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236/242)

그렇게 말한 그레이스가 포르르 날아 콧수염이 난 스콧의 얼굴 앞에 척, 하고 섰다.

-너 말야, 나한테 잘 해.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허허 하는 얼굴로 스콧이 말하자, 뒤에 우글우글 모여있던 드워프들도 신기한 눈치로 주섬주섬 인사의 말을 건네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레이스 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내민 드워프의 검지.

아마도 악수 대신인 모양이었다.

그를 내려다본 그레이스가 조그마한 손으로 찰싹 쳐냈다.

-흥!

함께 있던 아멜리아가 나름대로 축하의 말을 해 주었다.

“그, 그레이스…… 너, 에게…… 무척 좋은 일, 인 것 같아……. 잘 됐다.”

-내가 엄청엄청 손해야! 잘 된 거 아니거든?

룬은 그레이스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든가.’

한편, 드워프 스콧은 제 손에 힘이 들어가 양피지가 망가지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 문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룬 님.”

“물론. 너희는 대륙 무역 상인이자 드워프가 될 거야. 너희가 만든 상품들은 그곳에 더 어울리니까.”

룬은 페르디키온과 의논하여, 그들이 대륙에 자유롭게 오가며 물건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할 계획도 말해 주었다.

그 말에 스콧과 다른 드워프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간 아무리 노력해도 판매를 할 수 없어 묵혀둔 명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개통파 드워프의 꿈이 눈 앞에 있었다.

룬의 설명을 쭉 듣던 드워프 하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희…… 인정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겁니까?”

전통이 있는 전통파.

개혁을 꿈꾸는 신생 개혁파.

그 둘 사이에서, 불의 힘이 아닌 물건, 그것도 장식품과 악기를 위주로 만들던 그들이다.

음악과 문화가 있는 대륙을 편히 오가며 판매 할 수 있다는 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인정 받을 만하니까, 받아야지.”

룬의 말에 드워프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룬 님…… 감사합니다.”

“별말을 다.”

룬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이 사실을 알면 삼일 밤 낮을 생색을 낼 녀석이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설계도를 위해 가장 고생한 제드다.

그럼 룬은 무엇을 했는가.

‘제드를 열심히 갈군 보람이 있군.’

개통파를 도우라고 보냈더니, 공방을 터트리고 온 제드.

룬이 한 건 제드가 터진 공방을 복구하고도 남을 정도의 물건을 뽑아내도록 협박 아닌 협박과 은근한 눈칫밥.

그리고 개통파가 잘 되었을 때, 대륙에 이미 진출한 머스킷 상회에 생길 이익에 대한 언급이었다.

‘개통파 드워프들 공방을 터트렸으니 그 대가를 치른 것뿐이지만.’

즉, 룬의 당근과 채찍이 잘 먹혀든 셈이다.

‘여기에, 옷 만드는 장인인 게일드. 유령 요리사 베르딘까지 섞으면 아주 쓸만한 팀이 되겠어.’

모두 룬의 힘으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훈훈한 기분을 느끼며, 룬은 그레이스와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작지만 빠르게

부스럭.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무상자를 꺼낸 룬이 스콧에게 내밀었다.

“이번에 내가 데려온 요리사가 만든 간식이야. 이걸로 간단히 환영식이라도 해.”

룬은 가져온 레몬과 딸기쨈이 들어간 페스츄리와 음료를 꺼냈다.

‘이런 자리엔 역시 술인 것 같지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주고 가야지.’

그레이스의 외모는 소녀에 가까웠다.

주당 요정이 되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게 뻔했고, 어린 해츨링이 술을 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히 개통파 드워프들은 먹을 것을 마다하는 편이 아니었다.

“신기한 향이 나는군요. 잘 먹겠습니다.”

대표로 스콧의 인사를 받은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가 볼게. 그레이스 잘 부탁하고.”

-흥. 메롱이다!

혀를 내밀며 말하던 그레이스가 팔짱을 척 끼었다.

그래그래, 하며 룬은 적당히 넘기고, 아멜리아에게 눈짓했다.

“그, 그레이스…… 그, 그럼 나중에 봐…….”

아멜리아가 손을 살살 흔들어주자, 그제서야 그레이스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진짜 가?

“왜, 아쉬워?”

-벼, 별로 그런건 아니야.

말은 그러면서, 모습만 보면 주인 떠나는 모습 보는 강아지 같았다.

마음이 약해진 아멜리아가 말했다.

“그, 그레이스. 나, 나는…… 종종 오, 올게…….”

그 말에 드워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룬이야 동경의 대상으로 오래도록 이야기해 왔던 해츨링.

하지만 아멜리아는 낯설고, 성체 드래곤에 좀 더 가까운 존재였으니 그럴 만했다.

드워프에게 드래곤이란 무척 두려운 존재니까.

문득 아멜리아는 드워프들의 굳은 분위기를 알아채고 난처한 듯 눈을 굴렸다.

상황을 본 룬이 나섰다.

“힘내 그레이스. 통로 만들게 되면 자주 볼 수 있잖아.”

-흥. 어차피 두고 갈 거면서.

