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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 남자의 방문 (10/155)

10화. 그 남자의 방문202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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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잠을 자고 일어난 타냐는 집 안 가득한 달큼한 냄새에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갔다. 조리 식탁에는 밀가루 반죽과 달걀 등 제빵 재료들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그 앞에서 아델은 계량 저울에 재료들을 담아가며 열심히 레시피를 적는 중이었다.

16548762396773.jpg“절 깨우시지.”

타냐는 어질러진 재료들을 정리하며 미안해했다.

16548762396773.jpg“아니야. 내가 그냥 잠이 안 와서 일찍 일어났어.”

16548762396773.jpg“근데 뭐 만드시는 거예요? 애플파이?”

아델의 레시피 노트를 보며 타냐가 물었다.

16548762396773.jpg“응, 애플파이에 도전해 보려고.”

그러고 보니 아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애플파이를 만든 적이 없었다. 파이 중에서 가장 흔하게 먹는 파이였는데도.

16548762396773.jpg“보나 마나 맛있겠죠. 아가씨 솜씨는 최고니까.”

16548762396773.jpg“맛있는 거로는 부족해.”

16548762396773.jpg“그럼 또 뭐가 필요한데요?”

아델은 씁쓸하게 웃었다.

16548762396773.jpg“어머니의 손맛?”

16548762396773.jpg“예?”

16548762396773.jpg“갑자기 엄마가 옛날에 만들어주시던 파이가 그리워져서. 같은 재료를 넣는데도 나는 도저히 그 맛을 낼 수가 없을 것 같아.”

아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16548762396773.jpg“음식은 언제 누구랑 먹느냐에 따라서도 느껴지는 맛도 다르지 않을까요?”

16548762396773.jpg“……그런가.”

아델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델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빵 가게의 주인이었다. 아침이면 빵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덕분에 살림은 가난했지만, 배를 곯지는 않았다. 아버지 없는 사생아라며 놀림 받는 것만 빼고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닐곱 살 사내아이가 아델의 눈에 들어왔다.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말라깽이 아이. 언제 씻었는지 꼬질꼬질했지만, 은빛 머리와 신비로운 청회색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광부의 아들 크리스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쳤단다. 어쩌면 그 아이조차 다른 남자의 아이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만큼 크리스틴과 그의 아버지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래선지 아버지는 아이를 방치하다시피했다. 며칠씩 광산에 일하러 가면 아이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을 다닌다고 했다. 아델은 그런 크리스틴에게 아껴두었던 애플파이를 건넸다. 단숨에 그걸 먹어치운 크리스틴은 다음 날에도 찾아왔다. 마치 먹이를 달라고 찾아오는 예쁜 새끼 짐승처럼. 아델은 파이를 주는 조건으로 그에게 몸을 씻으라고 했다. 갈아입을 옷도 주었다. 나중엔 글씨를 가르쳐주고, 춤과 피아노도 가르쳤다. 그는 마치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그녀가 가르치는 모든 걸 열심히 배웠다. 아델의 어머니는 예쁜 아들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세월이 흐르자 밖으로만 나돌던 크리스틴의 아버지도 두 모녀의 집을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빵 굽는 오븐을 고쳐주고, 빵 가게에 간판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결국 정식으로 재혼을 결심했다. 아델은 결혼식 날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래야 무탈하게 잘 산다며 행복을 꿈꾸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위해 그녀는 손수 부케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가 죽었다. 빵을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숲의 짐승들에게 물어뜯겨, 참담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 일로 아델의 모든 행복도 사라져 버렸다. 18세 겨울의 일이었다. ***

16548762396773.jpg“으으 으음! 맛있어! 맛있어!”

미아는 양 볼이 터질 것처럼 파이를 씹으며 발까지 동동 굴렀다.

16548762396773.jpg“그렇죠? 진짜 최고예요!”

타냐도 주저 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파이 하나로 행복해진 두 여자와 달리 아델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16548762396773.jpg“내가 원하던 맛이 아니야. 좀 더 풍미가 깊고, 식감은 바삭하면서 촉촉한…….”

16548762396773.jpg“뭐라니?”

어이없어하는 미아에게 타냐가 살며시 속삭였다.

16548762396773.jpg“어머니의 손맛을 내고 싶으시대요.”

16548762396773.jpg“아델, 이건 내가 먹어 본 애플파이 중 최고야. 황제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테니 안심해.”

16548762396773.jpg“황궁에 납품하려는 게 아니야.”

16548762396773.jpg“그럼?”

아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히 웃기만 했다.

16548762396773.jpg“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애플파이를 또 한 조각 집어 들며 미아가 창밖을 힐끔거렸다.

16548762396773.jpg“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델의 물음에 미아는 음모꾼 같은 미소를 지었다.

