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하고 단정적인 말을 하는 페르디키온은 어딘지 모르게 벽을 치는 느낌까지 들었다.
“룬, 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태워서라도 나를 세우는 자다.”
불의 일족이라 하여 모두가 같은 성격은 아니겠지만, 룬 역시 알고 있었다.
저 화룡족 소년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페르디키온과 수평적인 관계로 잘 어울릴 자들은 무척이나 적을 터.
그를 누구 보다 잘 아는 페르디키온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기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거겠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네가, 반드시 내 편이어야만 한다고.”
그 말을 들은 룬은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기운을 느꼈다.
숨겨진 말이 느껴졌다.
룬이 페르디키온 편이 아니라면, 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걸.
아마, 입장이 달라 룬이 페르디키온의 적이었다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자로 점찍혔을 것이다.
이를 느낀 건 룬도, 페르디키온에게도 존재했을 본능적인 감각이었을 터.
룬은 태연하게 포크를 내렸다.
그리고 담백한 빵을 주욱 뜯어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숙명인가. 스스로를 태워버리던가, 다른 이들을 태워버리며 존재하는 것이.’
그리고 제어하기 가장 힘든 때가, 아직은 성년도 되지 못한 지금 시기일 터.
룬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형 편이라 말해도, 자꾸 시험하고 싶어질거야. 근데, 상관 없어. 나에게는 실수 좀 해도 되거든. 왜냐하면.”
아직 자신이 가지지 못한, 탐나는 모습을 가진 자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마음.
그들을 태워서라도 해내야 할, 혹은 이상을 추구하려는 마음.
‘다 마음 쓰기 나름이지. 잘 쓰면 유익이 되나, 잘못 쓰면 해악이 되는 법이니.’
룬은 속으로 생각하며 나름대로 진실을 말해주었다.
“나는 이제 꽤 강한걸. 형이 태우려 해도 쉽게 태워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강한 어둠을 지닌 룬에게, 페르디키온의 불꽃은 조금 뜨거운 정도였다.
살아있는 이상, 누구나 실수도 하고 다치게도 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타고난 속성이 그렇다 하여, 슬퍼할 것도.
다른 이들을 구분하여 제 편과 아닌 자로 나눌 필요도 없었다.
룬이 말했다.
“그리고 형. 크리스티나가 그랬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넓다고.”
‘사실 좀 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긴 했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써먹기 나름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말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는 형이 태워야 할 것들도 아주 많을 거야. 이미 그렇게 하려 하고 있고.”
“하고 있다고?”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잊었어? 형은 스스로 정했어. 진짜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가서 과업을 수행하기로.”
그 말에 페르디키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언령조차 ‘영멸하라’일 정도로 파괴적인 불꽃을 타고난 레드 드래곤.
방향과 쓰임만 잘 찾아간다면, 모든 것을 태울 힘은 누구보다 든든한 힘이자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다.
룬은 그 사실을 떠올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건 이해 가지만.’
살아온 삶이 피와 싸움, 잔혹한 투쟁이었던 페르디키온.
그 속에서 태우고 태워 키운 불씨는 이제 부정한 것을 태우고 싸늘한 현실에 내던져진 이들을 구할 것이다.
전부터 종종 느껴온 예감을, 룬은 거침없이 말했다.
“거기서 진짜 태워야 할 것들을 태우고, 형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낼지 벌써 기대가 돼.”
그 말을 하며, 룬은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한 표정의 아우가 보낸 응원과 지지에 페르디키온은 다소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뭐…… 흠. 그렇긴 하지.”
룬은 페르디키온의 그 순수할 정도의 단순함에 속으로 감탄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렇다니까. 안 그래 다들?”
룬의 말에 흑미와 제드, 백야가 호응해 주었다.
“맞아요! 페르디키온 님은 크와앙 하면서도 멋있는 레드 드래곤이 될 거예요!”
브레스를 뿜는 드래곤을 흉내내며 생긋 웃는 흑미.
“아무렴요! 페르디키온 님이야말로 저희 드워프들의 비참한 삶을 바꿔주셨는데! 그야말로 빛, 그저 빛일 뿐입죠!”
제드는 호들갑스럽게 고기 조각을 입에서 튀기며 떠들었다.
“뺙!”
