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배신자를 좋아할 만큼 너그럽지는 않아2022.02.18.
“핫!”
아델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제 입술을 얼른 막았다. 그리고 호숫가가 아닌,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날의 키스가 너무 생생했다.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그의 숨결과 입술에 내려앉던 체온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몸이 너무 뜨거웠다.
‘후우, 그럴 만도 했네.’
그녀 앞의 벽난로가 금방이라도 시뻘건 불길을 뿜어내기 직전이었으니. 언제 잠들었는지 크리스틴 대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는 담요까지 덮여 있었다.
“크리스?”
아델이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좁은 집안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잠든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담요까지 덮어주고 돌아간 모양이다. 벽난로에는 장작을 잔뜩 집어넣고서.
‘차라리 깨워서 인사를 해주고 가지…….’
10년 동안 연락도 없이 살았으면서, 그가 말없이 돌아간 게 왜 이리 서운한지 몰랐다. 나 정말 이기적이구나. 내가 그를 버리고 떠났으면서.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와서 변명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크리스틴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으니까. 만일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그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건 지금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벌써 가신 거예요?”
생각에 잠겨 있던 아델은 타냐의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타냐는 눈이 잔뜩 쌓인 낡은 외투를 벗으며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벌써라니. 날이 어두워졌는데.”
“혹시 주무시고 가시나 했죠.”
“자고 가다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델이 펄쩍 뛰며 나무라자 오히려 타냐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밖에 눈이 엄청나게 온다고요.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밤이면 지나가는 나그네라도 재워줘야 할걸요?”
아델은 민망해진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창가로 갔다.
“……그의 마차는 크니까 괜찮을 거야.”
창밖이 온통 하얗게 보일 만큼 정말 엄청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좀 더 눈이 그치면 가지. 이런 날씨에 뭐가 그리 급해서…….
“그런데 그분이 정말 바이스 백작님 맞는 거죠?”
찻잔이 놓인 테이블을 치우던 타냐가 물었다.
“왜?”
“아니, 그런 엄청난 분이 저희 집까지 오셨다니 믿어지지 않아서요.”
“너까지 알 정도면 정말 엄청난 분이긴 한가보다.”
“당연하죠. 전쟁의 영웅이시잖아요. 당장 길거리에만 나가봐도 남자아이들이 화이트 고스트 흉내를 내면서 막대기를 휘두른다고요.”
“화이트 고스트?”
“바이스 백작님이 이끄는 기사단이요. 그분이 단장님이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은 아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칼라임 제국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기사단의 이름이었으니. 그걸 이끄는 게 크리스틴이었다니…….
“그럼 이제 우리, 불행 끝 행복 시작인 거 맞죠?”
“무슨 말이야?”
“바이스 백작님이 이렇게 꽃까지 사 들고 오실 정도면 아가씨에게 단단히 반했다는 뜻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델이 단호하게 부인했지만 타냐가 놀리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에이, 아니긴요. 백작님의 눈빛이 얼마나 그윽했는데요.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이구나 싶더라니까요.”
“아니라니까!”
타냐는 아델의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는지 양손을 모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두 분 진짜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럼 우리도 이제 겨울에 원 없이 장작을 땔 수 있겠죠? 아니지, 백작님은 부자시니까 장작이 아니라 석탄을 땔 수도 있겠네요. 꺄아, 석탄 난로를 땔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아델은 어이가 없었다.
“석탄 난로는 나도 뗄 수 있다고!”
하지만 타냐는 벽난로 앞에 몇 개 남지 않은 장작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델은 금방 소심해졌다.
“무, 물론 빵과 쿠키를 좀 더 열심히 만들어서 팔아야겠지만.”
“과연 열심히 만들기만 한다고 될까요?”
후작 가문에서 쫓겨난 아델은 주로 쿠키와 빵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 때문에 귀족들에겐 팔리지 않았다. 잔인하도록 이성적인 타냐에게 아델은 발끈했다.
“넌 고작 석탄 난로 때문에 나랑 백작이 잘되기를 바라는 거야?”
“어디 그 이유뿐이겠어요? 전 정말 아가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요. 오스월드가, 그 못된 놈들에게 보란 듯이.”
“난 지금도 행복한걸. 너도 있고, 미아도 있고, 그리고 원하면 언제든지 빵과 쿠키를 구울 수도 있고. 정말이야.”
그래, 그걸로 만족해.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고,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향기 좋은 홍차와 디저트를 먹으며 친한 사람들과 함께 수다를 떨 수만 있다면. 그렇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함이 계속된다면…….
“그런데 아가씨, 전 좋은 남자 있으면 언제든 결혼할 거예요. 그러니 아가씨 행복에서 전 빼주세요.”
“이 감성 파괴자!”
***
“그거 보십시오. 여인들에겐 역시 꽃 선물이 최고라니까요.”
짐머의 목소리에 크리스틴이 돌아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단장님께서 지금처럼 혈색이 좋아 보인 적이 없거든요. 이렇게 추운 날에도 얼굴에 아주 홍조가…….”
그러다 크리스틴의 매서운 눈과 마주친 짐머는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조금만 더 떠들었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은 눈빛이었다. 여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 같아서 조금 인간미가 생긴 줄 알았더니.
“오늘 한가지 교훈은 확실히 얻었지. 다시는 네놈에게 선물 사는 일을 맡기지 말아야겠다고.”
