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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누가 봐도 하트 시그널? (3/155)

3화. 누가 봐도 하트 시그널?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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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60079404.jpg“그날은 왜 그냥 사라졌지?”

그날, 함께 춤을 추고 난 후 아델은 도망치듯 연회장을 떠났다. 춤을 추는 동안은 몰랐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사람이 자신과 크리스틴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아델은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에게 두근거린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으니까.

16548760079409.jpg“돈과 지위를 노려 늙은 후작과 결혼하고, 남편을 독살한 악녀 주제에 감히!”

  그런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16548760079404.jpg“원래 폐하께 선물만 전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어. 넌 연회에 처음 참석했으니 사람들과 인사하느라 바쁠 것 같아서 얘기 안 하고 그냥 왔어. 서운했다면 미안.”

16548760079404.jpg“하, 미안?”

크리스틴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서늘했다. 그날 춤이 끝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가와 말을 거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그 사이 아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이상하게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넌 그렇게 멋대로 도망치는 게 특기였지.

16548760079404.jpg“그거 말고 나한테 할 얘기는 더 없어?”

크리스틴이 물었다. 아델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정말로 정신없이 털어놓고 싶은 얘기들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는 곧 황제의 부마가 될 텐데. 자신 같은 사람과 얽혀봐야 좋을 게 없었다.

16548760079404.jpg“아저씨는 잘 지내시지? 그때 다치신 다리는…….”

크리스틴은 가라앉은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60079404.jpg“잘 지내셔.”

16548760079404.jpg“다행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아델과 어머니는 크리스틴을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었다. 아들을 찾으러 두 모녀의 집에 자주 들르곤 했던 그의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정식으로 재혼을 선언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아델의 어머니가 죽었다. 숲에서 들짐승에게 물린 끔찍한 사고. 그 짐승을 잡으러 갔던 크리스틴의 아버지까지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다리를 다쳤다. 그런 아버지와 크리스틴을 두고 아델은 귀족인 생부에게로 가버린 것이다. 울면서 앞을 막아서는 그를 매정하게 뒤로 한 채. 어머니가 없으니 더이상 지저분한 광산 마을에서 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앞으로는 귀족이 되어 화려하게 살 거라며. 불행하게도 그 바람대로 된 것 같지는 못했지만.

16548760079404.jpg“당신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16548760079404.jpg“나도 잘 지냈지.”

그녀는 웃었지만, 녹색 눈동자는 깊은 우물처럼 어둡고 음울했다. 예전의 밝고 사랑스럽던 눈이 아니었다.

16548760079404.jpg“그래, 아주 자.알. 지낸 것처럼 보이네. 그렇게 귀족이 되고 싶어 하더니.”

크리스틴은 부관인 짐머의 보고를 떠올리며 비아냥거렸다.

16548760079404.jpg“돌아가신 오스월드 후작과 결혼할 때부터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18세 소녀가 아버지뻘의 후작과 결혼했으니.”

  *** 연회장에서 돌아온 후 크리스틴은 아델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던 것이다.

16548760079404.jpg“18세에 아버지뻘의 후작과?”

16548760079404.jpg“예, 재산과 신분 상승을 노린 결혼이라는 얘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16548760079404.jpg“둘 중 무엇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던데?”

연회장에서 아델은 누가 봐도 남루한 차림이었다. 몸에는 그 흔한 보석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상황이 나쁘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16548760079404.jpg“그게…… 결혼 2년 만에 남편을 독살한 죄로 쫓겨났답니다.”

크리스틴은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가 남편을 죽이다니……. 놀잇감이 마땅치 않았던 광산 마을의 아이들은 곤충을 잡아서 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아델은 아이들이 잡은 곤충을 놓아주어서 욕을 먹고는 했다. 그러면 크리스틴은 그 아이들에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아델을 욕하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델은 이제 제국 최고의 악녀라며 욕이란 욕은 전부 먹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크리스틴은 아델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생각은 없었다. 10년 전 그가 알던 아델은 이제 없었으니까.

16548760079404.jpg“더 자세히 말해봐.”

16548760079404.jpg“물론 정확한 증거가 없어서 오스월드 가에선 추방하는 거로 마무리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린힐 외곽의 작은 저택에서 사는 모양입니다.”

16548760079404.jpg“그래서 부관의 생각은?”

16548760079404.jpg“네?”

짐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6548760079404.jpg“증거가 없다고 가주의 살인자를 그냥 놓아줘? 그것도 오스월드 정도 되는 가문에서?”

아델을 믿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의심스럽긴 했다.

16548760079404.jpg“그게…… 후작의 아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도…….”

