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들만의 무도회2022.02.07.
“오랜만이야, 아델.”
“……!”
놀란 아델이 고개를 들자 그가 조용히 눈웃음쳤다. 그러자 빙하처럼 차갑던 눈동자가 금방 따스하게 반짝이며 녹는 것 같았다. 이건 그녀가 알던 진짜 크리스틴의 눈빛. 귓불에 닿을 듯 그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자, 왼발부터 가는 거야.”
“핫!”
뜨거운 입김이 간지러워 아델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곧 그가 끌어당기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날 듯이 가볍게 홀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곧 다른 이들도 짝을 지어 주위에 모여들었다.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무도곡에 홀 안은 금방 흥겨워졌다.
“이제는 발을 안 밟고 춤출 수 있어. 모두 당신 덕분이야, 아델.”
“크리스…….”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
그녀의 말을 자르듯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물론 예전처럼 크리스라고 불러도 돼. 당신이니까 특별히 허락하지.”
아델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넋이 나가 그를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왼발부터 가는 거야. 크리스. 하나둘, 하나둘…….”
“꼭 해야 해? 이런 건 귀족 나부랭이들이나 하는 거라고.”
“그래서 하기 싫다고?”
“누가 싫댔어? 귀찮다는 거지.”
“아야! 너 지금 일부러 발 밟았지?”
“미안. 고의는 아니고 실수.”
“하나둘…… 야아, 또!”
“하핫, 이번엔 실수 아니고 고의!”
“야! 크리스!”
어른들이 없는 시간이면 그들만의 무도회장이 되곤 했었던 낡은 헛간. 오래된 건초 냄새와 장난스럽던 소년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리고 10년. 그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은 건 아델 혼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무도곡에 맞춰 춤을 추는 크리스틴은 그때의 예쁘장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더 컸고, 날렵한 몸은 돌처럼 단단했다. 낮고 굵은 목소리와 매력적으로 튀어나온 목울대는 완전히 다른 성별임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놀랍도록 완벽하게 춤을 췄다.
“무슨 생각해?”
그가 지그시 바라보자 아델은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춤은 너무 오랜만이라.”
대답하는 아델의 귓불이 빨개졌다. 혹시라도 그가 알아차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얼굴까지 달아오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리드할 테니 나만 따라와.”
“으응.”
아델은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하나둘, 하나둘……. 그가 몸을 돌리면 돌아섰다가, 팔을 뻗어 허리를 휘감으면 낭창하게 품에 안겼다. 그때마다 상복 같던 드레스 자락이 잘록한 허리 아래서 활짝 펴졌다가, 몸의 굴곡을 따라 휘감기곤 했다. 이상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델은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 예상할 수 있었다. 하나둘, 하나둘……. 어느새 두 사람의 호흡이 똑같이 빠르고 가빠졌다.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 따윈 아델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어느새 낡은 헛간으로 돌아갔고, 그녀의 앞에는 오직 크리스틴뿐이었다. 아델은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언제였더라?
*** 며칠 후.
“그 정도로 한숨을 쉬어서 땅이 꺼지겠어?”
벽난로 앞에 있던 아델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미아가 쯧쯧 혀를 차며 내려다보았다. 밖에 눈이 오는지 미아의 모자와 외투 위에 제법 쌓여 있었다.
“미아! 깜짝 놀랐잖아. 왔으면 기척 좀 하지.”
“몇 번을 불렀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사람이 오는 것도 몰라?”
미아는 외투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자연스럽게 벽에 걸었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난로가 다 꺼져가는 것도 모르고.”
그런 행동들은 마치 제집처럼 자연스러웠다. 미아는 아델의 이웃에 사는 남작 부인이었다. 귀족의 작위만 있을 뿐, 재산도, 영향력도 없는 가문이라 평민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후작 가에서 쫓겨난 아델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번에 상복 같은 드레스를 완성하는 데는 그녀의 공도 컸다.
“생각은 무슨. 차 마실래?”
아델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미아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됐으니까 일단 앉아봐.”
아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미아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해댔다.
“황제 폐하의 연회는 잘 다녀왔고?”
“응.”
“선물은?”
“다들 맛있게 나눠 먹었어.”
“세이라 그 계집애는?”
아델은 그제야 그날 연회장에 세이라도 함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늘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아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여자. 크리스틴과 만남이 너무 강렬해서 세이라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세이라…….”
“올해는 세이라도 덜 괴롭혔나 보네.”
“그러게.”
흠……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미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아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 문제 없는데.”
미아는 믿지 않았다. 조금 전 거실에 들어오며 말을 걸어도 까맣게 모른 체 한숨만 내쉬고 있었으니까.
“아닌데. 문제 있는데.”
해마다 황제의 생일 연회에 다녀오고 나면 아델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쿠키와 빵을 만든다며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상처받은 걸 숨기려고 일부러 쾌활한 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반응은 뭐지?’
뭔가 큰 걱정거리라도 생긴 걸까? 눈을 가늘게 뜨며 요리조리 살피는데, 아델이 미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정말이야.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안심해, 미아. 폐하께서 내가 만든 쿠키도 맛있게 잘 드셨고, 세이라도 잠잠했어. 이번 연회는 정말 즐거웠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넋 놓고 한숨을 쉬어?”
“내가?”
