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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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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잉. 이게 안 되네.>
혼자 열심히 뭔가 하는 듯하긴 한데, 당최 의도를 모를 일이었다.
결국 룬이 한 소리 던졌다.
<뭘 하고 싶은 건데?>
<그, 왜 있잖습니까. 일 전에 흑미 님이 라이 님을 예로 들어서 하던 거요.>
라이라면, 크리스티나와 늘 함께 있는 그 하찮은 도깨비불.
아니, 정령을 뜻했다.
<이상하네. 분명 잘 됐었는데. 뭔가 속도의 문제인가 봅니다요.>
누가 제드어를 번역해줬으면 좋겠다.
“뀨후우우우…….”
룬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더니, 제드의 노란 글자가 뭔가를 만들어냈다.
<>ㅅ
<오오! 됐습니다! 이겁니다요!>
마악 한소리 하려던 차, 룬도 제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이해했다.
어딜 도망가
<그러니까 라이가 쓰는 그 이상한 그림을 구현하려는 거지?>
룬의 말에 제드의 노란 글자가 깜빡였다.
<그렇습니다요. 전부터 머리에 딱! 꽂혀서 꼭 시도해보고 싶었거든요!>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제드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았다.
룬은 뀨후, 하는 한숨을 쉬곤 모코지석을 두드렸다.
<개통파와 그레이스가 어떤지 확인은.>
<아차!>
아차라니.
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자식 까먹었군.’
룬은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너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즉시 제드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아이고, 아니. 죄송합니다요. 까먹은 건 맹세코 아닙니다! 먼저 말씀드려야 했는데 이 좋은 생각에 몰두하는 바람에 그만! 제가 룬 님께 얼마나 충성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아 설마 이걸 오해하시는 건 아니시죠? 제대로 살핀 건 틀림 없…….>
그대로 뒀다간 또 한나절을 저 주둥이만 보고 끝날 것 같았다.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룬은 그의 심정을 담아 검은 글씨를 띄웠다.
<말만 하기 보다는 행동으로 보이지 그래.>
즉시 수다스럽게 빛나던 글자가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한결 느려진 노란 글자가 나열되기 시작했다.
<옙.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그레이스 님에게 개통파 드워프가 호통을 들어가며 작업 중입니다요.>
<첫 날부터?>
룬의 말에 제드의 노란 글씨가 깜빡였다.
<그렇습니다요. 보아하니, 드워프들이 기술이 좋긴 하지만 어둠을 다루는 건 그레이스 요정님보다는 부족한 편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경력이야 드워프들이 더 좋을지 모르지만, 태생부터 어둠 그 자체인 그레이스는 그야말로 천부적인 실력자다.
그를 생각하면 드워프들이 혼나가며 실력을 끌어올리는 건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였다.
제드의 묘한 비굴함이 담긴 노란 글씨가 이어졌다.
<물론 이 제드 역시, 룬 님을 위해서라면 뼈가 갈리도록 노력하는 놈 아닙니까. 최초의 개혁파를 이끈 드워프로서 최대한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요! 다아 룬 님을 향한 충심, 그저 충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죠!>
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뀨우우.”
[돈에 충실한 놈이 말은 잘 하는군.]
이 말을 그대로 전해줬다간 아니라며 펄쩍 뛸 놈이다.
룬은 굳이 일일이 그걸 대응할 정도로 한가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일에 문제가 없다면 그만.
심지어, 돈에 미쳐있는 놈이라 룬의 재산은 물론, 사막 암시장을 통한 재료까지 잘 불려놓은 놈이다.
‘이 놈 덕분에 내가 다양한 재료를 아낌없이 쓸 수 있긴 하니.’
이미 대륙에 룬의 황금 창고나 다름없는 머스킷 상회를 세워 둔 녀석이다.
심지어, 뭐든 룬이 요구할 드워프 장인의 물건들까지.
그를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통로가 완성돼야 형의 과업도 시작할 수 있어. 겸사겸사 그레이스와 개통파 드워프들 실력도 올려야겠지만, 최대한 빨리 완성하게 잘 도와.>
물론, 경고를 잊지는 않았다.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대륙으로 곱게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새까만 글씨가 만약의 미래를 의미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제드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며 부지런히 모코지석을 두드렸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제드만 콱! 믿으십쇼!>
룬은 내심 감탄했다.
믿으라는 말이 제일 믿어지지 않는 놈이란 말인가.
‘못미더움의 상징 같은 놈일세.’
하지만 이 건은 맡겨봐도 될 듯싶었다.
누구보다 대륙에 있는 개혁파 드워프들을 생각하는 녀석이기도 하니.
