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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첫 키스였어 (4/155)

4화. 첫 키스였어!202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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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60270374.jpg“왜, 당신이 남편을 독살한 여자라서?”

아델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이미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문. 하지만 크리스틴만은 몰랐으면 했다. 그에게는 오래전 그 기억 속의 소녀로 남고 싶었으니까. 하긴 무리겠지?

16548760270374.jpg“상관없어, 난. 당신이 정말 남편을 독살했든, 누명을 썼든.”

크리스틴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48760270374.jpg“크리스…….”

16548760270374.jpg“그건 지금 당신의 평판 따위가 내 평판을 좌우할 수 없다는 의미야.”

그 순간 크리스틴의 눈빛이 얼마나 거만했는지 몰랐다. 마치 원래부터 고귀한 귀족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녀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신분의 사람인 것만 같았다. 광부의 아들 크리스틴. 돌봐줄 엄마가 없어서 굶주린 얼굴로 온 마을을 떠돌던 천덕꾸러기 소년. 그 기억은 마치 아델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았다.

16548760270374.jpg“그런데 넌…… 어떻게 귀족이 된 거야?”

아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48760270374.jpg“황제에게 영광을 안겨줬으니까.”

오만하게 대답한 그는 단숨에 찻잔을 비우며 화제를 돌렸다.

16548760270374.jpg“그런데 손님 대접은 이게 전부인가?”

16548760270374.jpg“어?”

16548760270374.jpg“설마 이, 쓰고 떫은 물만 마시고 가라는 건 아니지?”

16548760270374.jpg“그거 비싼 홍차인데…….”

16548760270374.jpg“10년 만에 만났는데 식사 대접 같은 건 안 해?”

16548760270374.jpg“갑자기 온 게 누군데. 지금은 마땅히 먹을 것도 없고…….”

16548760270374.jpg“난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걱정 마. 식사를 제대로 못 했더니 배고파 죽기 직전이거든.”

16548760270374.jpg“뭐 하느라 식사도 못 했어.”

그가 배고프다는 말에 아델은 금방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저 여자는 오래전부터 그랬다. 배고파하는 그를 유일하게 걱정해주던 사람. 덕분에 크리스틴은 한때 자신의 전부를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랬었는데.

16548760270374.jpg“황제의 수다를 들어주느라 먹을 틈이 없었어. 식사 초대를 가장한 일종의 고문이었거든.”

크리스틴은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16548760270374.jpg“그럼 잠시만 기다려. 뭐라도 있나 찾아볼게.”

16548760270374.jpg“고마워 아델, 당신밖에 없군.”

그가 가늘게 눈웃음을 치자,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눈동자 위로 은빛 속눈썹이 빛났다. 아델은 예전부터 그의 눈웃음에 약했다. 홀린 것처럼 도움을 주고 싶게 만드는 눈이었으니까. 어쩌면 크리스틴도 그걸 잘 알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십분 활용하는 걸지도. 하지만 아델은 부엌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기로 했다.

16548760270374.jpg“대신 이건 분명히 해둬! 그날 그거 키스 아니었어. 그리고 절대로 내가 먼저 한 거 아니었다고!”

그러고는 크리스틴이 어떤 반박도 할 수 없게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탁! 생각보다 뒤끝 있는 그녀였다. *** 문을 닫은 아델은 식탁 앞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16548760270374.jpg“하아…….”

지금껏 참았던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16548760270374.jpg‘대체 뭐야. 크리스…….’

너무 혼란스러웠다.

16548760270374.jpg‘다 잊고 살려고 했는데.’

광산 마을에서의 삶도, 그를 떠나온 일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아득히 먼 전생의 일처럼 묻어두려고 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행복했으며, 사랑스러웠다고 그렇게 기억하려고만 했는데…….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왜곡된 기억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기억 속의 예쁜 소년이 아닌 위험한 남자가 되어서. 그의 눈빛, 숨소리, 체취를 느낄 때마다 아델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조금 전 그와 입술이 닿을 뻔한 순간에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뒤로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랐다.

16548760270374.jpg“미쳤어……!”

