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생각해보니 그랬다.
‘물론 모코지석이라든가, 개인적인 간식 같은 건 주긴 했는데…….’
그건 페르디키온에게만 준 건 아니다.
‘……이런. 저 녀석이 아직 어리다는 걸 잊고 있었어.’
엄청나게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저 나이 때 남자라면, 특히 가장 친하게 아낀 형 동생 하는 사이에 뭐 하나 특별하게 챙겨준 적 없다는 건 서운할 만도 했다.
그리고 흑미 역시 상황을 깨닫고 눈을 데로록 굴렸다.
“으음…… 그럼 흑미도 실수한 거예요?”
결론만 보면 그런 셈이다.
자랑도 그런 자랑이 어디 있겠는가.
하필이면 룬이 손수 만들어 준 따끈따끈한 신상 머리장식이라니.
‘심지어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는데.’
물론 그런 말을 해 봐야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터다.
억울했지만 이건 그냥 운이 나빴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뀨후우우…….”
[……네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히잉…… 어떻게 해요.”
흑미도 괜히 풀이 죽은 눈치로 시무룩하게 발을 동동 굴렀다.
“뀨우.”
[어쩌기는. 방법이야 하나뿐이지 뭐.]
“어, 어쩌……려고, 룬?”
아멜리아의 물음에 이 문제의 당사자인 룬은 도톰한 꼬리를 치켜세웠다.
“뀨뀨우.”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볼게. 너희는 먼저 개통파 공방 쪽에 가 있어.]
그 말에 아멜리아와 흑미가 서로 눈을 맞추었다.
갚아주마.
“지, 진짜…… 괜찮아?”
아멜리아의 말에 룬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뀨욱.”
[물론이지. 괜찮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요즘 과업 수행 준비한다고 힘들었을 녀석인데, 다소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형이라……. 좀 더 신경 써줬어야 했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선물을 준다거나, 아멜리아나 흑미가 달랜다고 쉬이 풀릴 일은 아니었다.
“히잉.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룬 님.”
[응. 그럴게.]
흑미와 아멜리아를 먼저 보낸 룬은 페르디키온이 있을 만한 장소를 가늠해보았다.
‘그나마, 탐지도 못하게 두진 않았군.’
불의 인장을 가진 룬은 같은 불의 인장을 가진 페르디키온이 있는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룬은 즉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슉!
휘이이잉.
그렇게 이동한 곳은 성의 꼭대기.
페르디키온은 지붕 위에 서서 자신의 영토를 오시하고 있었다.
“뀨.”
[형.]
“…….”
휘이잉.
침묵만 자리한 곳에 바람만이 지나갔다.
룬은 잘도 중심을 잡으며 페르디키온의 옆에 다가갔다.
“뀨우.”
[잠깐 이야기 좀 해.]
그러자 묵묵하게 말이 없던 붉은 화룡족 소년이 자리에 앉았다.
“해봐라.”
불퉁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히 가까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사가 있는 지붕이다 보니, 앉을 때 통통한 꼬리가 눌려 묘하게 힘이 들었다.
‘자칫 구를 것처럼 불안하군. 아무래도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게 낫겠는데.’
룬이 마악 변신용 황금팔찌를 꺼내려던 순간.
“쯧.”
혀를 찬 페르디키온이 퉁명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룬을 달랑 들었다.
“?”
졸지에 페르디키온에게 뒷 목을 잡혀 들린 룬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폼만 보면 어미 사자가 새끼 사자의 목덜미를 물어 옮기는 모양새였다.
턱.
바로 옆 자리에 앉힌 페르디키온이 손을 놓았다.
룬은 황당한 기분으로 페르디키온을 올려다보았다.
‘……말로 해도 되잖아.’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위험하게 어딜 올라오나.”
말 내용은 혼내는 듯 했으나 진짜 안 오길 바랐다면 진작 말렸을 터였다.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솔직하지 못한 놈 같으니라고.’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시작은 괜찮았다.
“뀨우.”
[응. 잡아줘서 고마워 형.]
“좋아서 잡아준 거 아니다.”
페르디키온이 투덜거렸지만, 룬은 한 귀로 적당히 흘렸다.
“뀨우우.”
[화났어?]
“화 난 거 아니다. 실망했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냐.
룬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화난 것 같았어.]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한숨을 쉬었다.
“나쁘고 말 것도 없다. 네 녀석에겐 내가 그 정도였을 뿐이라는 걸 확인한 것뿐.”
툭툭 던지는 듯한 말은 조용한 허공에 가벼운 파문을 일으켰다.