그레이스는 섭섭한 티를 내긴 했지만, 더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룬의 말을 한 번 더 중얼거리며 나름대로 새겨듣는 티가 났다.

‘완성되면 대륙을 오가면서 종종 보게 될 테고 스스로 올 수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그 때, 경비를 서다 룬과 만났던 순박한 드워프가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레이스 님.”

-그러던가, 뭐.

눈치를 보던 다른 드워프들도 하나둘씩 그레이스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그레이스는 무척 낯선 존재지만, 한편으론 드워프로서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만들게 할 기연.

그 기대감 어린 환영을 그레이스 역시 느끼고 있었다.

한층 분위기가 좋아진 걸 확인하고 룬이 입을 열었다.

“종종 제드를 보낼게. 어둠을 다루는 그레이스가 있으니, 저번 같은 일은 없을 거야.”

‘녀석이 힘을 다스리는 능력을 강화하는 건 덤이고.’

스콧이 답했다.

“기왕이면 룬 님과 물의 일족께서도 같이 계시지요. 그래도 이런 자리에는 계시는 편이 맞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그레이스가 섭섭해하는 것도 있지만, 드워프들에게 천천히 인사하고 얼굴 익힐 시간을 더 주는 편이 좋으니까.

하지만 룬은 고개를 저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부탁할게.”

사실 아멜리아가 뿜는 물의 기운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물 기운이 적은 불의 영역이라 그럴수도 있고, 기운을 갈무리 하는 게 어려운 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이 자리에 오래 있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직 드워프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으니, 굳이 말 해줄 필요는 없겠지.’

사정을 잘 모르는 스콧이 아쉬운 듯 말했다.

“뜻이 그러시면, 어쩔 수 없지요.”

“응. 대신 제드한테 오라고 해 둘 테니까.”

거기에 더해, 룬은 그레이스에게 술은 가르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

개통파의 오두막을 떠난 룬과 아멜리아.

공방이 작아질 즈음, 아멜리아가 숨을 내쉬었다.

“후아……. 그, 그렇게 많은…… 드워프는…… 처, 처음 봐서. 너무 긴장……했나 봐.”

그 말과 함께, 아멜리아 주변을 감싸던 촉촉한 기운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룬은 피부에 닿는 촉촉함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러게. 물의 기운이 새어나올 정도더라.”

‘중간부터 서늘하게 물의 기운이 돌았지.’

워낙 불의 힘이 강한 땅이라 잘 느껴지지 않았을 뿐.

드워프들은 그저 ‘오늘 공기가 습한가?’라고 느끼는 정도였겠지만, 이는 아멜리아의 힘이었다.

마치, 익숙했던 장소인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당황한 아멜리아가 말했다.

“그, 그런…… 나도 모르게 그, 그만…….”

아멜리아는 힘을 잘 다루지 못한 게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여보였다.

“혹시…… 이렇게 미, 미숙한 모습이라…… 네가 실망했어?”

그 말에 룬은 고개를 저었다.

“여긴 바다는커녕, 물의 기운이 거의 없는 레드 드래곤의 영역인걸. 이해해.”

룬의 말에 조금 안도한 것인지, 아멜리아가 살짝 웃음을 띠었다.

“그, 그렇게 말 해줘서…… 고, 고마워…….”

룬은 잠시 아멜리아를 보다, 모른 척 다른 제안을 했다.

“그보다, 형이 다스리는 마을을 조금 구경하고 가지 않을래?”

“정……말? 그…… 그래도, 될까?”

고개를 든 아멜리아를 보며, 룬은 흔쾌히 대꾸했다.

“응. 다른 지역을 직접 둘러볼 일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잖아.”

“아, 그건…… 그래. 허, 허락은 받아야……겠지?”

“그건 내가 할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아멜리아를 확인한 룬은 모코지석을 작동시켰다.

‘좋아. 왠지 침울해 보이니 떠들썩한 녀석이 한둘쯤 있으면 좋겠지.’

심지어 물의 지역이 아닌 다른 장소를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

꼭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니, 이는 아멜리아의 성장에도 좋을 터였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아멜리아에게 마을 구경을 시켜주려는데. 올 수 있어?

사실 룬의 머리에서는 후보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굳이 5명 모두가 함께 보는 자리에 물어본 건 페르디키온의 허락도 함께 받기 위함이었다.

‘허락이야 어렵지 않겠고, 오는 건 흑미겠지. 제드는 피곤해했으니 기절해 있을지도 모르고. 일어났어도 쉬고 싶어하지 않을까.’

게다가 페르디키온은 성년식 과제 준비로 줄곧 바빴다.

그럼 흑미와 백야, 둘만 남으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룬의 예상대로 페르디키온의 붉은 글씨가 올라왔다.

-아멜리아와 둘이서 말이냐?

당연히 허락의 말이 떨어지리라 여긴 룬에게 돌아온 건 또 다른 물음이었다.

룬은 힐끔, 아멜리아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또 긴장한 눈치였다.

‘아직 페르디키온이 어렵나. 나름대로 사이가 꽤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룬은 별생각 없이 답했다.

-아무도 안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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