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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마 (8/155)

8화.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마2022.02.28.

아델이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는 서재로 보이는 방의 카우치 소파에 누워 있었다.

16548761606281.jpg“도대체 어떻게 된…….”

아델이 소파에서 일어나려 하자, 크리스틴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16548761606281.jpg“더 누워 있어.”

16548761606281.jpg“윽!”

일어나려고 바동거리던 아델은 결국 포기하고 다시 누워버렸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16548761606281.jpg“괴롭히니까 좋니?”

16548761606281.jpg“그럴 리가. 엄청 걱정하고 있는 얼굴 안 보여?”

크리스틴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아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16548761606281.jpg“보여. 아주 잘. 그러니까 좀 물러나 줄래?”

다시 만난 크리스틴은 자꾸 얼굴을 불쑥불쑥 들이대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았다. 그때마다 아델은 고개를 돌리는 버릇이 생긴 것 같고.

16548761606281.jpg“다행히 정신은 제대로 돌아온 것 같군.”

그는 뒤로 물러나더니 물잔을 건넸다.

16548761606281.jpg“마셔.”

크리스틴의 부축을 받아서 일어나 앉은 아델은 단숨에 물잔을 비웠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탈 것처럼 갈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16548761606281.jpg“아까는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틴의 물음에 아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이 모아졌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지만, 복도에서 만난 이튼에게 억지로 방으로 끌려 들어간 것까진 생각났다. 그리고 나름대로 저항을 했던 것 같긴 한데…….

16548761606281.jpg“나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술을 마신 게 잘못됐었나 봐.”

자신이 마신 술에 누군가 약을 탄 것 같다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16548761606281.jpg“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 크리스.”

16548761606281.jpg“고맙다는 말은 네가 아니라 그 작자에게 들어야 할 것 같은데?”

16548761606281.jpg“응?”

16548761606281.jpg“너, 놈의 목을 그을 기세였거든.”

그러더니 크리스틴이 단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아델은 놀라서 단검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건 아델의 것이었다. 내가 단검까지 빼 들었던 건가?

16548761606281.jpg“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는 거야.”

그에게서 단검을 낚아챈 아델은 스커트를 들어 올려 허벅지의 가터링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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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보던 크리스틴이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16548761606281.jpg“악녀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이군.”

16548761606281.jpg“칭찬으로 들을게.”

아델은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자꾸만 좋지 못한 꼴을 보였으니까. 보란 듯 잘 사는 모습이었으면 했는데.

16548761606281.jpg“오른손 내밀어봐.”

16548761606281.jpg“손은 왜?”

크리스틴은 머뭇거리는 아델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설프게 칼을 쥐고 휘두르느라 자신의 손을 베인 것이다.

16548761606281.jpg“쯧, 제대로 쓸 줄도 모르고 휘두르면 호신용이 아니라 자해용이 되는 거라고.”

그는 손수건을 꺼내 아델의 상처를 감싸주었다.

16548761606281.jpg“그래도 갖고 다니면 마음이 놓여서.”

매듭을 묶던 크리스틴의 손이 멈칫했다. 칼을 갖고 다녀야 할 만큼 그녀를 위협하는 게 많았다는 뜻이었으니까.

16548761606281.jpg“하긴 아까 그 자식도 칼을 보고 겁먹긴 하더군.”

매듭을 다 묶자 아델은 얼른 손을 빼냈다.

16548761606281.jpg“그래도 네 도움이 없었다면 위험했을 거야.”

16548761606281.jpg“난 별로 한 거 없는데. 네가 마구 칼을 휘두르니까 놈이 잔뜩 졸았었거든. 그 틈에 뒷덜미를 쳐서 기절시킨 게 전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크리스틴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16548761606281.jpg“아, 놈의 옷을 벗기고 묶어 놓는 게 좀 번거롭기는 했어.”

16548761606281.jpg“옷을 벗기고 묶어 놓았다고?”

16548761606281.jpg“왜 너무 약했어?”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16548761606281.jpg“아니.”

16548761606281.jpg“아무래도 속옷 한 장은 입혀 둘 걸 그랬나?”

16548761606281.jpg“속옷? 풋!”

갑자기 상상되어 아델이 웃었다. 그러자 크리스틴의 눈빛도 살며시 장난스러워졌다.