“설마 꽃 선물이 안 통한 겁니까? 역시 특이하네요. 그래도 두 분 꽤 좋은 시간을 보내신 것 같던데 왜 벌써 가시는 겁니까?”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폭설을 헤치며 가고 있었다. 어지러운 눈발이 마차의 창을 사납게 두드려댔다. 워낙 전쟁터의 악천후에 단련된 그들이었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여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 이토록 험난해서야…….
“짝짓기 때거든, 내가.”
무심하게 말한 크리스틴은 조용히 마차의 창밖을 응시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겨울이군요.”
짐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 그토록 홍조가 감도는 모양이다.
“근데 후작 부인과 어떤 사이십니까? 두 분 왠지 예전부터 알던 사이 같던데.”
처음엔 크리스틴이 특이한 취향이라 이상한 과부에게 홀렸나보다 싶었다. 하지만 얼핏 본 두 사람은 어딘가 아련한 분위기가 있었다.
“내 누나를 자처하는 여자.”
“헉, 누나라고요?”
크리스틴의 입에서 나오는 누나라는 단어가 왜 이리 생경한지 몰랐다.
“그리고 날 짐승으로 만든 여자.”
“예?”
“그 여자 냄새는 정말이지 참기가 힘들어. 특히 이렇게 눈이 오는 밤에는…….”
크리스틴은 붉어진 입술을 손끝으로 쓸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17세가 되도록 변성기조차 오지 않았다. 또래의 친구들은 모두 하루하루 사내답게 성장해가는데 그는 여전히 계집애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도 그런 아들을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였었다. 그런데 그날 물에 빠진 아델을 구해준 이후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물속 깊이 가라앉는 그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엄청난 힘이 몸속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와 육체와 정신을 휘저어대는 기분이 들었다. 끔찍한 압박감에 그의 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아델의 인공호흡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땐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감각이 예민해진 걸 느꼈다. 뭔가 다른 존재가 들어와 있는 기분. 아니 다른 존재가 된 기분이라는 게 더 적합했다. 그녀의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지고,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본능적인 욕망에 겁이 날 정도였다. 제 입술에 그녀의 숨결이 내려앉는 걸 느꼈을 땐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어찌나 달큼하고 보드라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겁이 났다. 여기서 멈추지 못하면 그녀를 망가뜨릴 것 같아서. 가까스로 키스를 멈춘 그는 미친 듯이 눈 쌓인 숲으로,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존재였음을.
“알겠습니다. 후작 부인에 대해선 제가 좀 더 조사해보도록 하죠.”
짐머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둘 사이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예? 하지만 부인이 억울한 누명을 쓴 거라면…….”
“누명을 벗고 싶으면 본인이 도움을 청하겠지. 그렇지 않다는 건 억울하지 않다는 뜻이고.”
의외로 냉정한 대답에 짐머가 다 어이없었다.
“그건 아니지요. 단장님께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잖습니까. 가주를 독살한 부인을 오스월드 가에서 그대로 뒀다는 게. 혹시라도 좋아하시는 분이 그런 누명을 썼다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크리스틴의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럼…… 아니십니까?”
짐머는 자신이 뭔가 잘못 짚었나 싶었다.
“안고 싶은 여자라고 다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지.”
“예?”
“배신자를 좋아할 만큼 나는 너그럽지 않아.”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서늘했다. *** 며칠 동안 내리던 눈이 그쳤다. 언제 폭설이 내렸냐는 듯 아침 햇살이 화창했다.
“아델! 아델!”
타냐와 함께 식사를 마칠 무렵 미아가 아델의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요 며칠 폭설 때문에 집안에 갇혀만 있었더니 지루해 죽을 뻔했다는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외투를 벗는 것과 동시에 숨넘어가도록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델, 그날 온 사람 정말 바이스 백작이 맞아? 둘이 무슨 얘기를 했어? 언제 또 올 거래? 꽃을 갖고 왔으니 프러포즈라도 한 거 아냐?”
대부분은 바이스 백작으로 시작해서 크리스틴으로 끝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조용히 듣고 있던 아델은 생각지도 못한 말로 미아를 놀라게 했다.
“미아,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무슨 부탁. 말만 해. 내가 다 들어줄게!”
호기롭게 다가드는 미아에게 아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네 오빠…… 말이야. 그분 아직 만나는 사람 없지?”
미아의 오빠 마크는 이 근처에서 수의사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가축을 진료했지만, 돈이 없어서 의사에게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돌봐주었다.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온화한 인상에 성실해 보이는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아델과도 몇 번 안면이 있었다.
“그렇긴 한데, 이 시점에서 마크 얘기는 왜?”
아델은 억지로 웃으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분만 괜찮다면 진지하게 만나보는 건 어떨까 해서.”
“아델,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미아는 아델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아델은 진땀을 흘리며 소심해졌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겠지?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무슨 소리야! 마크가 예전부터 널 마음에 둔 건 알잖아. 네가 하도 남자라면 질색을 하니까 말도 못 꺼냈지. 그런데 백작은 어쩌고?”
미아는 아델과 크리스틴이 사귀는 걸 기정사실처럼 믿는 것 같았다. 아델은 오해를 바로잡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작은 사실…….”
그때였다.
“아가씨 손님이에요! 손님!”
타냐가 놀라서 뛰어 들어왔다. 이 상황은 왠지 며칠 전 일의 되풀이 같았다.
“설마 바이스 백작이 또 온 거야?”
미아는 그때처럼 얼른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곧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이건 백작이 온 것보다 더 놀라운데.”
무슨 소린가 싶어서 아델도 창밖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