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는 마을에는 선하고 좋은 자도 많지만, 해코지하려는 아주 나쁜 놈들도 많아서 그걸 경고해 주려다가 나온 말이래.”
그제야 표정이 풀린 크리스티나가 이해한 얼굴을 해 보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구나.>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맞아. 흑미는 무력으로 치면 강한 편이지만, 제드 생각에는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안 좋은 일에 대해 알려주는 편이 옳다고 여긴 거야.”
돈에 대한 탐욕과 입방정이 심한 녀석이라 그렇지, 기본적으로 어린 녀석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은 있는 제드였다.
그 나름대로는 흑미가 주변 골목을 돌다 이상한 놈이라도 만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룬은 이와 같은 논리로 설득을 이어갔다.
“나도 그래. 당연히, 불의 신전에서 본 존재를 만나면 피해야하고 도망도 쳐야겠지. 하지만, 만나면 이미 늦는 거잖아. 미리 알면 훨씬 좋겠지?”
이 뒤에 덧붙여진 말에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있잖아. 나 스스로도 나를 귀하게 여기고, 위험에서 스스로를 구할 힘과 정보를 원해.”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잠시의 침묵 뒤, 재차 입을 연 그녀는 옅은 한숨을 머금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나 역시 아이를 키운 적이 없다 보니, 그저 보호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 왔었구나.>
룬은 마음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물론, 평범하게 보면 룬 나이의 해츨링은 무조건적인 보호와 애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는 때론 뜨거운 물이 담긴 컵에 손을 데이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세상의 위험에 대해 배워가게 되지만 룬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크리스티나에게 전승 지식을 받았지.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내 어미가 비슷한 일을 알인 내게 했을 거라 여기고 있어.’
블랙 드래곤 족 장로인 그의 어미.
어떤 자인지는 모르나, 크리스티나가 인정할 만한 실력자이자 스승.
이는 룬이 묘하게 어른스럽고, 성숙한 사고를 하게 되는 좋은 이유가 되어주었다.
시선을 조금 내렸던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닌, 위험한 것을 알려줄 필요도 분명 있는 법이지. 그를 간과하고 있었다니, 내 실수야.>
룬은 무해하고 순한 얼굴로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 크리스티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해 줬어. 그리고 내가 귀한 존재라고 여겨질 수 있도록 했잖아?”
룬은 순한 얼굴로 살짝 웃어보였다.
“그 덕분이야. 내가 이렇게 나를 아낄 수 있는 해츨링으로 자라는 건.”
크리스티나의 눈가가 살짝 젖어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은 얼굴로 다정한 말을 건네었다.
<룬, 너는 내가 아는 드래곤 족에서 가장 특별하고 똑똑한 해츨링이야.>
‘이거지.’
완벽했다.
어느 정도 사실을 섞어 한 말이기에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고마워, 크리스티나. 앞으로도 많이 아껴주면 좋겠어.”
괜한 겸양을 하기보단, 룬은 아이다운 순진함으로 툭 말해두었다.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말 할 수 있는 이 외모. 제대로 이용해 주지.’
훈훈한 분위기가 지나가고, 룬이 막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말문을 떼었다.
“그러니 크리스티나. 불의 신전에서 본 녀석들에 대해 아는 거, 말 해주지 않을래?”
조금 망설이는 듯했던 크리스티나가 허락의 말을 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구나.>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티나가 운을 떼었다.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불의 일족 장로인 파시야스가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즈음이었어.>
“페르디키온 형의 아버지 말이야?”
<응. 한창 전쟁 중일 때부터 이미 징조가 있었단다. 불의 가호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지. 결국, 전쟁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같은 퇴역을 권고 받았을 정도였으니.>
크리스티나의 지식을 받았지만, 이 점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전쟁 후반즈음부터 레드 드래곤 일족은 세가 급속도로 약해져갔다.’ 뿐.
‘설마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이야.’
물론, 룬에게 자세한 정보가 제공 되지 못한 이유는 짐작이 갔다.
‘불의 일족 치부와 관련된 정보니 나이가 더 들었을 때 개방 되는 정보거나, 크리스티나가 전승해 주지 않았겠지.’
생각은 바쁘게 지나갔으나, 겉으로는 말 잘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가 말을 이었다.
<그 뒤로, 파시야스는 불의 일족 장로직조차 유지하기 힘들어했고, 힘에 집착하기 시작했지. 어찌 보면 안타까운 치라고 생각한단다.>
“그랬구나.”
<전쟁 후, 많은 시간을 들이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단다. 먼저, 이 세상의 힘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지.>
그 말을 하는 크리스티나의 푸른 시선이 깊은 빛을 품었다.