16548762396773.jpg“내 오빠, 마크.”

16548762396773.jpg“뭐?”

아델이 깜짝 놀라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16548762396773.jpg“네가 소개시켜 달라며. 잊었어?”

16548762396773.jpg“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울상이 된 아델을 미아가 달랬다.

16548762396773.jpg“부담 갖지 마. 근처에 왕진 올 일이 있다고 해서 잠시 들르라고 한 것뿐이야. 그냥 자연스러운 자리니까 너도 자연스럽게 대하면 돼.”

수의사인 마크는 근처의 농장으로 자주 왕진을 다니고는 했다.

16548762396773.jpg“그래도…….”

16548762396773.jpg“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면서 뭘. 그리고 너 오늘 충분히 예뻐. 그 앞치마만 벗고, 조금 꾸미면 완벽할 거야.”

16548762396773.jpg“제가 얼른 가서 빗 가져올게요!”

눈치 빠른 타냐가 빛의 속도로 달려가 빗을 가져왔다. 그러더니 하나로 묶고 있던 아델의 머리를 풀고 빗질을 해주었다. 미아도 얼른 자신의 소지품 속에서 분첩과 립스틱을 꺼냈다. 왠지 미리 준비해 왔던 것만 같았다.

16548762396773.jpg“뭐, 뭐 하려고?”

당황한 아델을 향해 미아가 씩 웃었다.

16548762396773.jpg“지금도 예쁘지만 화장하면 더 예쁠 것 같아서.”

16548762396773.jpg“그, 그만둬. 미아…….”

아델은 난처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타냐가 머리를 빗기느라 그녀의 뒤를 막고 있었다. 미아는 더 바싹 다가서며 야릇하게 눈웃음쳤다.

16548762396773.jpg“자, 얌전히 있어, 아델.”

16548762396773.jpg“윽! 제발. 이런 거 질색이야. 자연스럽게 대하라며?”

16548762396773.jpg“어머, 귀족 여인들에겐 이게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잠시만 참으세요. 아가씨.”

16548762396773.jpg“타냐 너까지!”

그렇게 두 여자는 의기투합해서 아델에게 화장을 시키고, 머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파이를 괜히 먹였나 보다. 다들 힘이 너무 넘치고 있었다.

16548762396773.jpg“오셨어요!”

잠시 후 타냐가 창밖을 보며 소리쳤다.

16548762396773.jpg“오, 딱 맞췄네.”

마침 아델의 화장을 끝낸 미아가 흐뭇해했다.

16548762396773.jpg“거울 좀…….”

아델이 손을 내밀자 미아는 손거울을 얼른 뒤로 감추며 웃었다.

16548762396773.jpg“염려 마.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게 오늘 콘셉트니까.”

16548762396773.jpg“내 생각엔 꾸며도 너무 꾸민 것 같은데.”

그러면서 아델은 재빨리 미아에게서 거울을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16548762396773.jpg“미아, 설마 이 여자가 나는 아니지?”

거울 속 아델은 뽀얗다 못해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 현란할 정도로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있었다. 두 뺨의 볼 터치는 또 어찌나 울긋불긋한지. 거기에 길게 풀어 내린 머리에는 꽃까지 달고 있으니…….

16548762396773.jpg“너무 예뻐서 너도 놀랐지?”

아델은 생글 웃었다. 물론 눈만 웃고 있었다.

16548762396773.jpg“응, 정말 엄청 놀랐어. 그럼 이제 지운다?”

아델이 화장을 지우려고 하는데 미아가 얼른 손을 붙잡았다.

16548762396773.jpg“안돼, 지금 너무 예쁘단 말이야!”

16548762396773.jpg“설마 마크 취향이 쥐 잡아먹은 미친 여자야?”

16548762396773.jpg“거울이 좀 이상한 거야. 실제로 보면 진짜 예쁘다니까.”

16548762396773.jpg“이 손 놓지, 미아? 안 그럼 조금 전 먹은 파이가 네 마지막 파이가 될지도 몰라.”

아델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매우 살벌했다.

16548762396773.jpg“우웅…… 싫어.”

하지만 미아도 고개를 저으며 물러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16548762396773.jpg“어서 오세요!”

타냐의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큼직한 왕진 가방을 든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16548762396773.jpg“마크! 오랜만이야!”

아델과 실랑이 하던 미아는 얼른 달려가 마크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아델에게 끌고 와서 인사시켰다. 하는 수 없이 아델은 꾸며도 너무 꾸민 것 같은 얼굴로 마크와 마주해야 했다.

16548762396773.jpg“두 사람 이미 아는 사이지? 그래도 오늘은 정식으로 인사 나눠. 여긴 나의 친애하는 벗 아델, 여긴 하나뿐인 내 오라버니 마크.”

마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어했다.

