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가 여전히 동생으로 보이나?2022.03.11.
“관심 있는 사람에 한해서죠.”
무심한 얼굴로 말하며 마크는 홍차를 마셨다. 아델 역시 무심한 얼굴로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관심 있다고 고백한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은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참, 제이드는 잘 지내죠?”
“예, 녀석이야 항상 즐겁죠.”
제이드는 마크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내는 제이드를 낳다가 죽었다고 했다.
“돌아가실 때 남은 파이를 싸드려도 될까요? 제이드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당연히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벌써 돌아가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아델은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그러자 왕진 가방을 챙기며 마크가 쿨하게 일어났다.
“그럼 맛있는 파이도 얻어먹었으니 이제 힘내서 가보겠습니다.”
그를 따라 일어나며 아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직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해서.”
마크는 호탕하게 웃었다. 커다란 입술 사이로 희고 가지런하게 드러나는 치아가 보기 좋았다.
“사실은 저도 많이 어색합니다.”
솔직한 대답에 아델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까 시간 될 때 또 놀러 오겠습니다. 그래야 덜 어색해질 테니.”
아델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는 생각보다 더 좋은 남자인 것 같았다. 크리스틴과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끌어들인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네, 다음에 또 오세요. 그땐 제이드도 같이.”
그러면 조금 덜 어색할 테니.
“하하, 제이드 녀석 진짜 좋아하겠는데요?”
하지만 진짜 좋아하는 것은 마크인 것 같았다. 아델은 남은 파이를 꼼꼼하게 유산지로 포장해서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묶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정원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
누가 왔나 싶어서 창밖을 내다보던 아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사이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그녀의 집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누굽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마크가 물었다. 똑똑.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문이 열렸다. ***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아델이 놀라서 묻자 크리스틴은 미간에 주름을 접은 채 물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건가?”
지금쯤 그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을지 알만했다. 하지만 아델은 굳이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사들 하세요. 이분은 마크 캐슬러 남작. 이분은…….”
“바이스 백작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마크가 특유의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표정은 없었지만, 청회색 눈동자가 서슬 퍼렇고 서늘했다.
“크리스…….”
아델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유감이군요. 나는 남작에 대해 들은 바가 없으니.”
“실례잖아, 크리스.”
아델이 민망해서 나무라는데 크리스틴이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마크를 바라보는 두 눈은 아까보다 더 살벌했다.
“미리 얘기를 해주지 그랬어, 아델. 당신이 만나는 남자가 겨우 남작 나부랭이라고.”
“크리스!”
“그래도 명색이 전대 후작 부인인데 어느 정도 급을 맞춰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
날카로운 목소리에 크리스틴이 아델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입만 웃는 얼굴로.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마크가 난처해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그럼 나중에 제이드랑 같이 올게요, 아델.”
그러더니……. 초옥! 아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 너무 당황한 아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는 동안 마크는 성큼성큼 저택을 나갔다. 이제 집 안에는 아델과 크리스틴 둘만 남았다. 창밖으로 황혼이 내려앉는 저녁이었다. ***
“황녀의 초대장이야.”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크리스틴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핑크색 봉투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델이 봉투를 열자, 황가의 문장이 찍힌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이번 주말 오후에 티 타임을 함께하자는 내용이었다. 마침 황실에 디저트를 납품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걸 주려고 온 거야?”
“당신이 약속을 잊은 건가 확인도 할 겸.”
“약속? 아아…… 애플파이.”
고개를 갸웃하던 아델은 지금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잊겠는가? 엄마의 맛과 똑같은 애플파이를 만들기 위해 매일 연구 중이었는데. 어느 정도 비슷한 맛을 내게 되면 그를 초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나 있었으니까. 그 사이 크리스틴은 테이블 위에 포장된 애플파이를 발견했다. 마크의 돌발 행동에 놀란 아델이 미처 전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올 줄 알고 만든 것 같지는 않고…… 그놈 건가?”
소파에 기대앉아 등받이에 팔을 올리며 그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의 아이를 주려고 포장한 거야.”
“애까지 딸린 놈이었나?”
반듯한 그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도 한 번 결혼했었어.”
“하긴 첫 결혼은 늙은 후작이었으니, 두 번째 결혼은 애 딸린 남작과 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군.”
그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아델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
“내 결혼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크리스틴은 앞으로 몸을 숙여 앉더니 아델의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당신 입으로 친동생이나 다름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 결혼에 대해 말할 자격은 충분한 것 같은데?”
아델은 그의 손을 얼른 쳐냈다.
“비난하고 싶은 거겠지!”
그의 손가락이 스친 살갗이 화끈거렸다.
“그렇다면 제대로 알아들은 거고.”
아델은 울컥해졌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이제 겨우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살 수 있게 됐는데, 그가 나타나고부터 그녀의 삶이 다시 복잡해져 버렸다. 그와 연관 있다는 것만으로 그린힐의 모든 귀족이 아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작은 꼬투리 잡힐 일이라도 발견하면 다들 신이 나서 떠들어 대리라.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고…….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신물이 났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서 더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초대는 다음에 할게. 용건 끝났으면 돌아가.”
“아니, 난 오늘 애플파이가 먹고 싶은데?”
“다음에 초대하겠다고 했잖아!”
“꼭 초대를 받아야 하나? 누.나. 집에 오는데?”