<사실…… 룬, 네가 태어나지 못한 것도. 단지 일족이 없기 때문이 아닌. 이 세상에서 어둠의 절대량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라 여겼단다.>
룬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쳤다.
생각을 정리 하기도 전에, 입이 움직였다.
“그거였구나. 나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
<……그래.>
쓴웃음과 함께 나온 말은 긍정이었다.
‘그래서였다라.’
크리스티나가 조금 흘린 말에서, 룬은 그가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랜시간 알이 죽어있었기 때문에…… 도 맞겠지만, 어둠의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태어나지 못 하리라 결론을 내린거였군.’
어둠 일족 유물이 주변에 과할 정도로 쌓여있던것도, 혹시나 그 힘들에 싸여 태어날까 하는 바람이었으리라.
크리스티나의 고충을 안 룬은 내심 그녀가 안타까웠다.
움직일 시간이 됐어.
룬이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크리스티나가 보고 있는 이 해츨링은 정말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혹여 이 어린 육신을 내가 빼앗은 격이 아닐지 염려했건만. 아니었어.’
이미 죽은 알과,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크리스티나.
문득 룬은 태어났을 때 본 광경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보기 힘든 귀한 물건들.
태어났을 때 본 검은 마력석.
블랙 드래곤 일족의 유물.
그 모두를, 그녀가 생각한 가장 안전한 장소인 골드 드래곤의 레어에 모아두었음에도.
결국, 그 아이는 살아날 수 없었다는 게 진실이다.
‘부족한 힘은 내 혼으로 보충되어 완성된 거겠지.’
영상으로 전송되지 않을 사각에서 룬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 진실은…… 적어도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야.’
룬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평온하면서도 차분한 푸른 시선이 원망을 받게 된다 해도 받아줄 수 있다는 듯, 거기 있었다.
룬은 옅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태어난 게 기적이었네. 나.”
크리스티나는 살짝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원망도, 미움도 없이 순하게 웃어오는 착하고 현명한 루비색의 눈.
왜 인지,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받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도 하지.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나를 이해한다고.’
어쩌면 너무 오래 사는 동안 감각이 무뎌진 탓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룬. 내게 너는 기적 같은 아이란다. 어려움 속에서 태어난, 너무나 귀한 생명이라는 걸 기억해주렴.>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티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건 룬이 보기에 개운해 보이기 까지 했다.
룬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즐겁게 감상한 크리스티나가 상냥한 빛을 품고 입술을 움직였다.
<다른 해츨링에 비해 작은 편인데다, 우유조차 먹는 걸 거부하지를 않나…… 겨우 뭔가 먹는구나 싶었더니, 펠보다 훨씬 적은 편이라 걱정도 많았지.>
멋대로 나가 배앓이까지 하고 말이야, 라며 눈을 흘기자 룬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야 처음에 거부한 건 의심스러워서였으니까.’
우유 한 병이 뭐라고 그렇게 의심을 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했다.
손으로 볼을 긁적인 룬이 멋쩍게 말했다.
“그 뒤로는 잘 먹기 시작했잖아.”
<그래. 하지만 걱정이었단다. 어쩌면 내심…… 몸이라도 약하게 태어난건 아닐까, 고민했던 날도 있었지.>
룬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손수 불사조의 계란이며, 다양한 식재료를 손수 구해왔던건가?’
어쩐지 한가하게 요리를 연구하더라니.
룬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슬쩍 웃어보였다.
“내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나 꽤 강하지 않아?”
<그러게. 정말 잘 크고 있어서 마음이 놓인단다.>
‘이것 참. 민망하군.’
룬은 목 근처에 열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분위기를 확인하고, 룬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내가 주의해야할 그 나쁜 녀석들은 누구야?”
햇살이 움직이듯, 크리스티나의 몸도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이건 각 드래곤 족 장로들만 나눈 비밀이란다. 맹세도 엮여있어서, 많은 것을 말 해줄 수는 없어.>
룬은 미미한 낭패감을 느꼈다.
드래곤 장로들끼리의 맹약이라면, 크리스티나라 해도 어길 수 없을 터.
그 때, 입가에 검지를 댄 크리스티나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알려줄게.>
“경청할게.”
룬의 대답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반 정도 돌렸다.
그녀 뒤에서 공중 정원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시선을 두던 크리스티나가 다시 입술을 떼었다.
<룬, 네가 본 거대한 손. 그 힘의 본체는 분명 존재해. 하지만 이 대륙에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어.>
“다행이네.”