돈 만큼이나 욕구에 충실한 놈이라 믿음직하다는 점이 그저 아이러니 할 뿐이었다.
‘중요한 건은 확인했고, 제드가 생각해 봤다는 그림문자에 대해 살펴보긴 할까.’
무시하고 지금 대화를 끊었다간 다녀와서라도 제게 털어놓고 싶어할 게 눈에 훤했다.
안 그래도 말이 많은 녀석이니 한번 입이 터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떠들어댈터.
차라리 적당히 떨어져서 글자로 서신을 주고 받는 건 피로감이 덜했다.
또 다른 이유로, 제드가 스스럼없이 기발한 생각을 떠들어도 된다는 분위기를 남겨두고 싶었다.
룬은 제드가 올리기 시작한 기호들을 모두 살폈다.
‘이제 보니 >ㅅ< ! 말고도 여러 개 적어 올렸군.’
생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글자를 쓸 수 없는 상황, 글자를 잘 모르는 자들도 유용하게 쓰겠는데. 뭐…… 제드 녀석처럼 단순히 마음에 들어서 쓰는 자들도 있겠지만.’
룬이 갓 태어났을 즈음부터 함께 해 온 라이는, 다양한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해왔다.
그리고 룬은 어릴 때부터 봐온 문자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문득, 룬은 뭔가를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뀨우우.”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그림. 대충 이런 느낌이었던가?]
룬은 모코지석을 몇 번 조작해보고는 그림 문자를 완성했다.
<( ̄_ ̄)>
까맣게 올라간 마력 글씨.
아니, 그림을 보며 제드가 대답했다.
<오오, 맞습니다! 뭐, 마력을 이런 식으로 휙휙 써버릴 자야 잘 없겠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실용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웃기고 재미있으니 떠올려봤다는 소리였다.
<그래? 내가 보기엔 꽤 쓸 만해보이는데.>
그 말에 제드가 되물었다.
<에엥? 어디에 쓰시려구요?>
그야, 당장은 이걸 쓸 곳이 없겠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은 룬이 글을 써내려갔다.
<제드. 이런 거 더 생각해서 기록해 둬.>
그러자 제드의 노란 글씨가 반짝였다.
<오오. 룬 님, 역시 아이답게 이런 걸 더 좋아하시는군요?>
뭘 생각한거야.
어린 해츨링의 모습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긴 룬이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냥. 간만에 네가 쓸 만한 걸 만들었다 싶어서.>
룬은 힌트처럼, 그가 생각하는 이점을 알려주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날 이들이 모두 글자를 알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당장 낙후된 지역에 사는 자들은 글자를 잘 모른다 하니.’
생계에 필요한 정도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걸 제대로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드는 룬의 생각을 이해하고 감탄했다.
<호오오오오! 그런 생각을 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요.>
그 뒤, 룬은 제드와 몇 가지 그림을 더 실험해보았다.
대부분 아주 단순한 선과 점 몇 개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수준이라면 어린 아이라도 사용할 수 있겠는데.’
문득, 룬의 시선이 털이 쑥쑥 빠져 개운해보이는 백야를 향했다.
[마침 시험해 볼 녀석도 있군.]
“뀨후.”
까만 해츨링의 붉은 시선에서 뭔가를 읽은 것일까.
백야가 눈을 끔뻑이며 룬을 올려다보았다.
“삐……삐약?”
“뀨꾸.”
[늘 궁금했지. 아니, 확신이라 해야하나.]
“삐이약?”
하얀 새를 주시하던 룬이 말했다.
“뀨.”
[너, 내 말 알아듣지.]
“삐이. 삐이?”
갸웃.
고개를 흔드는 모양새.
어느 쪽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룬은 가늘게 눈을 떴다.
“뀨우우.”
[하긴, 다는 모른다 해도 상관없지. 어느 정도 지능은 있을 테니.]
룬은 그 자리에서 즉석해서 단어 카드를 만들었다.
마법을 곁들이니, 즉시 만든 것 치곤 제법 괜찮았다.
룬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뀨.”
[특훈이다.]
결의에 찬 룬의 목소리에 백야가 당황한 눈치로 울었다.
“삐, 삐야아아아?!”
“뀨뀨.”
[기왕이면 너도 강해지는 편이 좋잖아. 꼭 그게 아니어도 네 뜻을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유용하고.]
룬은 카드들을 물끄러미 보며 말을 덧붙였다.
“뀨우.”
[언령까진 바라지 않아. 하지만, 간단한 마법이라도 이 카드로도 가능해질 수 있다면.]
그랬다.
룬은 마력을 발동시킬 명령어.