뭘 알긴 하는 건지 모를 백야의 울음소리까지.
룬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다들 형이 잘할 거라고 믿고 있어. 이것도 형이 스스로 만든 결과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군.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만.”
대답과 함께 페르디키온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흑미랑 뭔가 소곤거리던 제드.
‘한참은 어린 룬 님이 강하니까 괜찮아! 라니 뭔가 웃기지 않습니까요, 흑미 님?’ 이라는 말이 룬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저놈이 이 분위기에 뭔 소릴 하는 거야.’
룬은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아는 해츨링이었으므로, 한 소리 하려다가 참아 주었다.
잠시 뒤, 페르디키온이 후, 하고 어깨를 폈다.
“답지않게 쓸데없는 소릴 해버렸군. 제드, 내가 과업을 수행할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해 보도록 하지.”
그 말에 제드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나라요? 제가 아는 건 그리 많진 않습니다요. 그러니까 거기가…….”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 태도로 돌아온 페르디키온.
룬은 그 모습을 보며 대륙 지도를 꺼내 상의를 시작한 분위기에 맞게 식사를 이어갔다.
***
다음 날.
까만 해츨링 모습으로 꼬리를 말고 침대에서 자던 룬이 몸을 뒤척였다.
“뀨……뀨우하아아암!”
주둥이를 쩍 벌린 룬은 크게 하품을 했다.
말려있던 꼬리와 힘없이 늘어졌던 네 발을 스트레칭 하듯 쭉 폈다.
“뀨윽.”
다시 한번 추욱 늘어졌던 그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뀨우으.”
[아직도 찌뿌둥하네. 설마 회의를 하루 종일 할 줄은.]
그랬다.
어제 아침에 시작된 회의는 저녁시간이 되도록 끝나질 않았다.
온갖 잡다한 설명과 토론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거니와.
힘이 넘치는 페르디키온이 의욕적으로 일을 주도해나간 덕분이었다.
‘그편이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설마 점심과 저녁까지 다 거기서 먹게 될 줄이야.’
그나마 베르딘에게 점심을 미리 부탁해둔 게 다행이었다.
열띤 논쟁 탓에 식사시간을 조금 넘겨서 식당에 갔는데, 유령 베르딘이 이미 먹을 것을 준비해 두고 있었으니까.
“……뀨.”
[맛있었지, 과일 페스츄리 파이.]
딸기쨈과 레몬쨈을 이용한 페스츄리 파이는 과열된 토론장에 좋은 달콤함이 되어주었다.
페르디키온의 레어에서 신선한 딸기를 얻기는 어려웠기에 개발한 레시피 같은데, 바삭함과 쫀득한 쨈의 조화가 아주 훌륭했다.
‘개통파 드워프들 간식으로 챙겨가기로 했지. 부엌에 가야겠군.’
룬은 한 차례 더 하품을 하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방문 밖으로 나가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을 사용하면 즉시 부엌으로 갈 수 있지만, 잠을 깨고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전날의 회의가 잔상처럼 머리에서 재생되었다.
“뀨.”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지.]
저녁 식사가 끝나도록 완벽한 결론이 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룬은 정보들을 토대로 한 가지 파악한 사실이 있었다.
[아무래도, 거기 내가 되찾아야 할 곳이 맞는 것 같은데.]
룬은 제드가 알고 있는 정보들과 전승을 통해 룬의 머리에 있는 지식에서 추출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과업을 위해 갈 곳은 어둠의 힘이 강한 장소라는 점.
지금은 인간들, 특히 마법을 다루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점.
저주 저항력이 없으면 헛것을 보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
“……뀨우우.”
[그건 죄다 ‘이쪽’ 힘과 관련된 이야기란 말이지.]
최소한 둘 중 하나였다.
누군가 강력한 어둠과 관련된 존재. 혹은 물건이 존재하고 있다.
아니면…….
‘블랙 드래곤 일족이 많이 싸우고, 또 많이 사망한 장소일지도 모르지.’
이는 씁쓸한 가정이긴 했다.
천 년간의 전쟁으로 멸족한 블랙 드래곤.
그들 중 많은 수가 죽어 묻혔다면 블랙 드래곤의 시신들이 이상현상을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준비는 단단히 해서 가야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룬은 날이 밝자마자 개통파 드워프들에게 가는 중이었다.
