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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 (12/155)

12화. 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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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 틈에 산짐승이라도 낀 걸까? 제발 그랬으면 좋으련만. 사람은 아니기를. 종소리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랐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그동안에도 계속 종이 울려댔다. 이럴 때 타냐라도 옆에 있었더라면 조금 덜 무서웠을 텐데. 미아의 집까지는 안 들리는 건가? 어쩌지? 나가서 확인이라도 해 볼까? 산짐승은 아닌 것 같았다. 종소리가 들리는 곳이 한 군데가 아니었으니까. 집 주위에 여러 명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담장을 마구 흔들어대면서 일부러 그녀를 위협하려는 게 분명했다.

16548762956659.jpg‘대체 누가?’

그 순간이었다. 종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쨍그랑!

16548762956659.jpg“꺅!”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아델은 비명을 질렀다. 이내 거침없는 발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담장을 흔들어대던 사람들이 정원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철컹! 얼른 창고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근 아델은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등불도 껐다.

16548762956659.jpg‘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델은 귀를 막은 채 몸을 옹송그렸다. 코를 찔러오는 곰팡내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났다.

16548762956677.jpg“오스월드 후작님께선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십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도 후작님의 지침에 따라주십시오.”

  후작가에 들어온 첫날부터 하녀장은 군기를 잡으려는 듯 말했다. 후작 부인이 아니라 새로 온 하녀를 대하는 태도였다.

16548762956677.jpg“부인께선 앞으로 이 지하실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지하라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서 난방은 따로 안 해도 될 겁니다. 추우면 옷을 따뜻하게 입고 주무십시오. 양초는 1주일에 하나씩 지급할 테니 아껴서 쓰시고요. 식사는 후작님께서 남기신 걸 드시면 됩니다.”

  오스월드가에서 지낸 2년 동안 아델은 말만 후작 부인이었을 뿐이었다. 하녀들도 ‘지하실 마님’이라며 대놓고 무시하고 구박했다. 아델이 후작 부인의 대접을 받을 때는 손님들이 오거나 연회에 참석할 때뿐이었다. 그들은 그러기 위해 후작 부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디에 하소연할 곳 없는 힘없는 꼭두각시 후작 부인이. ***

16548762956659.jpg“……듣고 계십니까, 단장님?”

짐머가 옆에서 말을 걸었지만, 크리스틴은 대답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로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밖은 온통 캄캄했으니 창밖의 풍경을 감상할 리는 없었고, 표정을 보아하니 상당히 저기압이었다.

16548762956659.jpg‘후작 부인과 다투시기라도 한 걸까?’

그러다 짐머는 깜짝 놀랐다. 크리스틴이 누군가 때문에, 특히 여자로 인해 이렇게 저기압일 수 있다니……. 황녀조차 안중에 없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걸 보면 그에게 아델은 확실히 특별했다. 누나 이상으로.

16548762956659.jpg“뺨에 입맞춤할 정도면 어느 정도 사이지?”

난데없는 물음. 고개를 갸웃하던 짐머가 활짝 웃었다.

16548762956659.jpg“설마 후작 부인의 뺨에 입맞춤하신 겁니까? 그럼 이건 확실한 하트 시그널……!”

하지만 크리스틴의 서슬 퍼런 기세에 얼른 말을 바꿨다.

16548762956659.jpg“뭐…… 누가 누구의 뺨에 입을 맞춘 게 중요하겠습니까. 어쨌건 하트 시그널이 확실합니다. 남녀 사이에 살갗을 맞댔다면 이미 말 다 한 거…… 조오…….”

크리스틴은 아예 눈빛만으로 짐머를 죽여버릴 것처럼 살기등등했다.

16548762956659.jpg“없애 버릴까?”

16548762956659.jpg“예?”

크리스틴의 살기에 화들짝 놀란 짐머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짐머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럼 대체 누구를? 크리스틴이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저었다.

16548762956659.jpg“됐다. 이튼 자작에 대한 보고는?”

한스 부인의 파티가 끝난 후 이튼 자작에 대해 조사를 시킨 것이다.

16548762956659.jpg“그렇지 않아도 방금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짐머는 얼른 보고 자료를 넘기며 덧붙였다.

16548762956659.jpg“요사이 헬밸리 주점을 자주 드나든다고 합니다. 뒷골목 불량배들과 무슨 일을 꾸미는 게…….”

순간 크리스틴이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짐머가 말을 멈추자 그는 눈을 감으며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마차 안의 공기들이 일제히 그의 주변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청회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16548762956659.jpg“벌써 일을 꾸민 모양이군.”

  *** 쾅쾅쾅! 거친 소리와 함께 지하 창고의 문짝이 들썩거렸다.

16548762956677.jpg“부인!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그만 나오시지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델은 깜짝 놀랐다. 이튼 자작! 술에 취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그자였다.

16548762956677.jpg“셋 셀 동안 안 열면 여기 성질 더러운 친구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갈 겁니다. 그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크하하하!”

곧 낄낄대는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적어도 서너 명 이상인 것 같았다.

16548762956677.jpg“하나!”

아델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앞치마를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16548762956659.jpg“한스 부인의 파티에서 망신당한 걸로 부족했나요, 이튼 자작!”

16548762956677.jpg“닥쳐!”

콰앙! 그가 발로 걷어찼는지 문짝이 크게 들썩였다.

16548762956677.jpg“부숴버려!”