대답하던 짐머는 크리스틴의 서늘한 표정을 보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16548760079404.jpg“좀 더 보충해서 보고하겠습니다.”

크리스틴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16548760079404.jpg“됐으니, 마차를 대기시켜. 지금 그린힐 외곽으로 간다.”

16548760079404.jpg“설마 후작 부인에게 가시려고요?”

16548760079404.jpg“뭐 문제 있나?”

짐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는 얼음 마왕으로 불리는 바이스 백작이었다. 지금껏 엄청난 미인에 좋은 조건의 여자들이 유혹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사내. 오직 전투에만 미친 것처럼 보이는 전쟁광. 그런 그가 후작 부인에게 춤을 신청한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에 대해 알아보게 하고 친히 방문까지 한다면……. 이건 누가 봐도 하트 시그널!

16548760079404.jpg‘그래도 그렇지 하필 평판도 꺼림칙한 과부라니.’

짐머는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존경하는 주군의 마음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가 어디라도 마음 둘 곳을 찾았다는 건 좋은 징조였으니까.

16548760079404.jpg“첫 방문이면……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러나 곧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16548760079404.jpg“좋을 대로.”

16548760079404.jpg“예, 저만 믿으십시오!”

  *** 짐머가 준비한 선물은 결국 꽃 가게 하나를 통째로 털어오는 것이었나보다.

16548760079404.jpg“꽃이 정말 많다!”

아델은 집에 있는 모든 화병을 꺼내 엄청난 양의 꽃다발들을 나눠 꽂으며 감탄했다. 그녀가 사는 집은 낡고 작은 2층 저택이었다. 계단 입구를 커튼으로 가려놓은 걸 보면 그나마 2층은 쓰지 않는 것 같았다. 1층은 벽난로를 중심으로 안락의자와 장미색 소파가 놓여 있었다. 벽난로 옆에는 방으로 들어가는 좁은 복도가 보였고, 복도 입구에 부엌 겸 식당이 있었다. 낡기도 낡았지만 구조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고 초라한 내부였다.

16548760079404.jpg“그래, 이쯤이 좋겠네.”

아델은 꽃 화병들을 곳곳에 놓아두었다.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던 크리스틴이 결국 한마디 했다.

16548760079404.jpg“정신 사납군. 전부 갖다버리는 게 낫겠어.”

좁은 집 안에 알록달록 화려한 꽃장식을 해놓고 나니 꼭 집시들의 소굴 같았다.

16548760079404.jpg“그러게. 좀 정신 사납긴 하지?”

크리스틴이 인상을 쓰자 아델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16548760079404.jpg“미안. 내가 원래 마음에 없는 말은 잘 못 하잖아. 겨울이라서 가뜩이나 비쌀 텐데 괜히 돈만 낭비했다.”

16548760079404.jpg“참고하지. 다음에 올 땐 필요한 걸 사 오는 거로. 필요한 게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지만.”

크리스틴은 남루한 그녀의 집 안을 둘러보며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말이 저택이지, 이건 평민들의 집보다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아델은 그의 업신여기는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16548760079404.jpg“다음에라고?”

그 말에 더 당황한 것 같았다.

16548760079404.jpg“왜, 앞으로 다시는 오지 마?”

16548760079404.jpg“그건 아니지만. 보는 사람들 눈도 있고, 여긴 워낙 좁은 동네라…….”

크리스틴이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16548760079404.jpg“뭐가 문제지?”

16548760079404.jpg“어?”

16548760079404.jpg“당신은 지금 남편도 없잖아. 과부가 남자를 만나는 게 흉인가?”

아델이 쏘아보았다.

16548760079404.jpg“무슨 소리야. 나한테 너 남자 아니야. 그냥 동생 같은…….”

16548760079404.jpg“그렇다면 더 문제 될 거 없잖아?”

그러더니 크리스틴이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16548760079404.jpg“……!”

깜짝 놀란 아델은 뒤로 물러나다가 소파에 다리가 걸려 휘청거렸다. 그가 얼른 어깨를 잡아주었다.

16548760079404.jpg“왜 그렇게 놀라?”

16548760079404.jpg“그, 그야 네가 갑자기 다가오니까.”

16548760079404.jpg“그래서 이상한 생각이라도 했어?”

16548760079404.jpg“이상한 생각이라니?”

아델은 황당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실은 심장 박동이 자꾸 빨라지고 있었다.

16548760079404.jpg‘너무 가까워!’