‘운이 좋았지. 마침 어둠을 다룰 녀석들이 늘어난 참이라니.’
슬슬 잠이 깨는 기분이 들자, 룬은 눈을 몇 번 끔뻑이고는 반짝 떴다.
그리고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룬 님, 준비 끝났습니다.
본래 마법을 잘 모르는 드워프였던 유령 베르딘은 최근 마력의 움직임을 좀 더 잘 느끼게 되었다.
덕분에, 이동 마법을 써서 도착하면 그 기척을 알고 인사까지 건네오고 있었다.
“뀨우우.”
[물건은?]
용건부터 확인하자, 베르딘이 척 하니 보따리를 내밀었다.
-완벽합니다.
왠지 모르게 은밀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룬은 보따리를 들어보고는, 살짝 벌어진 틈으로 앞발 하나를 집어넣었다.
슥.
랜덤으로 집어 올려진 바삭한 파이가 달콤한 쨈이 붙은 채 딸려나왔다.
파삭!
맛을 본 룬은 얼굴을 끄덕이며 평했다.
“뀨뀨우.”
[좋아. 이번 것도 실하군. 맛이 더 강해도 되겠어.]
-물론입니다. 그리고 따로 주문하신 건 이쪽 보따리에 추가로 넣었습니다.
밀거래하는 자들처럼 대화를 주고받은 룬과 유령 베르딘.
둘은 다음 거래시간과 물건, 장소를 합의하고 헤어졌다.
‘이걸 먹이면서 잘 구슬려 봐야겠군.’
아공간 주머니에 쑥쑥 물품들을 들인 룬은, 혼자 개통파 드워프들의 공방으로 향했다.
흐, 흥!
인간 모습으로 변한 룬은 공방 지붕이 벗겨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히 중얼거렸다.
“일주일 걸릴 거라더니.”
안에서 폭발한 덕분에, 위로 휘어져 터진 모양새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주일은커녕, 한 달은 걸리겠는데?”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불이 났던지, 은은한 매연 향이 코 끝을 맴돌았다.
드워프들이 결계를 쳐 두긴 했지만, 사실상 이 꼴을 보고 누가 들어와 보고 싶을지.
그나마 다행인 건 어둠이나 저주에 관한 힘은 전혀 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애 좀 썼겠네.’
안으로 걸어들어간 룬은 엉성하게 달려있는 판자문을 바라보았다.
그냥 문을 열었다간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똑똑.
“엇 씨, 누구여? 허억! 룬 님?”
밤새 보초를 선 드워프가 짜증을 내며 문을 열고 나오다 흠칫 놀라 눈을 홉 떴다.
“아이구, 이런 누추한 장소에 귀한 걸음을. 들어오세요!”
중년으로 접어들어가는 드워프가 허리를 즉시 굽히며 안으로 룬을 들였다.
“사고가 났었다길래 와 봤어. 다들 좀 어때.”
“심하진 않습니다. 이삼일 쉬면 괜찮을 정도라서…… 하지만 다들 진화하고, 정리하느라 오늘 다 뻗어버렸죠.”
하기사, 어둠의 힘이 줄줄 새고 있도록 둘 순 없었을 터.
수습하고 뒤처리하느라 바빴던 개통파 드워프들은 죄다 드러눕게 된 상태였다.
고개를 끄덕인 룬이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좀 볼게.”
“네. 비록 꼴이 말이 아니긴 합니다만…….”
들어와 안을 둘러본 룬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물건들은 건재하네.”
실내는 엉망이었지만, 물건과 중요 장비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드워프도 은근히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허허! 사실 이런 실험 사고나 폭발에는 이골이 났거든요. 이래 봬도 물건 관리 하나는 물 샐 틈 없이 하고 있습죠.”
아련한 시선으로 과거를 회상하던 드워프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차 있었다.
“장비 하나 잃어버리면 수리는커녕, 다시 구해오기도 어찌나 힘든지…… 다른 공방 드워프들 텃세에 막말에. 바가지 씌우려고 하는 것도 선배님들이 구해주셨죠.”
룬은 슬쩍 드워프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너 잘 속는 편?”
“예? 아유 아닙니다. 뭐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잖아요. 평범한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