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드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아멜리아와 페르디키온은 서로 열심히 견제중이었다.
“루, 룬은…… 상냥하고, 차, 착해……그런 해츨링이 페르디키온의 거, 거친 언행과 폭력적인 모, 모습만 배울 수도 이, 있어.”
아멜리아의 말에 페르디키온도지지 않고 대꾸했다.
“쓸데없이 감성적으로 굴다 명확한 판단도 안되고, 제 주제도 파악 못하는 건 괜찮은 줄 아나.”
인간형을 하고 있는데도, 뒤에 수룡과 화룡의 모습이 보이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제드와 흑미의 말에 잠시 정신 팔린 사이, 서로를 할퀴는 말싸움으로 번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 의견은?’
애초에 떡을 가진 사람은 주인을 정할 생각도 안하고 있건만. 왜 저 녀석들이 난리인지 모를 일이다.
룬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형 자리와 누나 자리를 두고 싸우는 거라면 수습할 방법 또한 어렵지 않았다.
룬은 제법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난 같은 드래곤 족 끼리 싸우는 형이랑 누나는 별로야.”
그 말에 둘 다 뚝, 말을 멈췄다.
그리고 페르디키온이 먼저 부정하며 성을 냈다.
“이게 어딜 봐서 싸우는 거냐! 잘못된 생각에 대한 가벼운 충고일 뿐이었다.”
즉, 저 말은 아멜리아가 잘못된 생각을 한 탓이라는 것.
그 말에 아멜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마, 맞아…… 룬. 고집이 조금…… 있었을 뿐, 우리 싸우는 거 아, 아니야…….”
고집쟁이 페르디키온이라는 뜻, 잘 이해되었다.
서로의 말에 담긴 가시를 정확하게 알아본 붉고 푸른 해츨링들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지직.
보고있던 룬으로서는 한숨만 나올 광경이었다.
‘이런 녀석들이 장로 후계라니.’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커다란 힘을 다룰 녀석들.
만약의 경우, 과거 선대 드래곤들처럼 세상을 해칠 적과 맞설 이들이라니.
문득, 룬은 불의 신전에서 본 괴이한 광경을 떠올려보았다.
짧고도, 강렬했던 광경.
‘혹시라도 그런 괴물과 싸우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지.’
그에 비하면, 고작 드래곤 족 해츨링 둘의 다툼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대비는 해야겠지.’
화룡들을 휘어잡던 거대한 힘.
그 힘을 마주쳤을 때, 과연 이 녀석들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이 녀석들이 추후 힘이 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이 녀석들을 키워낼 필요가 있었다.
그때였다.
“삐.”
콕.
룬의 머리 위에 앉은 백야가 부리로 머리를 쪼았다.
그닥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원했다고 해야하나.
“룬 님?”
흑미의 부름에 돌아보니, 룬의 손을 잡고 있던 어린 여우소녀가 더욱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표정이 바위처럼 무지무지 딱딱해요. 혹시 화 난 거예요?”
다른 손가락으로 딱딱 하다는 듯 제 얼굴을 꾹꾹 누르는 흑미.
룬은 그제야 제 얼굴이 굳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화 난 거 아니야.”
그 말에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먼저 말문을 연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크흠, 혹시 우리가 싸우는 것 같아서 무서웠던 거냐?”
“아……앗. 루, 룬…… 많이 노,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이제 보니,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 모두 드래곤의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의 성 안이라 그나마 다행이지.
그렇다 해도 경비를 서던 드워프들이 두려움에 이빨을 따닥따닥 떨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룬은 둘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멜리아도 미안해 할 거 없어.”
즉시 페르디키온의 부정이 돌아왔다.
“아닌 것 같다만.”
말하지 않았지만 아멜리아도 비슷한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내왔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산 듯했다.
‘아니지. 이 오해를 이용하면 이 두 녀석들에게 더 강해지면 좋겠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잠시 말을 고른 룬은 최대한 얼굴 거죽의 뻑뻑함을 풀어내며 살짝 웃어주었다.
