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아멜리아가 살며시 말을 건넸다.
“그,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 않, 을래?”
-……몰라!
그러면서도 아멜리아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걸 보며 룬은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저거 씩씩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군.’
그때, 아멜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더니 룬을 바라보았다.
“룬…… 이, 이렇게 말해도…… 나쁜 의도는 아, 아니니까…….”
룬은 편 들어주는 아멜리아가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그레이스가 분위기를 살피더니 구시렁거렸다.
-계약 때문에…… 하기 싫은데…… 하는 수 없이 하는 거라구. 치잇.
“응……. 그, 그래도…… 그레이스, 잘할 거야…….”
둘의 대화를 듣고 룬은 남몰래 눈을 빛냈다.
‘이거, 나 없는 사이 둘이 뭔가 있었군.’
저럴 만한 행동이라.
룬이 슬쩍 말을 찔러보았다.
“아멜리아, 그레이스랑 꽤 친해졌나 보네.”
“아……? 그, 그래 보였어?”
-아닌데? 뭐, 속이 시커먼 해츨링보다야 낫긴 하지만.
그 말에 룬이 모른 척 대꾸했다.
“응. 딱 봐도 아멜리아를 좋아하는 게 보이는데. 아니면, 크리스티나랑도 이런 거야?”
그 말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떤 그레이스가 아멜리아에게 날아갔다.
-뭐래? 어이없어! 얘, 지금 저 새까만 해츨링이 말하는 거 들었어? 그, 무서운 골드 드래곤과 이럴 리가 없잖아!
당장 가서 고해바치는 모습을 보며, 룬은 확신했다.
‘크리스티나가 무서워서 잘 순둥순둥한 아멜리아한테 갔구만.’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룬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크리스티나와 친해지는 건 실패한 모양이고.’
하기야, 워낙 둘이 안 맞기는 했다.
한쪽은 어른스럽고 강한데, 한 쪽은 유치하고 날 세운 고양이 같은 녀석이었으니.
그렇다고 아멜리아와 좋은 영향만 주고받느냐면, 그건 두고 봐야할 일이었다.
룬은 적당히 생각을 마무리했다.
‘뭐…… 이쯤 해둘까. 앞으로는 고생 좀 하게 될테니.’
그레이스가 지금 룬의 얼굴을 봤다면, ‘저 속 시커먼 해츨링! 또 음흉한 생각하고 있지!’라며 뒷걸음질을 쳤을지도 몰랐다.
“여기야. 들어갈게.”
속내를 감춘 룬은 눈앞에 있는 공방의 문을 열었다.
개통파 드워프를 통솔하는 스콧의 맞이 인사에, 우르르 도열해 있던 드워프들이 각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룬 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룬 님!”””
아멜리아와 그레이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 룬은 드워프들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소개했다.
“이쪽은 물의 일족 아멜리아. 그리고 이 작은 녀석은 너희랑 함께 일할 요정, 그레이스라고 해.”
드워프들의 눈이 순식간에 그레이스를 향했다.
“물의 일족이라면 드래곤?”
“요정?”
“드래곤과 요정이라고?”
수 많은 드워프들의 시선을 받은 아멜리아와 그레이스가 움찔하는 사이, 룬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아멜리아는 내 친구야. 종종 같이 들를 테니 잘 부탁해. 그리고, 너희와 일할 건 여기 그레이스.”
그 말에 그레이스가 얼굴을 홱 돌려 룬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을 팔아치우는 노예상인이라도 보는 눈이었다.
하지만 룬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어둠을 다루는 데 아주 탁월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아직 분위기를 알지 못한 스콧이 눈을 반짝이며 콧수염을 실룩였다.
“오오! 그럼 이 요정님이 저희와 함께 해 주십니까?”
-뭐어어?
기가 차서 입이 벌어진 그레이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혀 나온 것은 제드에게 받아뒀던 설계도였다.
“이걸 최우선으로 만들면 돼.”
