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241/242)

<안전하다니. 그저, 네가 본 무서운 존재를 너무 두려워 하지 말라는 뜻일 뿐. 대륙에도 위험 요소가 없는 건 아니란다.>

“물론 알고 있어.”

룬의 대답에 안도하는 눈치였지만, 곧 사고 칠 말썽꾸러기를 보는 눈이었다.

<이 세상의 힘이 어디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단다. 어느 정도 사라지고, 새로 채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긴 했지. 하지만 아주 조금씩, 힘이 사라지는 것이 더 빨라지고 있어.>

염려 섞인 목소리에 룬이 말을 덧붙였다.

“혹시 형이랑 다니면서 관계 된 일을 발견하게 되면 나도 알려줄게.”

무언가 헤아리는 듯한 시선으로 보던 크리스티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겠어.>

룬은 그녀의 미소에서 생각을 읽어냈다.

크리스티나도 찾지 못한 것을, 룬이 찾을 리 만무하다 여기고 있을 터.

‘뭐…… 오히려 조금이라도 관계 되어 보이거나 위험해 보이는 걸 보면, 알려줄 계기가 될 거라 예상하고 있을지도.’

강요하는 느낌 없이, 위험을 보면 그녀에게 알릴 동기를 제공한 셈이다.

황금빛 고룡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고 있는데,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길고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줘서 나야말로 고맙구나. 언제나 널 응원하고 있을게. 룬.>

“고마워. 크리스티나도 손 조심해.”

룬의 시선이 깨끗해진 크리스티나의 손등으로 향했다.

이유야 어쨌든 맹약을 어길 수도 있는 정보까지 준 그녀다.

고마움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라이한테도 안부 전해 줘.”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정리한 룬이 영상석을 끄려는 순간.

그녀가 차분히 일러왔다.

<그런데 룬?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머리에 달린 새로운 장식이 꽤 잘 어울리는구나.>

“?”

그런 게 있을 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린 룬의 손에 삐죽 튀어나온 백야의 하얀 깃털이 잡혔다.

‘그럼 이야기 하는 내내 이걸 달고 있었다고?’

분명, 꽤 진지한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미간이 절로 꿈질거렸다.

룬은 손에 든 깃을 아공간 주머니 안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미리 말 해주면 얼른 떼내었을 텐데.”

<후훗. 하지만 보고 있으려니 무척 귀여워서 그만 말 해 주는 것도 잊었지 뭐니.>

작게 웃으면서 말 하는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잠시 둔 룬.

그는 다소 과장되게 숨을 쉬며 말했다.

“거짓말. 내가 언제 눈치 채나 기다리고 있던 거잖아.”

<어머. 눈치가 빠르구나.>

‘그야 평소 행동을 생각하면 어려운 추측도 아니지.’

룬은 크리스티나와 잡다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영상을 종료했다.

그리고 며칠 뒤.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룬은 본체화 한 채 모코지석의 알람까지 켜 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모콕!

‘왔다.’

탁.

즉시 책을 덮은 룬이 모코지석의 노란 글씨를 읽었다.

<룬 님, 게이트가 완성 됐습니다요! 그레이스 님과 개통파 드워프들. 그리고 이 제드가 주도해서 만든 명작품이 드디어 세상에……!>

감격에 겨웠는지, 이 뒤로도 엄청난 문장들이 이어졌다.

“뀨.”

‘이제 움직일 시간이 됐어.’

어린 해츨링의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며 웃음이 지어졌다.

형은 네게 실망했다.

“뀨우.”

<곧 갈게.>

검은 글씨를 남긴 룬은 다른 모두에게 모코지석으로 이 소식을 알렸다.

가장 먼저 답을 준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좋다. 마침 아멜리아와 과업수행에 대해 의논하던 참이니 같이 가도록 하지. 어디냐, 룬?>

<여긴 장서관이야.>

<흑미도 갈게요!>

잠시 뒤, 백야와 흑미가 룬이 있는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와아! 룬 님, 찾았다아!”

“삐약!”

백야를 안고 들어온 흑미가 책 장 앞에 섰다.

“룬 님, 읽는 게 좋아요?”

“뀨우.”

[그런 편이지.]

고개를 끄덕이자, 흑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은 머리 아파요. 양피지도 글자가 너무 어렵구요. 그런데 룬 님은 어떻게 이런 걸 다 읽을 수 있는 거예요?”

끙, 하고 양피지를 펼쳐본 흑미가 귀를 뒤로 접었다.

하기야, 흥미로운 내용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레드 일족의 역사가 드문드문 적혀있으니 그럴 만했다.

‘사실 여기 있는 자료들이 재미없는 거긴 하지만. 책 자체에는 재미를 붙이는 편이 좋을 텐데.’

피유, 하고 콧숨을 쉰 룬.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말문을 열었다.

“뀨우.”

[책이라는 건 이야기야.]