“진짜야. 내가 왜 그러겠어.”
그제야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진짜 아니냐?”
“아, 아닌 거……맞, 지? 하지만 룬……아, 아까 표정이 너무……굳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룬은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나는 그냥, 둘 다 엄청 강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왜냐하면.”
무해한 얼굴로 순하게 웃어보이는 룬.
물론, 마냥 순한 얼굴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씁쓸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룬은 물빛 수룡족 소녀와 붉은 화룡족 소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친형이나 누나가 없어. 아주 무시무시하고 강했던 녀석들 때문에.”
그 말에 아멜리아와 페르디키온이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오른 탓이다.
마족에게 일족을 몰살당했을 블랙 드래곤 족의 후계.
일족 없이 혼자 살아남은 해츨링.
“그 나쁜 마족놈들이.”
“아…….”
페르디키온이 분에 차서 중얼거렸고, 아멜리아 역시 안타까운 침을성을 흘렸다.
룬은 양심이 슬금슬금 눈치 주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좀 치사한 이야기인 거 알아. 그렇지만, 지금 내 모습으로 그런 위급한 적을 봤다 해도 믿을 것 같지 않다고.’
그저 불의 신전이 내린 시련이라 여겨버리면, 말해봐야 무용지물.
걸음마 떼면 대단할 나이의 어린 해츨링의 말을 누가 진지하게 듣겠는가.
어쨌든 모로 가도 수도만 가면 되는 일.
어차피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마음을 굳게 먹은 룬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내 누나와 형이 되어주겠다니까, 되게 좋아. 그렇지만…… 기왕 내 누나와 형이 된다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해지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야 내가 본 이상한 힘을 지닌 자와 맞닥뜨려도 대항할 수 있지.’
아멜리아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푸른 눈썹을 떨었다.
“그, 그런……. 룬…….”
페르디키온 역시 주먹을 꾹 쥐며 입술을 씹었다.
“칫. 그렇게 말해버리면.”
결여한 얼굴로 변해가는 걸 보며, 룬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양심이……찔리는군.’
불의 신전에서 정체 모를 괴물 같은 걸 봤다 하느니, 이 편이 목적을 이루기엔 더 적합했다.
분명 그렇긴 한데, 살짝 찔리는 양심이란.
심지어 흑미가 조그마한 두 손을 꼭 잡고 룬을 보며 말했다.
“룬 님! 흑미도 더 강해질게요! 백야도 그럴 거지?”
“뺘아악!”
파닥거리며 룬의 머리 위에서 두 발을 벌리고 선 하얀 새가 날개를 펼쳤다.
‘너희들도 강해지면 좋긴 하지.’
적이 있는 이상, 힘을 기르는 편이 좋긴 했다.
아멜리아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지 눈을 꾹 감았다가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
“나, 나…… 더 산책……할게!”
룬이 의아함을 담아 되물었다.
“갑자기 산책을?”
“응! 부, 불의 레어에서 물의 기운…… 조, 조절하는 거. 더 잘 익히고 싶…… 싶어서!”
룬이 아멜리아와 산책을 하려던 목적 중 하나였다.
아멜리아에게 익숙하지 않은 불의 지역, 드워프 마을.
불 기운 가득한 이 땅에서 물기운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는 건 섬세한 힘 조절에 도움이 되었다.
‘거기에 드워프들과 대화하며 감정적인 동요에도 드래곤의 기운을 다스리는 연습까지 되면 더 좋긴 하지.’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의 말을 해 주었다.
“그거 좋은 생각 같아.”
그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눈썹을 꿈틀 휘었다.
“룬. 이번 과업만 끝나면 나는 성체가 된다. 해츨링인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터. 당장 과업을 이룰 방법에 대해 몇 개라도 말해줄 수 있다.”
“형도 멋지네.”