“네가 다른 녀석들에게 선물을 챙겨줄 만큼 마음을 써 주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 파문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섭섭함이었다.
페르디키온이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난 늘 사납고, 거칠고, 피를 보기까지 한. 누구도 날 좋아하지 않는 레드 드래곤의 자식이었다. 너와 지내며 그걸 잠시 잊었을 뿐.”
“…….”
룬이 잠시 말이 없자, 페르디키온이 눈을 들어 영토를 바라보았다.
“봐라. 이 영토가 모두 내 것이며, 이제까지 일궈온 내 증거다.”
그 말에 룬 역시 페르디키온의 시선을 따라 드워프 마을을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인 대장간과 공방 굴뚝 연기.
작은 드워프들이 옹기종기, 혹은 홀로 바삐 움직이는 일상이 모여 이루어진, 페르디키온의 영지.
묘하게 탁한 재의 향기 섞인 공기 속에서 페르디키온이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너와 마음을 나눈 형제로 지내고 싶다고.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지를 말아야 했다. 분노와 미움. 저들의 땀과 불. 내게 이것들보다 중요한 게 있을 리 없건만.”
체념과 씁쓸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레어의 주인으로서의 권위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깨달았지. 나는 착각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는 걸.”
룬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이쪽을 절대로 안 보는군.’
룬 역시 시선은 페르디키온이 다스리는 드워프 마을에 두긴 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을 외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봐야했다.
문득, 룬은 예전 일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행복한 향기 상자’를 만들어서 듀라한과 페르디키온에게 실험했을 때를.
그때 페르디키온은 반쯤 취해서 한 말들을.
‘그 때 이 녀석이 나한테 그랬지. 나를 진정한 형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때 페르디키온은 그런 말도 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늘 룬과 나누고 싶었다고. 어쩌면 모두 내어주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비록 취해서 과장하여 말 했겠지만, 그럴 정도로 믿고 있다는 소리였을 터다.
‘그 믿음과 기대를 배반당하는 게 싫었겠군.’
비록 그것이 제 마음이 멋대로 한 기대일지라도 말이다.
퍼즐을 맞춰가다 보니 저절로 답이 떠올랐다.
룬이 페르디키온을 생각보다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겨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고.
‘그럼 문제는 알았고, 이걸 잘 풀 일만 남았는데.’
말을 고르며 룬이 입을 열었다.
“뀨우우.”
[형, 형은 분명히 내게 아주 귀한 존재야.]
“됐다. 거짓말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불의 일족과 힘을 가지고 있는 페르디키온.
그를 제 편 삼아 두면 득이 될 것이란 걸 몰랐던 게 아니니까.
룬 역시,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시작은 그랬지.’
하지만 페르디키온 역시 모르는 게 있었다.
이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룬은 살짝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뀨우.”
[우리 형, 진짜 잘생기고 멋지고. 불의 일족 역사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불을 계승했지. 심지어 이 넓은 영지를 다스리는 최강의 레드 드래곤이 될 해츨링이기까지 해.]
그 말에 페르디키온의 한쪽 입꼬리가 실룩였다.
“아부라면 때려쳐라.”
“뀨우, 뀨우.”
[진심이야. 난 그런 형이라서 친해지고 싶었던 거 맞아.]
그야말로 사심이 가득했지, 뭘.
하지만 룬은 어린 동생이 형의 멋진 점을 좋아해 곁에 두고 싶다는 말이,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가까이 두면 분명 득이 될 거라 생각했어.]
이 이야기가 페르디키온의 마음을 움직일 말이란 걸 안다.
하지만 때론, 머리로 아는 것을 계획적으로 말하는 것 보다 더 설득력 있어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걸 위해, 룬은 하나씩 말을 골랐다.
[나는 말이지, 예상치 못하게 죽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던 적이 있었어.]
룬이 피유우우, 하고 콧숨을 내 쉬었다.
천년 가까이 수련해 온 그 역시, 생각보다 어려웠다.
거짓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건.
[그런데 형이 내 곁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지.]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노한 듯 소리쳤다.
“네가…… 죽긴 왜 죽나!”
“……뀨우.”
[진짜야. 나 진짜로 죽었다 살아났으니까.]
“윽!”
페르디키온이 얹짢은 표정으로 룬을 노려보았다.
‘이건 거짓이 아니야. 비록, 페르디키온이 생각할 진실은 알에서 겨우 태어난 내 모습일지라도.’
거짓이 아닌, 진실이 가진 힘.