즉 마법 언어를 이 그림으로 바꿔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비교하자면, 마법 스크롤과 비슷하겠군.’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단어카드나 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처럼 보일 터다.
하지만, 그 실체가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나 아티팩트가 된다면?
‘전투하는 도중에도 도움이 되겠지.’
물론, 그래봐야 새.
원대한 이 계획은 실패할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뭐든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었다.
‘정 안되면, 의사소통이라도 잘 되는 것에 만족하면 될 일이고.’
한데, 백야가 룬의 눈치를 보더니 스르륵 날개를 퍼덕이려들었다.
턱.
즉시 해츨링의 두 앞발이 슬슬 뒷걸음질하려던 새의 몸통을 잡았다.
“뀨우우우.”
[어딜 도망가.]
“삐, 삐이이. 삐루루루.”
기분 탓인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백야.
하지만 룬의 의지는 확고했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지.]
“삐이약!”
꽈악.
앞발에 힘이 들어가자 통통한 흰 새는 긴장한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뀨우!”
[해보자고.]
“삐……삐야아아!”
자유로운 새였던 백야.
그 날, 백야는 룬과 단어카드 게임을 하며 수련을 하게 되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
백야는 룬이 내린 과제를 수행하러 창 밖으로 날아갔다.
“삐룻. 삐루루루.”
베르딘의 부엌으로 날아가는 하얀 새 한 마리가 힘없이 날개를 흔들었다.
울음 소리만 들으면 타령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던 베르딘은, 아무도 올 리 없는데 이상하다 여기며 고개를 들었다.
톡톡.
토토톡.
-으응? 아니, 백야가 아닌가?
소리가 들린 장소는 창문 밖이었다.
하얗고 통통한 새가 부리로 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구면이기도 하기에, 베르딘은 창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무슨 일로 여기에 온…… 혹시 배가 고파서인가?
새가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여긴 베르딘이 중얼거리자, 백야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왼쪽 다리를 슥 내밀었다.
-이건 편지 같은데.
유령 베르딘은 어렵사리 종이를 펼쳐 읽었다.
-새가 지정한 것을 다리에 달아 보내달라…… 라.
지령을 받아온 것이긴 한데, 그 내용이 어째 묘했다.
-룬 님이 시킨 게지?
“삐루.”
백야가 눈을 끔뻑이더니 가볍게 울었다.
베르딘은 다소 황당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허허…… 살다 보니, 아니 죽고 나니 별일이 다 있구먼…….
유령 드워프인 그가 느끼는 룬에 대한 감상은, 어딘지 모르게 어린 해츨링답지 않다는 것.
하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아보였다.
새와 영락없이 귀여운 놀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베르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조차 뭔가 뜻이 있으신 걸지도 모르지.’
그 때였다.
“삣.”
작게 운 백야가 이번에는 가슴털을 내밀었다.
-?
가만히 보니, 웬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삐이삐이이.”
새는 울면서 한쪽 협탁 위에 날아가 섰다.
그리고 날갯짓과 부리 짓을 하며, 뭔가 설명하고 싶어했다.
-목에 걸린 주머니를 협탁 위에 털어달라는 건가?
“삐이.”
그 말에 베르딘이 순순하게 목걸이를 떼어 주머니 입구를 벌렸다.
탈탈.
종이 십 여장에 협탁 위에 쏟아졌다.
‘이게 뭐지?’
의문이 담긴 베르딘 앞에서 백야가 부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종이 카드를 한 장씩 물어 늘어뜨렸다.
썰
어
줘
거기에 추가로 ‘감자’ 손그림 카드까지.
그리곤 쫑쫑 걸어간 하얀새가 부리로 쿡, 하고 찍은 것.
바로 알감자였다.
그림은 10살 꼬마가 그린 것 같았지만, 전하고 싶은 바가 명확했다.
-그 알감자를 썰어서 넣어달라는 거군.
“삐이.”
정답인지, 백야가 물끄러미 베르딘을 바라봐왔다.
그냥 새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한 번, 이런 교육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란 베르딘이 카드와 백야를 번갈아 보았다.
-똘똘한 새였구만.
베르딘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감자를 썰어 다리에 묶어주었다.
같은 시간, 혼자 남은 룬은 크리스티나와 대화 중이었다.
<요즘은 자주 연락해 주어서 좋구나. 볼 일이 없을 때에도 연락해 준다면 더 좋을 텐데.>
이렇게까지 자주 연락을 한 적이 없으니, 크리스티나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할 법도 했다.
아껴주면 좋겠어
‘이거 은근히 책하는거군.’