룬은 순하게 웃어보였다.
그때 흑미가 해츨링 셋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흑미도 더 강해지고 싶어요. 뭘 하면 되요?”
“삐약?”
룬이 대답해주었다.
“아멜리아랑 산책가서 불의 기운을 같이 조절해줘. 같이 손 발을 맞추는 연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히- 알겠숩니다!”
“뺘악!”
백야역시 알아들었다는 듯 흑미의 머리쪽으로 몸을 옮겨갔다.
‘목적이 하나 더 추가되겠는걸.’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업을 통해 성체로 무사히 바뀌는 것 만이 아닌, 아멜리아와 룬이 아는 이들의 성장.
그리고, 대륙에서 그 세계의 정체를 찾고 힘이 될 자들을 찾아내야겠다고.
문득, 룬은 한 가지 가능성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크리스티나는 대륙에 자주 출장을 가곤 했지. 다른 드래곤과 달리.’
설마.
아니, 그건 터무니 없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ㅅ
‘크리스티나가 그들을 찾고 있었다면?’
그녀 역시 한 일족의 장로이자 골드 드래곤 장로.
적어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괴이한 것을 본 룬이 떠올린 생각을 크리스티나가 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이 세상을 지키기로 한 자.
누구보다 훌륭한 균형자인 그녀라면, 위험을 감지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최선의 대비를 할 법 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룬의 머리에서 퍼즐처럼 맞춰졌다.
‘그래서였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 해 온건.’
어린 해츨링인 룬에게 말하기엔 너무 큰 일이었을 터.
하기사, 어차피 이 세상이 곧 전란에 휩싸인다 한들, 어린 해츨링이 보호룡 없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정도일 터.
‘내가 아직 어린 게 아쉽군.’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어린 시기부터 힘을 키울 수 있으니, 남들보다 더 유리하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테니까.
룬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직 어린 게 싫은거냐?”
“?”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의아해하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이 재차 말했다.
“좀 전에 그렇게 중얼거렸잖나. 아직 어려서 아쉽다고.”
아무래도 머리로 생각하던 걸 입속말로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응. 생각만 한 건데 나도모르게 말해버렸네.”
“이해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건 훌륭한 장로로서의 덕목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서두를 것 없어. 지금의 너이기에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않겠냐.”
아마도, 그 말은 어린 페르디키온이 스스로에게 해 왔을 말일 터다.
룬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웬일로 기특한 말을 하네.’
룬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 해줘서 고마워.”
둘을 보던 아멜리아도 힘이 되어주고 싶은 눈치로 말했다.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룬. 우, 우리가 더……강해질 테, 니까. 나, 바로 산책 다녀올……게.”
마음은 알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룬은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급하게 먹으면 맛있는 밥도 체한다는데. 조금만 쉬었다 가.”
그 말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럴까? 마음이 급해져서 서 그만…….”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상극인 불의 지역에서 수련한다는 건 고된 일.
적절한 회복은 필수였다.
분위기를 보던 페르디키온이 제안했다.
“각자 할 일이 정해진 듯 하군. 점심을 먹고 하는 게 어떻겠나.”
“앗, 좋아요!”
흑미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표를 던졌다.
본체인 장미에 힘이 잘 흡수되는 것과 별개로, 먹는 걸 즐거워하는 흑미에게 식사는 빠질 수 없는 행복의 원동력이었다.
문득 룬은 장미 본체를 잘 관리하고 있을 듀라한을 떠올렸다.
‘흑미의 본체인 마계 장미는 듀라한이 잘 챙겨주고 있겠지. 크라켄과 수련이라도 하면서.’
룬은 잠시, 그의 묵묵한 기사를 떠올렸다.
매일 스스로를 단련하며, 단 한순간도 쉬지 않는 존재.
당연하다는 듯 수련하는 녀석이니, 룬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럼 난 베르딘에게 가 볼게.”