16548761606281.jpg“그런 물건을 가지고 잘도…….”

16548761606281.jpg“숙녀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16548761606281.jpg“본 대로 말한 것뿐이야.”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아델은 얼른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16548761606281.jpg“그런데 너도 한스 부인의 초대를 받고 온 거야?”

16548761606281.jpg“설마.”

16548761606281.jpg“……그럼?”

16548761606281.jpg“황녀의 에스코트.”

황녀가 언급되는 순간 아델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는 제복이 아닌 고급스러운 연회복 차림이었다. 황녀의 파트너로 왔으니 평소보다 차림에 신경 쓴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역시 넌 황제의 부마가 되는구나.

16548761606281.jpg“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16548761606281.jpg“네 냄새가 났으니까.”

16548761606281.jpg“말도 안 돼. 나 잘 씻는단 말이야. 머리도 잘 감고…….”

그러면서도 아델은 팔과 겨드랑이에 코를 가져다 대보았다. 그 모습에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16548761606281.jpg“내 코가 좀 많이 예민해.”

16548761606281.jpg“그 정도면 예민한 게 아니라 짐승이지.”

순간 그가 아델을 갑자기 커튼 뒤로 끌고 들어갔다.

16548761606281.jpg“무, 무슨……?”

놀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16548761606281.jpg“쉿!”

그는 아델의 입술 위에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짓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16548761606281.jpg“놈을 찾으러 왔나 봐.”

두 사람이 있는 서재는 이튼 자작이 묶여 있던 바로 옆방이었다. 잠시 후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크리스틴의 말대로 사람들이 그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세이라와 한스 부인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아델은 이 모든 일이 세이라의 계획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16548761606281.jpg“당신은 반드시 나랑 바이스 백작을 이어주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세이라가 약을 탄 술을 시종에게 시켜서 보낸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미아가 그걸 자신에게 건넨 거고. 그리고 운이 나빠서 이튼에게 몹쓸 짓을 당했더라도, 세이라는 그걸 빌미 삼아 아델을 협박했을 것이다. 크리스틴과 맺어달라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델이 이튼을 유혹했다고 소문을 낼 게 뻔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세이라! 커튼 자락을 움켜쥔 아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할 때였다. 크리스틴과 단둘이 있는 걸 들켜도 좋을 게 없었으니까. 잠시 후 문 너머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16548761756522.jpg“꺄아악!”

16548761756522.jpg“이게 무슨 일이래요!”

알몸으로 묶인 이튼을 발견한 모양이다. 물론 좋아서 지르는 비명은 아닐 테고. 그 사이 크리스틴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16548761606281.jpg“일단 나갈까?”

싸한 겨울바람이 들이치며 커튼 자락이 팔락거렸다. 어둠에 잠긴 밤하늘 속에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하늘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마도…… 크리스틴 때문이었으리라.

16548761606281.jpg“응.”

그는 날렵하게 창턱으로 훌쩍 뛰어올라 손을 내밀었다.

16548761606281.jpg“잡아.”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아델이 물었다.

16548761606281.jpg“여기 1층이지?”

16548761606281.jpg“그런데?”

16548761606281.jpg“이 정도는 나도 넘을 수 있거든.”

그의 손을 정중하게 사양한 아델은 양손으로 창턱을 짚고 올라갔다. 하지만 바닥이 경사면이라 창문과 바닥의 거리가 생각보다 높았다.

16548761606281.jpg“지금이라도 도와줘?”

16548761606281.jpg“됐어!”

16548761606281.jpg“발목 삐어도 안 업어준다?”

16548761606281.jpg“너나 조심해!”

치맛자락을 움켜쥔 아델은 가볍게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보란 듯 크리스틴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겨울바람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락 휘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10년 전 그 여자아이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델은 사내아이들과 제법 잘 어울려 놀곤 했었다. 숲을 닮은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산으로 강으로 거침없이 뛰어다니던 그 아름답던 소녀……. ***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정원의 분수대를 거닐었다. 겨울이라 물은 얼어 있었지만, 곳곳에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운치가 있었다. 다만 추운 게 흠이었는데 크리스틴이 재킷을 벗어서 아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16548761606281.jpg“고마워.”

16548761606281.jpg“별말씀을.”

그의 옷은 생각보다 크고 묵직했다. 하지만 그의 체온으로 데워져 있어서 무척 따뜻했다.