대표로 스콧이 나와 양피지를 받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룬 님?”
“설계도. 직접 봐봐.”
그 말에 스콧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양피지를 펼쳤다.
상세하게 내용을 살핀 스콧이 놀란 눈을 흡 떴다.
“아니, 이건? 대륙과의 직통 연결장치!”
두둥!
스콧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이 떼로 몰려와 스콧의 뒤에서 거친 숨을 쉬었다.
그들 중 한 드워프가 멍한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진심이십니까? 이건 드워프들의 기술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 말에 룬이 그레이스를 엄지로 가리켰다.
“그래서 여기, 그레이스가 있잖아? 이래 봬도 어둠을 다루는 요정이거든.”
-나 하, 한다고 안 했는데?
룬은 그레이스만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돌리고 ‘계약’이라고 입모양만 움직였다.
-저, 저저!
그 모습을 본 그레이스가 도끼눈이 되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룬은 아무렇지 않게 드워프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워프나 그레이스 녀석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텐데.’
그레이스는 심해의 던전에서도 혼자가 싫어서 룬을 데려가려 했던 녀석이었다.
어느 정도 만만하고, 분위기도 잘 타며 순박한 드워프들.
까칠하고 혼자 있기 싫어하면서도 무섭거나 너무 강한 자를 힘들어 하는 그레이스.
‘둘의 조합이라. 생각보다 꽤 괜찮단 말이지.’
룬은 이 둘이 같이 있으면 오히려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리라 여겼다.
‘저 표독스러운 성정이 많이 나아지면 좋으련만.’
다행히 룬과 크리스티나와 함께 지내며 어느 정도 다듬어진 상태니, 가끔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만 룬이 와서 옆구리를 찔러주면 될 일이었다.
‘나중에는 꽤 쓸 만해지겠지.’
룬은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수상쩍다 여기는 그레이스에게 룬은 살짝 미소 지어 주었다.
-히익. 뭐야, 왜 그래. 무, 무슨 꿍꿍이야?
팔에 소름이 돋았다는 듯 문지르는 그레이스를 본 아멜리아가 말했다.
“그럼…… 그레이스는, 여기……서 일해?”
“응. 취업이지.”
-역시, 날 팔아 치우는 거였어! 또 날 버렸다구!
씩씩거리며 항의하는 그레이스에게 룬이 말했다.
“넌 늘 네가 버려질 거라 생각하더라. 버려지기 싫어서 그런 건 알겠지만.”
-뭐, 뭐…….
정곡을 찔린 요정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얼굴까지 빨갛게 변했다.
“솔직히 말해봐.”
한 호흡 들이킨 룬은 단어를 골랐다.
“계약으로 협박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좋아했잖아? 필요로 하는 느낌. 누군가 네 힘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 느낌 말이야.”
-그……그건……. 아니거든?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힘겹게 부정하는 그레이스.
하지만 눈에 띄게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그런 너에게는 여기 있는 개통파 드워프들이 딱이야.”
룬은 스콧을 비롯한, 모인 드워프들의 간절한 눈빛을 재차 확인했다.
제드의 설계도는 완벽했지만,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레이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레이스 역시 부정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룬은 그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중에는 자연히 알게 되겠지. 내가 널 버리지 않았다는 걸.”
무어라 말을 얹기 힘든 분위기에 드워프들도, 아멜리아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레이스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 너도 날 원해?
물론이다.
이제부터 그레이스는 훌륭한 통로 관리자가 될 터.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너 나랑 계약한 거 잊었어? 난 그거 파기할 생각 없어. 넌 나랑 계속 가야 돼.”
-흐, 흥! 뭐, 뭐야. 그렇게 박력 있게 말하면 누가 들어 줄줄 알구!
웬 박력?
룬은 이 요정의 생각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레이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할 리 없으니까.
-흐, 흥! 이 바보 같은 녀석들과 어울려주라니, 정말. 날 뭘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