‘나도 수련을 하러 가볼까.’
어린 해츨링의 몸인 그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마음껏 수련할 수 있는 시간.
절대 놓치면 안 되었다.
“좀 쉬지 그러냐? 룬.”
페르디키온이 제안했으나, 룬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 베르딘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도 해 봐야 하고.”
유령 베르딘에 대해서는 룬이 적당한 이유를 들어 둔 참이었다.
“베르딘이 유령으로 살아난 이유는 내 안에 있는 어둠 일족의 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테니까.”
‘나 역시 어둠 일족이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
제드가 이야, 하며 말을 덧붙였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 있던 고성이라 유령이 깃들기 쉽다니. 설마 이런 식으로 베르딘 어르신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요.”
유령. 즉 고스트(Ghost).
혼의 잔상이 남아 실체화 하는 기현상에 가까운 존재.
사실 이 현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다만 이 조건을 정확히 아는 건 이 중 없었다.
‘어둠 일족 힘과 관련된 거라 알고 있었다고 했더니 잘 통했지.’
특히, 오래된 성이란 건 긴 시간을 품은만큼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는 말이 특히 잘 통했다.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다면 즉시 알려라.”
페르디키온이 이렇게 말 하는 이유는, 바로 그 힘이 저주에 가깝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응, 알겠어.”
완전한 소생은 아니지만, 성이라는 역사가 오래된 건물.
유적 같은 경우 종종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에 혼이 깃든 후, 사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은 저주계열에 능한 블랙 드래곤 족의 힘이기도 했다.
죽어서도 원한을 갚을 때,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한 자를 저주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걱정 될 만은 하지.’
룬은 일행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베르딘은 생전에도 우리에게 정말 좋은 드워프였잖아.”
“알고 있다. 베르딘은…… 마지막까지 내게 충직했다. 절대 저주와 관련된 음심을 품을 녀석이 아니었지.”
저주를 걸 만한 자가 아니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페르디키온이기에, 룬을 혼자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페르디키온은 룬에게 재차 일렀다.
“룬, 어쩌면 그 힘이 네 언령이 될지도 모른다. 잘 연구해봐라.”
“그럴게.”
‘감 좋은 녀석 같으니.’
비록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룬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기도 했다.
추후, 언령에 대해 밝힐 때 베르딘의 일 덕분에 능력이 개화했다고 말 해둘 수 있을 테니까.
***
점심 식사를 푸짐하게 차려먹은 후.
아멜리아는 흑미와 수련 겸 산책을 떠났다.
페르디키온은 즉시 과업에 대책을 준비와 드워프들의 보고를 들으러 떠났고, 제드는 개통파 쪽으로 확인 차 떠났다.
“얼마 만에 혼자만의 시간인지.”
후우.
주변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시간을 즐기며, 룬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룬이 해야할 일이 무척 중요했다.
“백야. 준비해.”
“삐이!”
대답과 동시에 날개를 파닥거린 하얀새가 털 찐 몸을 내밀었다.
‘저 가슴깃털. 금광이 따로 없네.’
그랬다.
오늘은 그간 묵혀왔던, 불사조 깃을 수확하는 날.
다행히도 이번 작업은 백야가 아주 협조적이었다.
‘하긴 털을 수확하는 대가까지 먹여놨으니.’
룬은 황금팔찌를 쑥 뺐다.
“뀨후.”
[개운하네.]
인간형태가 아주 힘든 건 아니지만, 확실히 본체화를 하면 무척 개운했다.
가끔 대감집 여식들이 화장하고 밖에 다녀오면 종종 피곤해한다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달까.
“뀨우우!”
네 발로 엎드린 룬은 꼬리를 천장으로 치켜들고는, 두 앞발을 땅에 대고 엉덩이를 쭉 뒤로 뺐다.
우득.
또도독.
‘삭신이야.’
뻐근했던 몸 곳곳을 스트레칭 해 펴주자, 개운함과 더불어 시원함까지 느껴졌다.