“크리스!”
그는 다시 소파에 기댄 채 느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자고 갈까 생각 중이야. 누.나.의 집이니까.”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
아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결국 크리스틴은 픽 웃었다.
“하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가? 하녀까지 내보내고 오늘 밤 재미 좀 볼 생각이었을 텐데.”
아델은 말도 안 되는 오해에 기함했다. 너무 화가 날 때는 오히려 화를 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너도 똑같아.”
그녀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크리스틴이 멈칫하며 보았다.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소문만 믿고 날 그런 여자로 보는구나. 남편을 독살하고, 욕정에 눈이 멀어 아무 남자하고…….”
그제야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상처 입혔다는 걸 깨달았다.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걸 보는 순간부터, 화가 치밀어서 이성 따윈 개나 줘버린 것이다.
“오해였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그 화장은 다 뭐야? 머리에는 꽃까지 달고……. 정신줄 놓은 여자처럼 그러고 있으니까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
그제야 아델은 자신이 쥐 잡아먹은 미친 여자 같은 몰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해서 이런 몰골을 한 게 아니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래. 그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 재미 볼 생각까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틴이 숨 고르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정말 그놈과 재혼 할 생각인가?”
“문제 될 건 없잖아. 이제 나도 혼자인 거 지쳤고.”
이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8년 동안 끔찍한 소문을 견디며 악착같이 살아낸 아델이었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는 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누구라도 기댈 곳이 있었으면……. 그러면 우습게도 가끔은 크리스틴이 떠올랐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그 아이.
“결혼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이 아델을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그는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해서. 아무리 귀족의 삶을 동경했다고 해도 어째서 열여덟의 나이에 늙은 후작과 결혼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하지만 아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기댈 사람이 생긴다면 그걸로 만족해. 더 바라는 거 없어.”
“고작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한다고?”
“결혼이 뭐 별건가?”
아델은 체념한 얼굴로 웃었다. 정말이었다. 마크와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결혼하게 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틀림없이 든든하고 성실한 남편이 되어 줄 테니까.
“차라리 나한테 기대.”
“어?”
아델이 놀라서 쳐다보자 크리스틴이 인상을 썼다.
“기댈 사람이 필요해서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기대는 것 정도는 나한테 해도 돼.”
“말도 안 돼…….”
“왜, 내가 여전히 동생으로 보여서?”
그럴 리가. 너무 남자로 보여서 탈인걸.
“넌 황녀님과 결혼할 거잖아.”
“그거랑 무슨 상관이지? 오누이 같은 사이에 서로 의지하는 게 이상한가?”
“그 말 정말 힘이 된다. 하지만 내가 의지하는 만큼 나도 그 사람의 힘이 돼 주고 싶어서, 결혼은 그래서 하는 거 아닐까?”
너라면 내게 기댈 필요가 없겠지.
“그게 그놈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대신 힘들어 해주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람.
‘그런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크리스.’
하지만 그 말은 마음속 깊이 삼켜 버린 채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크리스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일어섰다. 하지만 곧 서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군. 불쑥 찾아와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괜찮아. 초대장 고마웠어.”
아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초대장을 들어 보였다. *** 탁! 크리스틴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아델은 창가의 커튼을 젖히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순간이라도 놓칠까 봐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그를 태운 마차가 이내 황혼이 저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늘 그렇듯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빵을 굽고, 미아와 수다를 떨며 지내다 보면 크리스틴의 일 따윈 다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그가 없이도 잘 살아왔으니까.
‘더 끔찍하고 힘든 일도 다 잘 견뎌왔는걸.’
마음을 추스른 아델은 사그라드는 벽난로에 다시 장작을 넣고 등잔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마음처럼 춥고 어둡던 집 안이 금방 환하고 따뜻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넋 놓지 말고 정신 차리자, 아델. 이럴 땐 일을 하라고. 황실에 납품할 디저트는 도대체 언제 만들 거니?”
주말까지 황실에 납품할 디저트를 만들어야 했다. 첫 납품이자, 그날 황녀와 티 타임이 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시험대에 오르는 것 같아서 긴장됐다. 다시 일어나서 앞치마를 두르고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였다.
“타냐 지하 창고에서 밀가루 좀……!”
그러고 보니 타냐는 지금 없었다. 아델은 잠시 망설였다. 직접 가서 가져와야겠지? 꺼내 놓은 밀가루가 없었으니 하는 수 없었다. 삐거덕. 계단 옆의 낡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녹슨 경첩이 흘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열린 문 안쪽에서 서늘한 기운과 함께 지하실 특유의 곰팡내가 올라왔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진짜 다시는 지하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데.”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문 안쪽에 등불을 비췄다. 가물거리는 불빛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이었는데도 아델은 한 손으론 벽을 짚고, 다른 손으론 등불을 비춰가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딛는 다리가 저도 모르게 후들거렸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그때 갑자기 요란한 종소리가 들렸다. 가끔씩 마을에 내려오는 산짐승이나, 그녀를 해코지하려는 침입자를 쫓아내기 위해 담장 주위에 종을 달아놓은 것이다. 대부분의 불청객은 이렇게 요란한 종소리가 들리면 겁을 먹고 달아나곤 했다. 종을 달아놓은 것만으로도 불청객들을 쫓아내는 효과가 톡톡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종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딸랑딸랑, 딸랑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