16548762396773.jpg“갑자기 방문해서 놀라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미아가 하도 얼굴 본 지 오래됐다고 꼭 들르라고 해서…….”

16548762396773.jpg“아뇨, 잘 오셨어요. 마침 파이를 구웠는데 드시고 가세요.”

마크는 집 안에 진동하는 달큼한 파이 냄새에 군침을 다셨다.

16548762396773.jpg“출출하던 참이라 염치없이 사양 안 하겠습니다. 존슨 씨네 농장 소가 난산이라 생각보다 진을 뺐거든요.”

16548762396773.jpg“저런. 어미와 새끼 모두 건강하고요?”

16548762396773.jpg“예, 다행히.”

그가 테이블 앞에 앉자 아델은 오븐에서 새로 구운 애플파이를 꺼내왔다. 미아가 돌아갈 때 싸주려고 따로 뒀던 거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타냐가 미아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16548762396773.jpg“두 분, 생각보다 잘 어울리세요.”

16548762396773.jpg“그럼! 오빠가 날 닮아서 인물, 성품, 뭐하나 빠지는 게 없거든.”

16548762396773.jpg“글쎄요, 그건…….”

타냐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미아와 달리 마크는 유쾌하지만 점잖았다. 단정하게 정리한 갈색 머리와 짙은 푸른 눈동자도 정갈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인물 역시 어디를 가도 눈에 띌 정도로 수려했으며, 큰 키에 적당히 단단해 보이는 체격도 충분히 남자다웠다. 괜히 흐뭇해진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16548762396773.jpg“참, 깜박했다! 타냐, 네가 부탁한 뜨개실을 까먹고 못 챙겨왔네. 이 정신머리하고는.”

웬 뜨개실? 무슨 말이냐는 듯 타냐가 쳐다보자, 미아가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미아의 속셈을 눈치챈 타냐도 맞장구를 쳤다.

16548762396773.jpg“정말요? 어쩌죠? 오늘 꼭 필요한 건데.”

16548762396773.jpg“그럼 같이 가서 가져올래?”

16548762396773.jpg“그럴까요?”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자리를 비켜주려 하자 아델은 깜짝 놀랐다. 그런 아델을 미아가 안심시켰다.

16548762396773.jpg“금방 다녀올게, 아델.”

하지만 금방 돌아올 리 없다는 건 미아의 표정에 너무 확실히 드러났다.

16548762396773.jpg“뜨개실은 이따가 나도 같이 가지러 가.”

마크를 의식하며 아델이 속삭이자, 미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16548762396773.jpg“으응, 아니야. 네 것까지 우리가 가져올 테니 염려 마.”

16548762396773.jpg“미아…….”

아델은 난처해져서 입 모양으로 불렀다. 하지만 미아는 ‘잘 해봐’라고 입 모양으로 대답해 주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16548762396773.jpg“그럼 전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아델이 불편해하는 걸 눈치챈 마크가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손님이 아닌가?

16548762396773.jpg“아니에요. 금방 다녀올 텐데요 뭘.”

그를 만류한 아델은 주인으로서 타냐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16548762396773.jpg“타냐, 오늘은 할 일이 많으니까 빨리 돌아오도록 해.”

16548762396773.jpg“물론이죠.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

하지만 방긋 웃는 타냐의 표정 역시 아델의 경고가 전혀 먹히지 않은 것 같았다. *** 이제 집 안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아델과 마크뿐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아델은 당황스러웠다. 하긴, 이렇게라도 그와 잘 되면 좋은 건가? 아델은 애써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이미 그녀가 재혼한다는 소문까지 파다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마크와 가까이 지내는 게 알려지면 크리스틴과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잦아들 것이다. 그러면 그는 순조롭게 황녀와 결혼 할 수 있을 거고……. 그렇게 되길 바라며 마크를 소개해달라고 한 게 아니던가?

16548762396773.jpg“요즘에는 오스월드 가에서 조용한가 봅니다.”

16548762396773.jpg“네?”

생각에 잠겨 있던 아델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마크는 세모 모양으로 잘린 파이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16548762396773.jpg“얼굴이 예전보다 보기 좋아져서…… 좋네요.”

16548762396773.jpg“아아…… 이건…….”

역시 이 남자는 쥐 잡아먹은 미친 여자가 취향인 건가? 아델은 조금 전 거울 속의 진한 화장을 했던 얼굴이 떠올라서 부끄러웠다.

16548762396773.jpg“물론 그 강렬한 화장은 미아의 솜씨겠지만.”

16548762396773.jpg“다행히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16548762396773.jpg“관심 있는 사람에 한해서죠.”

무심한 얼굴로 말하며 마크는 홍차를 마셨다. 아델 역시 무심한 얼굴로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관심 있다고 고백한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은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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