아델은 도리질을 치며 마음을 부정했다. 그래, 그저 오랜만이라 반갑고, 어색하니까 숨이 막힌 것뿐이야. 누구라도 그렇게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지면 두근거리는 건 당연하지.

16548760270374.jpg‘그래, 그것뿐이야. 어떻게 그에게…… 염치도 없이 내가 어떻게…….’

  ***

16548760270374.jpg“따뜻하군.”

빈 거실을 둘러보며 크리스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 벽난로가 시뻘건 불길을 뿜어내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누추하기 그지없는 낡고 좁은 집. 그러나 그에게는 왠지 익숙했다. 길고 좁은 창가엔 자수가 놓인 리넨 커튼이 드리워졌고, 콘솔 위는 손뜨개 레이스로 덮여 있었다. 벽난로 위엔 양초와 작은 액자들이 아기자기했고, 겨울인데도 구석마다 초록 식물들이 싱그럽게 자랐다.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그가 가져온 꽃들도 나름 어울리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전 그녀가 살았던 집 같았다. 고소하고 달큼한 빵과 쿠키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던 그곳.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찾아가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던 아델과 그녀의 어머니. 10년이란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앞치마를 두른 아델의 어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이를 들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아델은 쓰기 공부를 다 끝낼 때까지 파이엔 눈길도 주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마침 크리스틴을 데리러 온 아버지는 자기를 닮아서 머리가 나쁘니 살살 가르치라며 편을 드는 척 약을 올렸었고. 젠장……! 제법 가족 같은 모양새를 갖추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짧았던 행복. 그럼에도 그는 오랫동안 아델이 살던 그 집을 그리워했었나 보다. 이제는 다 부질없는 과거였는데도.  

16548760270374.jpg“오스월드 전대 후작 부인의 초상화네.”

  *** 송년 연회에 참석하기 직전이었다. 그를 호출한 황제는 작은 초상화 한 장을 내밀었다. 긴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녹색 눈동자의 여인. 초상화 속 여인은 수수한 차림이었음에도 눈길을 끌만큼 아름답고 우아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그 초상화를 넋 놓고 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16548760270374.jpg“이 여자가 정말 죽은 후작의 미망인입니까?”

16548760270374.jpg“그래, 혹시 아는 사람인가?”

얼마 전까지 전쟁터에서 살아온 크리스틴이었다. 귀족의 작위만 있을 뿐 다른 귀족들과 친분도, 귀족 세계에게 관심도 없던 그였다. 아델에 대한 마음을 끊기 위해 어쩌면 일부러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16548760270374.jpg“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어렸을 때 저를 돌봐주신 분의 따님이었습니다.”

16548760270374.jpg“잘 됐군. 그럼 이번 연회에 참석해서 다시 친해져 보도록 해.”

16548760270374.jpg“이유가 뭡니까?”

16548760270374.jpg“그 여자가 죽은 후작의 문서를 갖고 있을지 모르거든.”

16548760270374.jpg“후작의 문서요?”

16548760270374.jpg“그냥 백지 문서네. 내 사인이 담긴. 후작이 죽은 후 사라졌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더군.”

크리스틴은 황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스월드 후작이 죽은 지 8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냥 백지 문서를 지금까지 찾는다고? 황제에겐 대단히 중요한 문서가 분명했다.

16548760270374.jpg“접근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16548760270374.jpg“친하게 지내는 건 좋지만, 에이프릴이 속상할 일을 만들면 안 되네.”

16548760270374.jpg“…….”

16548760270374.jpg“이런, 내 주문이 너무 까다로웠나?”

16548760270374.jpg“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황제는 호탕하게 웃다가 돌연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16548760270374.jpg“자네는 이미 내 식구나 다름없네. 알지?”

황제는 오래전부터 크리스틴을 부마로 생각하고 있다는 속내를 비쳐 왔었다. 에이프릴을 미끼로 그를 확실한 제 사람으로 두고 싶은 것이다. 물론 크리스틴에겐 매력적이지 않은 미끼였지만.

16548760270374.jpg“폐하는 제 주군이십니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애매한 대답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 아델은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나왔다.

