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칫.
그 이름이 올라올 줄 몰랐던 페르디키온이 포크를 쥔 손을 일순 정지했다.
그러나 이내, 스테이크를 마저 썰어 입 안으로 가져갔다.
“베르딘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 말이냐.”
“응. 맞아.”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구기더니 손에 들려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렸다.
“……룬, 장난으로도 그 말은 안 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그 녀석은 생을 마감한 지 오래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볼이 빵빵해져 있던 흑미가 그 말을 거들었다.
“진짜예요! 흑미도 좀 전에 보구 와써요! 켁켁!”
먹던 소시지 빵을 얼른 삼키고 말해 준 건 고마웠지만, 급하게 먹다 목이 메여버린 모양이었다.
룬은 컵에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자. 이거 마시면서 먹어.”
물컵을 받은 흑미가 그 와중에도 감사의 말을 먼저 했다.
“아우! 아우! 켁켁. 고, 고마워요. 룬 니임…….”
“물부터 마셔. 체하지 않게 조금씩.”
물도 급히 마시면 체하는 법.
룬의 말대로 새처럼 물을 한 모금씩 먹은 흑미가 휴, 하고 한숨을 돌렸다.
“이제 괜찮아요!”
“다행이네.”
급한 일이 지나가자, 이번엔 제드가 물어왔다.
“아니, 베르딘 님이 어떻게 살아나신 거랍니까? 그분은 듀라한 군도 아니고, 저처럼 에고 웨폰이 된 적도 없으실 텐데요?”
흑미에게서 빈 물컵을 받은 룬이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진짜 베르딘이라고 할 수는 없어. ‘유령’이니까.”
룬은 베르딘의 실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부엌 곳곳에 베르딘이 살아있을 때 남긴 기운, 그리고 염원이 모여져 만들어진 잔상이라고 봐야 해.”
추가적인 설명까지 듣고 나서야, 모두가 유령 베르딘에 대해 이해했다.
페르디키온은 여전히 믿기 힘들어 보였다.
“신기하군. 대체 무슨 원리로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냐.”
‘언령을 썼기 때문이라 할 수는 없고.’
룬은 대신 적절한 핑계를 대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생전에 다루던 식칼이나 조리기구를 주로 쓰더라고.”
룬의 시선이 와구와구 고기파이와 스파게티를 후루룩 입에 밀어넣는 중인 제드를 향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아마 제드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식칼이나 밀대, 도마 따위로 요리를 하면서 혼이 불어넣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
“? 켁켁!”
갑자기 호명된 제드가 한꺼번에 넣은 음식에 목이 걸려 콜록거렸다.
하지만 강력하게 목 안으로 꿀꺽 삼킨 제드는 기어이 호기심을 터트렸다.
“호오오오!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직접 뵙고 싶군요!”
룬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페르디키온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해. 대신, 먼저 형의 과업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그게 더 급한 일이잖아?”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기특해하는 눈으로 룬을 쳐다보았다.
“생각해 줘서 고맙다. 룬.”
“당연한 일인데 뭘.”
일의 우선순위로 치면,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페르디키온의 과업이었다.
“내 과업인 ‘일국의 경외를 얻는다.’ 그를 위해 대륙의 정보를 더 모아야 하지.”
룬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 말, 나올 줄 알았지.’
나오지 않았다면 룬이 먼저 언급하려던 부분이었다.
룬이 말했다.
“안 그래도 그레이스가 곧 올 거야. 그러면, 요정의 길을 이용해 대륙으로 직접 통하는 문을 만들 수 있을 거고.”
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양 갈빗대를 들고 야무지게 뜯던 제드가 뼈를 흔들어대며 외쳤다.
“호오! 어둠을 다루는 개통파 드워프들을 도우신 건 그 때문이었군요?”
“맞아.”
룬이 대답하자, 씨익 웃는 제드가 눈을 빛냈다.
“이거 이거, 보통이 아니십니다? 가끔 보면 룬 님은 속에 천 년쯤 묵은 똘똘이가 있는 것 같으시다니까요.”