“이야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를 쫑긋 세우는 흑미에게 룬이 말을 이었다.

[응. 이 종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아주 오래된 이야기부터,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문까지 아주 다양하게.]

그 말에 흑미가 분홍빛 눈을 반짝였다.

룬이 말을 이었다.

[그 중에는, 이제 네가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남긴 이야기도 있을거고. 그 중 알고 싶어지는 게 있으면 골라서 읽어보는거지.]

책과 양피지 더미 앞에 선 흑미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흑미에게 이야기를 남겼다는 게 신기해요.”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말을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가끔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건 보는 게 좋아.]

흑미의 시선이 책과 양피지더미로 옮겨졌다.

오래되어 먼지가 쌓여있기도 했지만, 흑미는 조심스럽게 두루마기 하나를 골라 쥐었다.

“룬 님, 여기에는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 거예요?”

“뀨우.”

[아, 그건 레드 드래곤 일족 중 누군가의 일대기였을걸.]

마침 읽어본 양피지였다.

룬은 대략적인 줄거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여성체 레드 드래곤의 유희와 모험 이야기인 거 같던데, 나는 끝까지 다 읽진 못했어. 네가 읽어보면 의외로 재미있을지도 모르지.]

“핫! 그럼 이거 읽어볼래요.”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져가는 건 안된다니까 여기서만 읽고.]

“네!”

씩씩한 대답을 들은 룬은 그가 보던 책을 책장에 꽂아넣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흑미가 한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에 눈길을 주었다.

“뀨?”

[그건 뭐야?]

“앗, 맞아요. 이거 룬 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흑미가 무언가를 룬에게 내밀었다.

오동통한 작은 손에 잡혀있는 건, 레드 드래곤 영토에서 본 적 없는 생화였다.

“불의 기운과 정령의 기운을 머금은 꽃이래요. 엄청엄청 드물게 피어서 찾아낸 자에게 행운을 준대요!”

히, 하고 웃은 흑미가 룬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백야랑 제가 발견했어요. 받아주세요, 룬 님!”

“삐이약!”

메마른 대지에서 핀 꽃이라니, 조금 신기하긴 했다.

심지어 붉은 기운이 돌기는 하나, 흑미의 눈과 비슷한 색인 분홍빛이었다.

‘분홍 달맞이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보다 좀 더 이국적인 느낌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뀨우.”

[잘 받을게.]

흑미는 무척이나 기쁜 눈치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눈치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요, 이 꽃은 머지않아 시들 거래요.”

상당히 아쉬운지, 흑미의 목소리에서 점차 힘이 없어졌다.

“모처럼 찾아낸건데, 아쉬워요.”

“뀨우우.”

[안타깝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그러자 흑미가 꽃을 만지작거리며 룬에게 물어왔다.

“그래두…… 방법이 없을까요? 룬 님.”

간절한 눈으로 바라봐오는 흑미를 보며 룬은 고심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룬이 말했다.

“뀨우.”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확인 해보고 말 해줄게.]

날개를 파닥이는 백야를 보던 흑미가 기쁜 얼굴로 외쳤다.

“와아! 잘 됐다, 백야야!”

“삐약!”

룬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방법이 정확하게 나온 건 아니라니까.’

하지만 거의 확정적으로 되리라 여겼다.

‘역시 이런 건 제드 녀석에게 맡기면 되겠지.’

룬은 아멜리아에게 준 스노우볼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똑같은 걸 만들어 달라하긴 그렇고……. 뭘로 만들어달라고 하지.’

문득, 룬은 며칠 전 크리스티나와의 대화할 때 자신의 머리에 백야의 하얀 깃털이 꽂혔던 걸 떠올렸다.

당시야 민망한 순간이었지만, 덕분에 머리에 꽃을 꽂는 걸 여자애들은 좋아한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 머리 장식이면 무난하겠지. 안 그래도 백미가 무척 좋아했었고.’

이무기 시절 기억을 떠올린 룬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녀석은 백미가 아니니, 확인은 해 둘까.’

룬은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 자잘한 물건들 중, 음식을 꾸미기 위한 장식품을 만드는 시약이 든 병을 꺼냈다.

‘케이크 위에 놓는 장식품을 만들 때 쓰는 건데, 챙겨놓길 잘했군.’

룬은 꽃에 시약을 발라 마법으로 빠르게 건조시켰다.

몇 초 뒤, 꽃은 잔향이 감도는 훌륭한 장식품이 되었다.

“뀨우.”

[자, 이런 느낌 어떤지 한번 봐봐.]

통통한 까만 앞발 위에 있는 꽃장식을 본 흑미가 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룬 님, 이거 너무 예쁘게 생겼어요!”

‘반응이 괜찮군.’

생각보다 뿌듯했다.

한술 더 떠서 룬이 제안했다.

“뀨우우.”

[이걸로 머리장식을 만들어 줄까 싶은데, 어때?]