좁은 집 안을 가득 채운 꽃향기 사이로 그의 체취가 맡아졌다. 서늘한 숲의 내음처럼 시원하고, 비밀스러운……. 어딘가 사람을 홀릴 것만 같은 향기. 연회장에서 돌아온 후 계속 그녀의 몸에서 나던 그 향기였다. 그날 밤 침실까지 침범해 들어와 잠을 설치게 만들던 낯선 남자의 체취. 그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점점 숨이 막혔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16548760079404.jpg“시선 피하지 마.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운하게.”

그는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것처럼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청회색 눈동자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아델은 이대로 그곳에 갇혀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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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그의 얼굴에 손을 올리고, 쭈욱! 양 뺨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뺨을 잡아 흔들기까지 했다.

16548760079404.jpg“장난 그만해, 크리스.”

그가 사납게 노려보자 얼른 손을 뗐지만, 확실하게 말해두었다.

16548760079404.jpg“너는 정말 내 친동생이나 다름없어. 예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지고, 남자다워지긴 했지만, 아직도 내 눈엔 내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그 어린 꼬맹이라고.”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은 뇌 정지가 오는 모양이다. 크리스틴은 입을 벌린 채 한동안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강아지? 어린 꼬맹이? 졸졸 쫓아다녀? 그 모든 단어가 설마 지금 나를 지칭하는 말? 하지만 아델은 크리스틴의 심기가 사나운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16548760079404.jpg“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네가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달콤한 쿠키와 빵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리고 애플파이라면 환장을 하던 그 꼬맹…….”

16548760079404.jpg“그만.”

순간 그가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제국의 여인들을 안달 나게 만들던 그 입술이 금방이라도 아델의 입술에 닿을 것만 같았다.

16548760079404.jpg“크, 크리스……!”

아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16548760079404.jpg“그럼 이것도 기억하겠군. 당신, 첫 키스 상대가 누구였는지.”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간질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닿아…….

16548760079404.jpg“흡!”

동시에 아델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16548760079404.jpg“무슨 짓이야!”

16548760079404.jpg“잊었어? 친동생 같은 내게 먼저 키스했던 게 당신이었다는 거.”

아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16548760079404.jpg“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 안 했거든!”

16548760079404.jpg“그럼 키스했다는 건 인정하는 건가?”

16548760079404.jpg“아니, 그건 키스 아니었어! 그게 어떻게 키스야!”

그 뒤로도 그녀는 계속 변명하듯 말했다.

16548760079404.jpg“네가 물에 빠져서 숨을 안 쉬니까, 겁이 나서 인공호흡을 한 거였다고.”

16548760079404.jpg“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텐데?”

16548760079404.jpg“그러다 겨우 숨을 쉬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 너무 기뻐서 입을 맞춘 거였잖아! 결코, 키스 같은 거 아니었다고! 그땐 둘 다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 일이…….”

16548760079404.jpg“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지지?”

횡설수설 변명하던 아델이 사납게 흘겨보았다.

16548760079404.jpg“얼굴 빨개진 적 없어!”

16548760079404.jpg“잘 익은 토마토가 따로 없군. 거울 보여줘?”

16548760079404.jpg“됐어! 네 눈이 잘 못 된 거야.”

16548760079404.jpg“내 눈은 멀쩡해. 시력도 아주 훌륭하고.”

16548760079404.jpg“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16548760079404.jpg“빌어먹을, 우기기 대장!”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풋, 아델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재밌냐는 듯 크리스틴이 쏘아보는데, 그녀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16548760079404.jpg“진짜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 말.”

16548760079404.jpg“무슨 말?”

그렇게 묻는 크리스틴은 꼭 심술 난 소년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보아왔던, 아델에게는 매우 익숙한 얼굴. 그제야 아델은 뭔가 안심이 되었다. 이 근사한 남자가 정말 자신이 알던 그 소년이 맞는 것 같아서.

16548760079404.jpg“너 항상 나한테 그랬잖아. 우기기 대장이라고. 그때 그 말을 하던 표정이랑 하나도 안 변했네.”

그녀는 그에 대해 정말 많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다 잊고 살았을 줄 알았는데. 자기만 혼자 잘 살겠다고 떠나가놓고선…….

16548760079404.jpg“당신도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우기는 성격은 변한 게 없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델은 불꽃이 사그라드는 벽난로에 다시 장작을 넣었다.

16548760079404.jpg“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뻐, 크리스. 그런데 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 나하고 얽혀서 좋을 게 없으니까.”

타닥. 타닥. 새 장작을 집어삼킨 불꽃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래, 이걸로 끝. 아델은 씁쓸하지만,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16548760079404.jpg“왜, 당신이 남편을 독살한 여자라서?”

아델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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