대화하기 편하게 인간의 모습이 되어있던 룬이 머쓱하게 변명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티나 생각은 종종 해.”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푸른 눈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렇게 연락을 준 데에는 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텐데. 그렇지 않니?>
룬은 순순히 인정했다.
“응, 맞아.”
<말해보렴.>
다정한 권유였다.
룬은 망설임 없이 미리 생각했던 말을 건넸다.
“전에 말야, 이 세상에서 나답게 살아가도록. 내게 큰 짐이 될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잖아?”
<역시 그 이야기로구나.>
이미 짐작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뭐, 예상한 반응이지.’
룬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번복하려는 건 아니야. 내게 모든 걸 다 말해주지 않는 이유도 이해했고.”
<그럼?>
“혹시 형한테 들었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이 사는 대륙에 간다는 거.”
영상 너머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단다. 펠도 많이 바쁜 모양이구나.>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중간중간에 우리들과 같이 있어주기도 해.”
사르륵
그녀의 벌꿀색 금발이 흔들렸다.
<그 아이가 무척이나 애써주고 있구나. 나중에 보답을 해야겠어.>
“맞아. 요즘 형은 밤낮없이 과업을 준비하랴, 레어를 다스리랴 아주 바빠보이긴 했어.”
사정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눈치를 살핀 룬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크리스티나가 시선을 들자, 룬과 눈이 마주쳤다.
“형은 할 게 너무 많아. 그래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찾아봤어.”
<기특한 이야기구나. 어떤 생각을 했니?>
‘뭐, 여기까지 들으면 기특한 게 맞겠지.’
그가 어린 모습으로 할 수 있는 장점에 기댄 도박.
고개를 모로 내린 룬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사실은…… 그날 봤던 무시무시했던 녀석이 아른거리곤 하더라고.”
<아, 저런…… 룬.>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안타깝게 변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룬이 입술을 움직였다.
“두렵지만 아주 위험해 보이는 그런 자가 존재한다는 건 사실이잖아. 몰랐던 때로는 갈 수 없고.”
룬은 크리스티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때로, 그녀보다 약하고 어린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 너무나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세상의 따뜻하고 좋은 것들만 채워주고 싶어하는 상냥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잃을 뻔했다는 강박도 있겠지. 안타깝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과보호나 다름없어.’
비록 작고 어린 해츨링이지만, 속은 천년 가까이 묵은 신수였던 룬.
힘을 다루는 것은 물론, 다양한 경험 또한 존재했다.
그런 룬에게 정보라는 건 오히려 정확하고,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걸 설득 시킬 수 없지.’
그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룬은 이번에 그 ‘과보호’의 벽을 깰 셈이었다.
“그러니, 그 위험에 대해 내가 알아두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일이 잘 되면 앞으로 내가 활약할 때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을 수 있을 거야.’
이미 그녀의 성향은 파악하고 있기에, 성공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가능성이 곧 완벽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룬의 말에 크리스티나가 염려 섞인 목소리를 내려던 그 때, 룬이 모른 척 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무서운 기분이 드는 건, 내가 그런 존재에게 대항할 무엇도 준비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거든.”
그리고 룬은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내겐 크리스티나가 있잖아?”
표정이 변한 크리스티나를 보며, 룬은 이 계획이 통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동정심과 염려, 그 과보호를 오히려 역이용하는 작전.
‘반드시 통하겠지. 심지어, 크리스티나는 대륙의 위험을 감지해 온 자니까.’
속으로는 웃음을 짓고 있지만, 겉으로는 짐짓 진지해 보이는 얼굴을 한 룬이 입을 움직였다.
“만약 내가 본 무시무시한 녀석이 넘어오면, 그걸 크리스티나에게 알리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한 아이가 할 법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크리스티나가 룬의 말을 무시하고 넘기는 성격이었다면 신경 쓸 것 없다면 넘길지도 모르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역시나.
룬은 속으로 직감했다.
‘이건 된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룬은 은근히 크리스티나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룬. 너는 그저 배움을 위해 따라갈 뿐이야. 다른 이들도 분명 네가 말한 일은 할 수 있을 테고.>
‘역시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군.’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해둔 상태였다.
룬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제드가 그러더라고. 위험한 일에 대해 사전에 미리 알아두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저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제드 녀석과의 일이 여기서 쓸모 있어질 줄이야.’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제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제드가 흑미에게 ‘색마’라든가, ‘집착 변태’ 같은 말을 했었거든.”
<어머나. 당혹스럽구나. 제드는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거니?>
크리스티나 역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정을 모르고 단어만 들으면, 어린 흑미에게 할 단어가 아니니 무척 이상해 보이기는 했다.
“나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는데, 알고 보니 오해더라고. ”
룬은 즉시 오해를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