룬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불의 일족들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 꼴을 봤기에, 그 힘과 당장 맞닥뜨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다만, 언제라도 이 세상에 간섭할 수도 있는 것이라 판단한단다. 그를 지키기 위해 현재 ‘드래곤 로드’가 힘을 쓰고 있지.>
“드래곤 로드라면…… ‘이샤’라는 자?”
화면 너머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로드 ‘이샤’는 성정을 빼고 논하자면, 무척 뛰어나고 강한 힘을 가졌단다. 그의 언령은 이 세상에 다가올 위험을 막아낼 수 있……!>
파지직.
영상석 너머의 크리스티나의 몸에서 가벼운 스파크가 튀었다.
“! 크리스티나!”
룬이 외치자, 그녀는 하얀 손등을 왼손으로 살짝 덮었다.
<……이런. 역시 이 말 이상은 해 주기 어렵겠구나.>
“혹시 다쳤어?”
<괜찮아.>
룬의 염려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반응이니까. 정말 내가 위험했다면, 이 손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에 룬이 미간을 찌푸렸다.
후, 하고 한숨을 쉰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언령을 발동시켰다.
<<치유하라.>>
우웅
화면 너머로 작은 울림이 들렸다.
조금 후, 크리스티나가 가린 손을 치웠다.
옅게 남은 검은색과 갈빛의 그을림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손을 보이며, 크리스티나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렴. 다 나았지 않니?>
룬 역시 굳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다행이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후후. 걱정 마렴. 이건 비밀이지만, 내 치유의 언령은 그저 상처만 치료하는 게 아니란다.>
그 말 대로였다.
비록 영상 너머의 진행이지만, 분명 맹세를 어긴 대가로 받은 타격.
그걸 가볍게 치유할 정도라면, 이는 단순한 치료 마법이 아니다.
‘언령을 어겨 당한 상처는 영혼에 남는 상처. 그걸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라…….’
어쩐지, 갈색 드래곤 란드가 크리스티나만큼은 연락을 주고 받더라니.
언령을 지키지 못해 타격을 입은 란드에게, 크리스티나의 언령은 회복을 위해 꼭 필요했으리라.
‘어마어마하네. 불의 인장을 얻을 때에도 크리스티나의 엄청난 보조 능력치에 놀랐는데. 그 이상의 힘이라니.’
생각지도 못하게 엿보게 된 크리스티나의 능력은 룬의 상상 이상이었다.
크리스티나가 그의 보호룡인 것이 행운이라 보일 정도다.
‘비밀 일만 해. 내가 어리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면 함부로 보이지 않았을 능력이야.’
반대로, 룬에게 힘을 보여준 것은 언제든 룬을 위해 그 힘을 써 주겠다는 말과 같았다.
룬의 머릿속에 저 힘을 이용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나 스쳐지나갔다.
‘좋다. 이 기분이 겉으로 티 나면 안 되는데.’
룬은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피해 심호흡을 한 차례 들이내쉬었다.
그 사이 제 손등을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로드 ‘이샤’의 능력 덕분인지, 이 대륙에 발을 들이지는 못해. 하지만 만약을 위해 나 역시 세상 곳곳을 다니며 확인하고 있단다. 흔적은 없어.>
그렇게 재차 단언한 크리스티나의 말을 듣던 룬은 문득 대륙 외, 다른 장소를 떠올렸다.
“그럼 마계는?”
<거긴…….>
미약한 동요가 느껴졌다.
이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내가 가보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마계의 마족들 역시, 그런 존재는 달가워하지 않을 듯하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룬의 물음에 크리스티나가 차분히 대답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싶은 부류니까. 제어 할 수 없는 다른 세력이 끼어드는 건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크리스티나의 존재 자체가 마족과 적대하는 이상, 마계까지 확인하는 건 무리긴 했다.
‘나라면 가능하겠지만.’
룬은 그가 만나 유일한 마족, 레파논을 떠올렸다.
추악하고 탐욕스러웠지만, 징그러운 영악함과 오만을 갖춘 자였다.
‘산지옥을 만들고 싶어 할 자니, 아무것도 없을 멸망을 반기지 않겠지.’
지옥은 무(無)가 아니다.
지옥도를 이룰 피의 물감과 인간의 기름.
그리고 도구가 필요한 법.
그걸 생각하면 크리스티나의 말 또한 일리가 있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이미 룬에게는 마족에게 확인할 수단이 있으니, 여차하면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마족은 드래곤의 적이기도 하니, 무슨 연결고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물론 그 말을 입에 올렸다간 괜한 염려만 안겨줄 터.
룬은 떠오른 생각을 감추며 말했다.
“그럼, 크리스티나가 보기엔 대륙은 꽤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네. 잘 됐다.”
크리스티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