“그건 분명 둘 중 하나거든. 큰 걱정이 있거나, 사랑에 빠졌거나. 하지만 네가 사랑에 빠졌을 리는…….”
“미아, 우리 차 마시자! 마침 맛있는 홍차가 있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델의 뺨이 어느새 발그레했다. 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델! 너 진짜 사랑에 빠진 거야?”
“미쳤어? 내 주제에 무슨 사랑을…….”
아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젓자, 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 사람은 아니지?”
“그 사람?”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
“……!”
하마터면 아델은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 미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너까지?”
“나까지라니?”
“이번 연회에 바이스 백작이 나타났다며. 그리고 저세상 미모로 연회장을 초토화시켰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런데 너까지 꽂혔을 줄이야…….”
“아니야, 그런 거!”
아델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라면 다행이고.”
“당연하지!”
하지만 미아는 믿지 않았다. 아델이 보기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궁금했다. 제국의 영웅에 대부호인 바이스 백작은 많은 사람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미친 미모의 소유자라는 얘기는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라면 끔찍해 하는 아델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정도면……. 진짜 사기 캐릭터 아닌가?
‘하기야 그러니 황제도 눈독을 들일 수밖에.’
미아는 안쓰러운 친구를 향해 진심으로 충고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바이스 백작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중이면 빨리 접어. 그는 곧 부마가 될 사람이니까.”
“부마?”
아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문엔 곧 후작에 봉해지고, 황녀와 약혼 할 거래. 결혼할 때쯤엔 공작이 되어 있겠지.”
미아의 남편은 황실의 문서 출납을 맡고 있었다. 하급 관리이긴 했지만, 덕분에 그녀도 황실의 돌아가는 상황에 밝았다. 미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그러니까 에이프릴 황녀님과 결혼한다는 거야?”
“그래, 황태자가 아직 어리니 폐하에겐 든든한 사위가 필요하겠지. 원로회를 상대하려면.”
칼라임 제국에는 다섯 개의 명문가로 이루어진 ‘귀족 원로회’가 있었다. 황후는 대부분 그 원로회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황후는 좋은 집안의 출신도 아니었고, 황제는 원로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게다가 후계자인 황태자는 아직 어린아이. 이런 황제에겐 확실한 오른팔이 되어 줄 든든한 부마가 필요했다. 원로회 가문 사람이 아니면서, 원로회와 맞설 힘을 가진 젊고 유능한 귀족!
‘정말 대단해, 크리스.’
아델은 크리스틴이 자랑스러웠다. 광부의 아들에서 백작이 된 것도 엄청난 일인데 황제의 부마라니.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허전해지는 걸까?
“아델 너…… 괜찮은 거지?”
미아가 아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마치 좋아하는 남자의 결혼 소식이라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안 괜찮을 일이 뭐야?”
아델은 방긋 웃으며 팔을 걷어 올렸다.
“안 되겠다. 배고픈데 우리 뭐 좀 만들어 먹자. 빵이 좋을까? 파이가 좋을까? 넉넉하게 만들어서 사람들도 좀 나눠주고!”
그녀가 씩씩하게 부엌으로 향할 때였다.
“손님이에요, 손님!”
장을 봐서 돌아오던 타냐가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왔다. 타냐는 아델이 오스월드 가에서 쫓겨날 때 함께 따라서 온 하녀였다. 아델의 유일한 하녀였지만, 이젠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손님이라니?”
타냐의 장바구니를 받아들며 아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를 찾아올 손님이라면 오스월드 가에서 보낸 이들이거나, 남편을 독살한 악녀라며 해코지를 하러 온 사람들 정도였다. 결코, 반가운 손님이 올 리 없었다.
“누군진 몰라요. 엄청 큰 마차가 뒤따라 오는 걸 보고 막 뛰어왔으니까. 이제 어쩌죠?”
“걱정 마. 이상한 놈이면 내가 때려서라도 내쫓아 줄 테니까.”
미아가 벽난로 앞의 부지깽이를 용맹하게 움켜쥐었다.
“그럼 전 이걸 던져서 머리통을 맞출게요!”
타냐도 장바구니에서 주먹만 한 감자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은 조용히 웃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독이 든 차를 먹여버리면 끝날 일이니까.”
헐. 미아와 타냐가 황당해했다. 가뜩이나 독살 전문가라는 누명을 쓰고 있으면서 농담이라도 그런 말이 나오나 싶었다. 히이잉! 그 무렵 작은 저택 정원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아가 창가로 달려가 얼른 커튼을 젖혔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정원 앞에 크고 고급스러운 마차가 서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가문의 문장…….”
중얼거리던 미아는 곧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델, 널 해코지하러 온 사람이 분명해!”
“누군데?”
창백해진 아델을 보며 미아가 얼른 덧붙였다.
“저런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프러포즈한다면 분명 심장마비로 죽을 테니까.”
“뭐?”
마차의 문이 열리고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을 안은 사람들이 줄줄이 내렸다. 하지만 미아의 넋이 나간 이유는 그 꽃다발 속에 서 있는 남자가 꽃보다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
“추울 텐데 차부터 마셔.”
아델은 타냐가 준비해 준 따뜻한 홍차를 내밀었다. 지금 집 안에는 그녀와 크리스틴, 둘 뿐이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미아가 타냐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홍차 따위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그날은 왜 그냥 사라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