16548760270374.jpg“식사 준비 다 됐어, 크리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16548760270374.jpg“크리스…….”

다가가던 아델은 멈칫하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긴 두 다리는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마치 제집처럼 아주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아델은 그가 잠든 소파 아래 주저앉아 조용히 바라보았다.

16548760270374.jpg‘자는 모습은 그때랑 똑같네.’

그때보다 키도 훨씬 커지고, 체격도 단단해졌고, 심지어 목소리까지 변했는데도 잠든 얼굴은 오래전의 앳된 소년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17살이 되도록 변성기도 오지 않았던 남자아이. 그 또래 대부분 아이는 거의 성인과 다름없이 성장했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한 살 많은 아델과 키도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놀리지는 못했다. 여자보다 더 예쁜 크리스틴이었지만 아무도 그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으니까. 그는 몸놀림이 재빨랐고, 호리호리한 체구에 힘도 셌다.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떨 땐 사나운 맹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더니 결국 전쟁터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근사한 모습으로 변했다. 남자아이가 아닌 남자……. 잠든 그를 바라보던 아델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불씨가 가물거리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타냐가 돌아오면 장작이 부족하다며 울상을 지을 게 분명했다. 장작을 아끼느라 겨울에는 2층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당분간 좀 춥게 지내더라도 그가 따듯한 곳에서 잠들게 해주고 싶었다. 타닥. 타닥…….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렸다. 점점 눈발이 굵어지고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17세가 된 크리스틴은 얼마 전부터 광산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 점심을 갖다 줄 생각으로 아델은 마음이 급했다. 엄마의 빵 가게에 주문이 밀려들어서 도와주다가 너무 늦은 것이다. 그래서 지름길인 가르덴 호수를 가로지르기로 했다. 겨울이 끝날 무렵이라 빙판이 녹아 있었지만 쌓인 눈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다. 호수 중앙쯤 갔을 때였다. 걸음을 옮기는 순간, 발아래가 비스킷처럼 부서지며 몸이 쑥 빠져버렸다. 한겨울의 호수는 늪처럼 그녀를 빨아들였다.

1654876041704.jpg“아델!”

마침 그녀를 마중 나왔던 크리스틴이 보고 물에 뛰어들었다. 그게 그녀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뭍에 나와 있었다. 옆에는 흠뻑 젖은 크리스틴이 누워 있었는데 시체처럼 파리하고 창백했다. 그리고 숨을 쉬지 않았다.

1654876041704.jpg“크리스! 크리스! 눈 떠 봐!”

놀란 아델은 그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미친 듯이 인공호흡을 했다. 다행히 그가 겨우 숨을 쉬었다. 그 순간 아델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크게 소리 내 울어버렸다.

1654876041704.jpg“으아아앙!”

1654876041704.jpg“왜 울어?”

크리스틴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늘 누나인 체하며 어른스러운 척은 혼자 다 하던 그녀였으니까.

1654876041704.jpg“어으흐흑! 어엉! 너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으흑!”

1654876041704.jpg“난 괜찮아. 이렇게 멀쩡한데…….”

1654876041704.jpg“정말 괜찮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아델은 빨간 코에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크리스틴의 눈매가 휘어지더니,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1654876041704.jpg“응, 괜찮아.”

1654876041704.jpg“뭐가 괜찮아. 입술은 새파래져서.”

1654876041704.jpg“아델, 네 입술은 더 파래.”

1654876041704.jpg“으으…… 진짜 추워서 죽을 것 같아.”

아델이 덜덜 떨며 몸을 꼭 끌어안았다.

1654876041704.jpg“나도.”

그런 아델을 크리스틴이 안아주었다. 너무 추워서였는지, 안도가 되어서였는지 아델도 그를 꼭 끌어안았다. 둘다 꽁꽁 얼어서 떨고 있었다. 그런데 몸에 닿는 서로의 체온은 너무 뜨거웠다. 밑바닥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짙은 감정이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부유물처럼 머릿속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뭔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머금고, 얼어붙은 살갗을 핥아주었다. 서툴러서 더 열정적이고, 순수해서 더 본능적이었던 키스. 그래, 그건 확실히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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