“진짜요? 그럼, 너무 예쁠 것 같아요!”

벌써부터 기쁘다는 듯 두 개의 여우 꼬리까지 살랑거렸다.

룬이 말을 덧붙였다.

[이건 기념으로 일단 가지고 있어. 남은 꽃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네!”

흑미는 룬의 발바닥 젤리 위에 놓여진 꽃장식을 가져와 한쪽 귀 위, 머리카락에 꽂았다.

분홍 장미색 눈과 잘 어울렸다.

“이거 봐, 백야야. 어울려?”

“뺘악.”

치맛자락을 든 흑미가 제 자리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리자 백야가 함께 날았다.

지켜보던 룬은 만족스러웠다.

‘마음에 들어보이네. 잘됐군.’

아공간 주머니 안에 남은 꽃송이들을 넣으며, 마침 제드가 있는 개통파 공방에 갈 참이니 잘 되었다 싶은 순간.

“룬!”

쾅!

페르디키온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뒤이어 아멜리아가 안절부절못한 눈치로 들어오더니 펠을 향해 뾰족한 시선을 흘겼다.

“지, 진짜……! 그런 게 아, 아니라니까…….”

저 둘은 또 뭣 때문에 그러는지.

룬은 문이 열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뀨우우.”

[왔어? 등장이 조금 요란하네.]

그러거나 말거나, 페르디키온이 성큼성큼 룬에게 다가와 바로 옆 책장을 손으로 쾅 쳤다.

“룬!”

“아, 앗……!”

안 그래도 하얀 아멜리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퍼졌다.

흑미와 백야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 그만해. 페르디키온! 아, 아니라 해…… 했잖아!”

‘오. 그 아멜리아가 저렇게 말하다니.’

룬은 아멜리아가 생전 처음으로 강경하게 말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의 말에 시선은 다시 화룡족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룬! 됐고, 내 말에 솔직히 대답해라.”

“뀨우?”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룬이 눈을 깜빡이자 페르디키온이 더 말 못하고 씩씩거렸다.

황당해진 룬이 주둥이를 살짝 벌리고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이 놈이 미쳤나.’

마음 같아선 그렇게 말 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유가 더 궁금했다.

솔직히 대답하겠다는 듯 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디키온이 룬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멜리아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뀨우우?”

[……사실이야. 설마 겨우 그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 아멜리아가 룬을 너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기에 어둠의 힘을 가져가기 위해 준 선물을 말하는 듯 했다.

‘그게 뭐가 문제야? 힘을 되찾으려고 한 일일 뿐인데.’

룬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속이 터진 건지,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팍 구겼다.

“겨우? 지금 겨우라고 했냐?”

누가 보면 배은망덕한 검은 머리 짐승이라고 탓하는 얼굴이다.

분명 인간형인데도 입에서 불꽃 브레스를 터트릴 듯한 기세에, 흑미가 가세했다.

“아멜리아 언니에게만 몰래 준 거 아니에요! 흑미도 선물 받았는걸요?”

흑미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방금 룬이 내어준 분홍꽃장식을 보여주었다.

흑미의 눈과 색을 맞춘 듯 정성스러워 보였다.

“이거 보세요! 진짜예요!”

“삐약! 삐야약!”

백야까지 합세하여 호응을 해 주었다.

그제야 룬은 상황을 파악한 기분이 들었다.

“뀨우.”

[그러니까…… 내가 아멜리아한테만 선물을 줘서 기분이 나빴다는 거야?]

페르디키온은 멍하니 흑미의 장식까지 보고는 굳어있었다.

그리고.

“룬…… 이 형은, 네게 실망했다.”

……지그시 룬을 노려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아……그, 그게 아닌데…….”

아멜리아가 뭔가 설명하려 했지만, 페르디키온은 금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뀨?"

뭔가 잘못되었다.

이 직감은 도무지가 틀린 적이 없었다.

“뀨…… 뀨우?”

[쟤…… 아니, 형 왜 저러는 건데?]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룬의 말에 아멜리아가 아우,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이, 있잖아…… 오해가 이, 있어…….”

“뀨?”

[무슨 오해가?]

“삐약.”

룬의 물음에 흑미와 백야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멜리아가 열심히 단어를 고민해 이야기를 했다.

“그, 그게…… 페, 페르디키온이 화가 난 건…… 있지. 나……한테만 선물을 줘서가 아, 아니야…….”

“?”

하긴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하다.

일단 아멜리아의 창을 본 페르디키온은 그 무구가 장인대회 우승 상품이었던 걸 당연히 알아봤다.

그렇다고 페르디키온에게 선물을 안한 것도 아니었고.

“뀨?”

[그럼 왜 저러는 건데?]

물빛 머리가 곤혹스럽게 흔들렸다.

“페르디키온은…… 룬…… 너에게 개인적으로, 혼자만, 따로 바, 받은 게 없……다고. 그래서……실망……한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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