16548761606281.jpg“참, 나 황실에 디저트를 납품하기로 했어.”

아델이 먼저 말을 꺼냈다.

16548761606281.jpg“잘됐네.”

16548761606281.jpg“혹시…… 네가 부탁한 건 아니지?”

아델이 머뭇거리며 묻자 크리스틴은 단호했다.

16548761606281.jpg“그런 일을 언급할 만큼 황제도 나도 한가하지 않아.”

16548761606281.jpg“그럼 됐고.”

아델은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의 솜씨가 정말로 황제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뜻이니까.

16548761606281.jpg“그래도 내 호평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했겠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니까.”

16548761606281.jpg“어머 무슨 소리. 내 디저트가 폐하의 미각을 움직인 거지.”

16548761606281.jpg“그럼 이번엔 지독하게 맛없다고 해볼까?”

16548761606281.jpg“크리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던 아델은 깜짝 놀랐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굴게 되었다. 그와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지난 10년의 시간이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것처럼 그때의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16548761606281.jpg“그러니까 내 도움이 컸다는 거 인정하지?”

16548761606281.jpg“큰 건 아니고, 조금.”

16548761606281.jpg“정말 조금?”

16548761606281.jpg“조금보단…… 조금 많이?”

16548761606281.jpg“어쨌든 도움받은 건 인정?”

16548761606281.jpg“인정.”

16548761606281.jpg“그럼 도움을 받았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아델은 불길한 표정으로 크리스틴을 살폈다.

16548761606281.jpg“……고맙다는 인사?”

16548761606281.jpg“귀족들은 맨입으로 인사하는 거 아니라던데.”

16548761606281.jpg“와, 너 귀족이 되더니 많이 타락했구나. 부자라면서. 있는 놈이 더한다더니…….”

아델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크리스틴은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16548761606281.jpg“당신이야말로 말로 때우려고 하지 마. 성의를 보일 노력을 하라고, 노력.”

16548761606281.jpg“그래서 뭘 원하는데?”

16548761606281.jpg“애플파이.”

그 순간 아델이 얼굴이 굳어졌다. 크리스틴도 그리움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48761606281.jpg“당신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애플파이 진짜 맛있었는데. 가끔씩 생각나.”

어머니의 얘기에 그녀의 표정이 울 것처럼 어두워졌다.

16548761606281.jpg“그러게. 그럴 줄 알았으면 엄마의 레시피를 좀 더 배워두는 건데.”

그렇게 갑자기 이별하게 될 줄 알았다면.

16548761606281.jpg“그 맛이 아니라도 괜찮아. 어쨌든 당신이 만든 파이가 먹고 싶어.”

16548761606281.jpg“그래, 만들어서 보내줄게. 어디로 보내면 될지 알려줘.”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16548761606281.jpg“날 초대해.”

16548761606281.jpg“그건…….”

아델이 말꼬리를 흐리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6548761606281.jpg“좁은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16548761606281.jpg“아니, 그보다 황녀님이 오해라도 하시면…….”

16548761606281.jpg“황녀가 무슨 상관이지?”

16548761606281.jpg“어?”

16548761606281.jpg“당신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잖아. 내가 친동생이나 다름없다고.”

역시 크리스틴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간 것이다.

16548761606281.jpg“그야……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잦아드는 건지.

16548761606281.jpg“그러니 내가 당신 집에 드나들어도 이상할 게 없지. 친누나나 다름없는데.”

16548761606281.jpg“크리스.”

순간 크리스틴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표정이 금방 차가워졌다.

16548761606281.jpg“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당신 남자에게 오해받는 게 싫어서라고.”

내 남자?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델이 재혼한다는 소문도 같이 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16548761606281.jpg“그런데 그거 알아? 당신이 밀어낼수록 못되게 굴고 싶어진다는 거.”

달빛에 반짝이는 깊은 청회색 눈동자가 위협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10년 전 그 아이처럼 느껴지던 크리스틴이 지금은 너무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역시 날 용서하지 못한 거겠지?

16548761606281.jpg“그러니까 더이상 날 자극하지마, 아델.”

경고처럼 섬뜩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리고 크리스틴은 몸을 돌려 가버렸다. 싸한 겨울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아델은 몸을 감쌌다. 따뜻하던 그의 재킷이 지금은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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