몸을 푼 룬은 오른쪽 앞 발에서 발톱을 드러냈다.
촹.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해츨링이 눈 앞의 하얀새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오해할 법한 상황이었다.
‘버터 바른 감자칩을 먹여놨더니, 확실히 더 순순하군.’
룬은 새의 몸통을 둘러보며 흐뭇해했다.
오히려 빨리 해보라며 재촉하는 눈이기까지.
‘좋아. 기대에 응해주마.’
털이 풍성한 하얀 몸 안으로 해츨링의 뭉툭한 발가락이 쑥 들어갔다.
푸욱.
사악.
스르르륵.
하얀 깃털이 흩날렸다.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생의 원천에서 빠져나와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된 깃털들.
속절없이 거둬들인 깃은 룬이 미리 펼친 주머니 안에 담겼다.
‘수확하는 재미가 있군.’
그간 손을 보지 않았더니 엉킨 깃털까지 손수 정리하자니, 백야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삐, 삐이이이히이.”
“삐루루루루후.”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라도 한 건지, 눈을 감고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뀨.”
[……어이가 없네. 너 전에는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난리였으면서.]
그러자 백야가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었다.
“삐룻, 삐루룻.”
“…….”
아주 의뭉스러운 표정인 게,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녀석이 모른 척도 하네.’
뻔뻔하게 눈을 꿈뻑이는 걸 보며 룬은 느긋하게 수확기를 마쳤다.
“뀨뀨.”
[너도 꽤 컸네. 이 깃털 보여?]
“삐이?”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 기울인 백야가 깃털이 담긴 주머니를 보았다.
“뀨뀨우.”
[안에 든 걸로 널 다섯 마리는 만들고도 남겠다.]
“삐루우? 삐루!”
날개를 파닥파닥거리는 걸 보니, 나름대로 신나하는 게 보였다.
제 몸에서 뭔가 잔뜩 나온 게 마냥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룬은 즐거운 기분으로 깃털을 잘 모아 넣고 주머니를 꽉 죄었다.
“뀨.”
[안 그래도 쓸 곳 많았는데, 한동안 깃털 걱정은 없겠네. 수고했다, 백야.]
“피로로로…….”
비록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무척 즐거워 보이는 새가 노래하듯이 울었다.
그때, 모코지석이 반짝거렸다.
“뀨.”
‘무음으로 만들어 달라 하길 참 잘했지.’
이 평화로운 시간에 그놈의 땅! 이나 모콕! 하는 소리가 울리면 꽤나 고통스러웠을 터다.
적당히 한가했으므로, 룬은 모코지석을 두드렸다.
<룬 님, 계십니까?>
노란색으로 떠오른 글씨를 보아하니 제드였다.
‘개통파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생각해보니, 그레이스와 개통파 드워프들만 남기고 나온 셈이니 다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제드를 보낸 것인데, 역시나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다.
<응. 개통파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설마 개통파 녀석들이 술이라도 먹은 건 아닐지.
혹은, 그레이스가 일을 안 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룬이 기다리자, 제드의 노란 글씨가 스르륵 떠올랐다.
<개통파요? 잘 하고 있는데요.>
“?”
개통파가 잘 하고 있다면 딱히 문젯거리가 없었다.
룬은 의아한 기분으로 다시 자판을 건드렸다.
<그럼 왜 연락한 건데?>
아니나 다를까, 제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왔다.
<이거 보십쇼, 룬 님.>
그러더니 제드가 한참 뒤, 이상한 기호를 보내왔다.
<ㅇ>
<ㅅ>
<ㅇ>
“……?”
저게 뭐야.
룬은 뭐라 해줘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그 이상한 기호를 바라만 보았다.
<아니, 이게 잘 안되네요. 조합이 등록 안 되어 있어서 그러나?>
곧이어 떠오른 노란 글씨를 봐도 제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