의외로 정확한 파악이었으나, 룬은 무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연히 떠오른 것뿐인걸. 마침 드워프들이 편하게 오갈 길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너스레 아닌 너스레를 떨며 룬이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형에게 도움이 되려면 어떤 걸 하면 좋을까, 생각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말하는 룬의 얼굴은 무척 순수해 보였다.
‘좋은 핑계였다.’
룬은 속으로 만족스러워했다.
일을 벌인 이상, 숨길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해츨링이 의형제를 도우려다 우연찮게 좋은 길을 발견했다는 정도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이걸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팔고, 흑미와 다니며 드워프들을 직접 설득까지 하고 다닌 것이니까.
‘전부 백 살 정도 산 해츨링이 시도해 볼 법한 방식이니, 의심스럽진 않겠지.’
모든 결과가 다 좋았다는 점이 의심스러울 수는 있다.
하지만, 룬은 잘 알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의 기준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리라는 걸.
‘자, 평소처럼 훌륭하다고 말을 건네오면 적당히 대꾸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해 기다렸는데, 왠지 조용했다.
“?”
슬그머니 페르디키온을 본 룬은 의아함을 느꼈다.
‘뭐지?’
룬과 눈이 마주친 페르디키온은 마치 화라도 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래, 형?”
룬이 묻자, 페르디키온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움직였다.
“룬. 네가 얻은 결과들은, 내가 200년을 더 산다 해도 낼 수 없는 것들이지.”
“……그래서?”
표정을 찌푸린 페르디키온은 확신과 불확실 사이에서 말을 꺼내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것 같다.”
확신하지 못하는 애매한 맺음.
룬은 그 확실하지 못한 어조에서 속내를 읽어냈다.
‘과연. 그런 거군.’
백 년생 해츨링이 한 일이라기엔 너무 괜찮은 결과들이긴 했다.
심지어, 실수조차 한번 없이.
룬은 순한 얼굴로 페르디키온을.
그리고 이 장소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았다.
“형, 사실은 말이야.”
의구심을 담은 첫 마디.
모두의 시선이 룬에게 집중되었다.
물건은?
짧게 호흡을 멈췄던 룬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혼자였으면 천년을 살아도 이런 결과는 낼 수 없었어.”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무기 시절, 혼자가 익숙했던 그다.
타인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자가, 지금은 타인이 있어 해내었다고 이야기하게 되다니.
룬은 페르디키온과 시선을 마주쳤다.
붉은 화룡의 눈에 담긴 것은 뜨거운 열망.
그리고 솔직한 질투와 은은하게 번져나오는 혼란이었다.
감정과 감정들이 물감처럼 섞여 또 다른 감정을 알려준다.
그 정체를 읽는 건, 룬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 녀석은 나를 동경하고 있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모습.
놀라운 업적.
분명 어리고 순수한 의동생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능숙했을 대처들.
늘 부정해 왔지만, 최근 룬이 곁에 있으면서 보인 모습 중 페르디키온이 가지고 싶었던 모습도 있었을 터다.
‘부러움은 좋은 원동력이기도 하지. 그걸 무작정 쳐내지 않고, 양분으로만 삼을 수 있다면. 다만.’
호박파이를 포크로 조각 낸 룬이 조각을 콕 찍어 올렸다.
페르디키온의 시선이 파이 조각을 따라 이동했다.
‘착각하고 있는 건 수정해 줘야지.’
룬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달달한 호박, 폭신하고 바삭한 반죽. 보이지 않는 설탕과 향신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 호박 파이처럼 말이야.”
룬은 살며시 웃음을 띄운 후 입안에 호박파이 조각을 밀어넣었다.
풍미 가득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입을 조그맣게 오물거리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알고 있다. 룬, 너는 나뿐만이 아닌 주변 모든 이들과 잘 맞는 편이지.”
고개를 든 불의 일족 소년이 언 듯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