룬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집중했다.
하지만 그 말에 페르디키온 내면의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주먹을 꽉 쥔 화룡족 소년이 이를 까득, 갈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너 이 자식. 감히 그딴 헛소리를 내 앞에서 말하는 거냐?”
“뀨.”
[형.]
룬의 시선이 페르디키온을 향했다.
붉은 루비빛 시선.
아마, 룬이 들어온 이 몸의 조상중 누군가가 레드 일족이기에 물려받은 특성이리라.
[형은 감이 좋잖아. 내가 헛소리든, 거짓이든, 형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어. 그렇지?]
어린 아이가 조곤조곤 타이르듯 말하는 것이 묘하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페르디키온은 룬의 말에서 어떤 모순도 찾지 못했다.
묘한 낭패감 어린 눈으로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거짓이 아니란 건 안다.”
알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사실상 죽어있었다는 건, 페르디키온 역시 잘 알고 있던 일.
부정 할 수 없었다.
‘됐어.’
룬은 흐름이 생각대로 흐르고 있음을 직감하며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형은 나도 모르게 내가 기댈 수 있다고 여긴 게 섭섭한 기분을 느끼게 했을 거 같아서.]
“그건.”
페르디키온이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멜리아, 그리고 흑미. 이 둘과 형은 좀 달라. 형은 왠지 의지가 되거든.]
이야기하며 룬 역시 깨달았다.
옆에 있는 녀석을 나름대로 대등한 동료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페르디키온이 투덜거리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군…… 생각지 못했다.”
“뀨우우우.”
[제대로 전하지 못한 내 탓도 있지, 뭐.]
솔직히 말해, 룬 역시 제 부족한 부분을 꺼내 말하는 게 영 어색했다.
진짜 어리기라도 하면 말이나 안 하지.
여기 모인 누구보다도 나이도 많고, 어른으로 살아본 주제에 실수를 했다고 어린 녀석에게 고백하는 게 민망치 않을 리 없었다.
[내가 좀 더 형에게 고마움이나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표현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네.]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끙, 하고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 뭐냐, 결국 네 말은…… 유일하게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 아니냐.”
“뀨.”
[뭐 그렇지.]
“크리스티나 님이 아니고?”
[아, 크리스티나와는 좀 다른 의미지. 크리스티나는 뭐랄까. 부모님 대신 같은 느낌이라.]
후견룡이란 게 그렇지 뭐, 라고 덧붙이려는데 페르디키온이 뭔가 깨달은 얼굴로 굳어있었다.
“하! 룬.”
터억!
페르디키온의 팔이 룬의 목을 훅 감아당겼다.
그리고는, 뿔이 난 부분을 교묘하게 피해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어 꽉꽉 눌러왔다.
“넌 아주 못된 놈이다, 룬.”
“뀨우아아악!”
[으악! 아프다고!]
농담이 아니라 정말 아팠다.
힘이 무식하게 쎈 놈이 진심으로 주먹을 쥐고 머리뼈를 누르는데, 깨액 하고 죽는 소리를 내고 싶을 지경이다.
페르디키온은 룬이 정말 아파서 버둥거리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야 팔을 풀었다.
“해츨링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아주 타고났군.”
“뀨으으으…….”
[그럴 일 없다만…….]
무척 억울해보이는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올려다 보자, 붉은 머리의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둔한 놈 같으니.’라고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룬은 억울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분은 확실히 풀려보인다는 건데…….’
“뀨흐으윽.”
룬은 앞발로 얼얼한 머리를 문질렀다.
페르디키온이 괘씸할 정도로 욱신거렸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늘 혼자였던 녀석이니, 그나마 대등하게 대한 게 나 하나였을 텐데.’
그간 무심하게 군 대가라 생각하며 아픔을 참자니, 페르디키온이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났다.
그는 모코지석을 꺼내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딴 녀석들은 이미 개통파 공방에 도착했다는군. 그만 가자, 룬.”
“?”
주둥이가 살짝 벌어진 룬이 고개를 들어보자, 표정만 보면 좀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페르디키온이 한 번 더 종용했다.
“꽤나 기다린 듯하니, 내가 이동마법을 쓰겠다. 자.”
룬은 혹까지 나기 시작한 머리에서 여전히 발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그 손을 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넘어가 준다, 내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룬이 앞 발 하나를 슥 내밀었다.
통통하고 적당한 길이의, 그립감 좋아보이는 앞 발.
페르디키온은 그걸 잡고 단숨에 공간이동 마법진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