주거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내가 관문을 지날 차례가 되었을 때.”

그 당시를 회상하는 룬의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거기에서 나는 이상한 걸 봤어.”

룬은 그때 본 광경을 하나씩 읊었다.

“아주 커다란 공간이 있었어. 거기에 어린 해츨링들, 혹은 젊은 레드 드래곤들이 뭉쳐져 있었고.”

낮도 밤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공허.

거기에 나타난 손과 같은 거대한 무언가.

“알 수 없는 심연에 갇혀 있는 레드 드래곤들의 모습은 무척 끔찍했는데.”

룬은 이야기하면서도 소름 끼치던 그 광경이 떠올라, 몇 번인가 미간을 구겼다.

“더 이상 거기 있으면 안 될 거라는 느낌 때문에 더 다가가지 못했어.”

사실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제 비늘이 죽어서 굳어버린 듯, 딱딱해졌고.

빙하 속에 내 던져진 듯 얼어붙는 한기가 느껴졌다.

깊이 모를 공허 속에서 몸부림치는 꺼질 듯한 화룡들이, 또 다른 시선을 느끼고 달려들었을 때 보인 광기.

거기에서 느껴진 소름은 공포와 닮았다.

룬이 정말 어린 해츨링이었다면, 이는 정신이 비어버릴 듯한 광경이었다.

룬은 천천히 눈을 들어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살폈다.

비탄, 애도, 슬픔.

그런 감정들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였다.

룬은 잠정적인 확신을 담아 그녀를 불렀다.

“크리스티나.”

룬의 부름에 말없이 시선을 맞추는 그녀.

룬은 이걸 제 입으로 묻는 것이.

그녀를 바라보는 제 시선의 서늘함이 낯설었다.

“언젠가 나에게 그랬지. 이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다고.”

영상 너머, 가지런한 윤기가 흐르는 금발이 가만히 끄덕여진다.

<그래. 그런 말을 했지.>

룬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잘못 짚은 것이면 좋겠다는 마음과,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존재했다.

어느 쪽이 옳았을지 확인할 방법은 하나.

룬은 입술을 움직였다.

“이런 일이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

침묵에 담긴 답은 하나였고.

그녀의 말은 그 답을 확인시켜주었다.

<알고 있었단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답에 섞인 느릿한 숨결이 풍겨오는 듯했다.

그녀의 호흡이 천천히 말을 실어 보냈다.

<어린 네가 아직 알 일이 아니라 여겼단다. 언젠가 네 힘이 필요한 때가 있겠지만, 그게 아직은 아니니까.>

룬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둠의 후계라 하나, 어린 해츨링인 그에게 침묵을 지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알겠어. 그러면, 하나만 약속해 줘.”

<말해보렴.>

약속.

그 무게를 모를 리 없었다.

심지어, 골드 드래곤 장로쯤 되는 그녀라면 단순한 약속도 큰 제약이 될 수 있었으니까.

룬이 입술을 움직였다.

“적어도 나와 내 주변과 관계된 일은 제대로 말 해주면 좋겠어. 나는 분명 어리지만 그건 내 권리잖아.”

룬은 이 몸으로 태어났을 때 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무력하게, 어디서 나온지도 모를 놈에게 죽는.

그런 억울한 죽음은 결코 당하지 않겠다고.

결의가 담긴 붉은 눈이 크리스티나의 푸른 시선과 마주쳤다.

<네가 한 말은 틀리지 않단다. 하지만, ‘약속’할 수는 없겠구나.>

“!”

룬은 주먹을 꾹 쥐었다.

묻기 위해, 아주 작은 여유가 필요했으니까.

“왜?”

힘이 들어간 룬과 달리, 크리스티나는 어딘가 조금, 편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약속’했거든. 너를 잘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이어 말하는 목소리에 쓴웃음이 묻어나왔다.

<그걸 위해 나는 때때로 침묵을 택할 때가 있을거야. 물론, 언젠가는 모든 것을 말 해주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거란다.>

“그 약속은 누구랑 한 건데?”

되물으면서도 머리에서 떠오르는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그중 하나를 정확히 지명했다.

<네 어머니야.>

“…….”

결국 미간을 구긴 룬이 침묵하자, 크리스티나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네 몸의 안위만 부탁한 게 아니란다. 그녀가 지켜낸 세상에서 네가 너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랐지.>

구름 사이사이로 부서진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영상 너머의 크리스티나는 그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

빛 조각을 모아 짠 비단을 두른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때론 길잡이. 부모. 또는 선배, 누나, 선생님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용해 너를 지켜내는 것.>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뜬 크리스티나가 말을 맺었다.

<그것이 네 어머니와의 약속이었단다.>

룬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내어주기로 약조한 자가, 어찌 저리도 후회 한 점 없는 얼굴인지.

그리고, 과거의 후회가 엿보이는 건지.

룬은 그 시선의 깊이를 무시하면 안된다고 느꼈다.

잠시 생각하던 룬이 말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지?”

크리스티나가 전한 전승 지식은 그저 지식일 뿐.

역사가 거대한 흐름을 비춰줄지언정, 개인의 이야기를 적어내지는 않는다.

그녀 개인의 이야기는 그녀에게서만 들을 수 있을 터.

크리스티나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을게, 룬.>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룬은 통신석을 종료하고 황금팔찌를 빼서 테이블 위에 두었다.

뀨후, 하고 어린 해츨링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라.’

이런 복잡한 기분으로 나갔다가 누군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룬은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자식이란 걸 키운 적도 없고, 부모조차도 없었는데.’

세간에서 풍문으로, 혹은 지나가는 인연들이 말해준 부모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래도 꽤 알았다.

하지만 친부모 밑에서 큰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아쉬움도 없었다.

그런 도움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부모가 없는 것으로 안타까이 여기는 시선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을 비웃곤 했다.

룬은 답을 말해보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야. 이 몸의 어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잠시 기분을 정리한 룬은 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창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이유 없이 빛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를 가만히 받아들이자니 금새 몸이 따끈해졌다.

룬은 천천히 침대 아래로 내려가 뒤뚱이며 문가로 다가갔다.

‘아침 식사나 준비하러 가자.’

진짜 식사 준비는 유령 베르딘이 하겠지만, 대신 룬도 조리실에서 소생 언령의 연습을 해야했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은 시간이었지만, 몸을 움직이다 보면 당장 답을 알 수 없는 생각을 잠시 밀어둘 수 있을 터였다.

***

룬이 부엌에 바로 나타나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인사가 들려왔다.

-일찍 오셨군요. 룬 님.

”뀨우.”

[좋은 아침, 베르딘]

새로운 스프가 보글거리는 큰 통.

푹 익힌 감자와 야채, 고기.

절로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감칠맛 느껴지는 양념 냄새.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느껴지는 부엌에서, 베르딘은 즐거운 표정으로 국자를 움직였다.

-식사라면 곧 준비가 끝납니다. 한데…… 이 늙은이의 기우인지. 룬 님의 얼굴에 근심이 느껴지는 기분이군요.

“뀨뀨.”

[별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룬은 소생 연습 후보군인 토마토와 감자, 그리고 생선 따위를 모았다.

다행히 베르딘은 더 묻지 않고 만든 요리를 하나씩 트레이 위에 올려두었다.

그 점이 룬으로서는 편했다.

‘베르딘이 침묵을 어색해하는 드워프가 아니었던 게 다행이군.’

제드였다면 벌써 눈을 반짝이며 슬금슬금 찔러봐 왔을 것이다.

벌써부터 제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룬 님, 룬 님.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제드, 이래 봬도 산전수전 공중전에 죽음을 불사하는 위기까지 넘어본 드워프 아닙니까!’

-라고 할 게 뻔하겠지. 어찌 된 게 생각 속에서도 이렇게 시끄러울 수 있는 건지.

고개를 흔든 룬이 종지에 스프를 조금 담아 마셨을 때.

“룬 님! 여기 계세요?”

“삐야악!”

백야의 날개 파닥이는 소리와 함께, 흑미가 부엌문을 두드렸다.

“뀨우.”

[있어. 들어와.]

따로 잠금을 해 둔 건 아니기에, 룬의 대답 직후 부엌 문이 열렸다.

들어온 흑미가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희 다 깼어요! 식당에…… 어, 베르딘 할아부지?”

“뺘?”

백야와 흑미의 눈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유령을 바라보았다.

룬은 종지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슬슬 소개해줄 때가 되긴 했지.’

고개를 든 룬이 베르딘 쪽을 앞발로 가리켰다.

“뀨, 뀨뀨.”

[맞아. 이쪽은 베르딘. 조금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베르딘이 아니라고 말해야겠지만, 그 개념을 설명하는 건 당사자가 없을 때 해도 괜찮을 터.

룬의 소개에 흑미가 헉 하고 깜짝 놀란 눈으로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와아! 베르딘 할아부지!”

-허허, 오랜만에 뵙습니다. 흑미 님.

다리가 흐릿한 베르딘이 땅으로 내려와 풍선처럼 둥실거렸다.

“반가워요!”

폴짝!

흑미는 거침없이 뛰어들었으나, 베르딘의 몸을 통과해 건너편에 착지했다.

“어?”

제 몸을 통과당한 베르딘이 머쓱한 눈치로 흑미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흑미 님. 제가 몸이…….

멍하니 제 손과 반투명한 베르딘을 번갈아보던 흑미의 시선이 룬에게 향했다.

룬은 간결하게 상황을 전했다.

“뀨.”

[체질이 좀 변했어.]

물론, 그렇게 간단히 말할 건 아니긴 했지만.

적어도 어찌 말할지 곤란해하는 유령 드워프에겐 안도감을 주었다.

흑미가 귀를 쫑긋거리며 베르딘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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