쾅! 콰쾅!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델은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오래된 나무문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아랫배에 힘을 주며 온 힘을 다해 호령했다.

16548762956659.jpg“경고하는데, 내 몸에 손 하나라도 대면 바이스 백작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미안하지만 지금은 크리스틴의 유명세라도 빌리는 수밖에. 역시나 놈들이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칼라임에서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이름이었으니까.

16548762956677.jpg“이봐, 바이스 백작 얘긴 없었잖아.”

16548762956677.jpg“이 여자랑 무슨 사이야?”

나직한 속삭임. 놈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생긴 것 같았다. 이때다 싶어 아델은 좀 더 용기를 냈다.

16548762956659.jpg“곧 그가 여기 올 거야.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당장 꺼져!”

16548762956677.jpg“닥쳐!”

와지끈! 결국, 문짝이 부서지며 뽀얀 먼지 너머로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 이튼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 있었다.

16548762956677.jpg“흐흐흐…… 누가 네년의 거짓말에 속을 거 같아? 황녀까지 보는 앞에서 날 개망신 줬겠다. 오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거다!”

이튼은 주위에 있던 패거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나무통에 든 액체를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기름 냄새가 났다. 설마 집에 불을 지르려고?

16548762956659.jpg“안 돼!”

말리려는 아델에게 나머지 놈들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델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하얀 허벅지를 드러냈다.

16548762956677.jpg“안 돼! 칼 조심……!”

이튼이 소리쳤지만 이미 놈들의 시선은 그녀의 허벅지에 머물렀고, 스컥! 아델은 가터 링에 감춰둔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16548762956677.jpg“크악, 저 계집이!”

아델에게 팔을 베인 놈이 인상을 쓰며 소리치자,

16548762956659.jpg“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

아델은 사납게 단검을 세워 들었다. 이걸로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자들이 섣불리 달려들진 못했다.

16548762956659.jpg‘제발 한 놈이라도 찌르고 도망칠 수만 있다면…….’

땀이 찬 손으로 단검을 필사적으로 움켜쥘 때였다.

16548762956659.jpg“김빠지는군. 기껏 도와주려고 왔더니.”

긴박한 상황에 맞지 않게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돌아보자 한 남자가 구경하듯 턱을 괸 채 붉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 남자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귀신같은 출현도 놀라웠지만, 남자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더 놀라웠다. 대리석으로 깎은 것 같은 완벽한 이목구비와 눈부신 실버블론드.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입술이 사람을 홀릴 것만 같았다.

16548762956677.jpg“바, 바이스 백작?”

이튼이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놈들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16548762956677.jpg“씨X, 정말 온 거야?”

16548762956677.jpg“이 미친!”

크리스틴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16548762956659.jpg“그날 부탁했을 텐데요, 이튼 자작.”

16548762956677.jpg“그, 그날……?”

의아해하던 이튼은 이 목소리가 퍼뜩 떠올랐다. 한스 부인의 파티! 그날 약에 취한 아델을 방으로 끌고 들어왔었다. 그러자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던 아델이 갑자기 지금처럼 단검을 빼서 휘둘렀다. 뜻밖의 저항에 당황하는데 누군가 뒤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48762956659.jpg“위험한 짓은 삼가십시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에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은 것이다. 깨어났을 땐 입이 틀어막히고,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때 그놈이 바이스 백작이었다고?

16548762956659.jpg“아무래도 그날 경고가 너무 정중했었나 봅니다.”

16548762956677.jpg“난…… 그냥 겁 좀 주려고…….”

겁에 질려 대답하던 이튼은 한편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답지 않게 눈앞의 바이스 백작은 호리호리하고 계집애처럼 곱상하기만 했다. 틀림없이 소문이 부풀려진 거로군. 여기 있는 인원이라면 어떻게 상대해 볼 수 있을지도……. 스릉!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크리스틴이 레이피어를 빼 들었다. 길고 날렵한 칼날은 마치 그를 닮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튼은 갑자기 숨이 막히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칼날에서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움찔움찔 뒷걸음질을 치는데……. 철퍼덕! 바닥의 흥건한 기름에 미끄러져 자빠졌다. 동시에 크리스틴의 레이피어가 그의 턱밑을 찔러 들어왔다.

16548762956677.jpg“끄아악!”

턱 아래가 꿰뚫리는 줄 알고 이튼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동안 크리스틴의 레이피어는 턱밑에서, 목줄기로, 가슴으로, 배로, 그리고 다리 한가운데까지 무심하게 훑어 내려갔다. 칼 그림자가 닿는 것만으로도 이튼은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파헤쳐지는 공포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6548762956677.jpg“컥! 커흑, 사,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흐흑!”

그는 바닥에 오줌까지 지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 침이 뒤섞여 엉망으로 젖어 버렸다. 크리스틴은 레이피어를 휘리릭 돌려 도로 칼집에 넣었다.

16548762956659.jpg“피는 전쟁터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늘게 눈웃음쳤다. 그것만으로도 금방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 틈을 타 나머지 불량배들은 미친 듯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튼도 엉덩이 걸음으로 도망치려다가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주저앉았다.

16548762956677.jpg“그럼 사, 살려 주신다는 뜻으로…… 알고…… 가, 가도 되겠…….”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62956659.jpg“단, 후작 부인의 허락을 받은 후에요.”

그러면서 레이피어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태세였다. 이튼은 얼른 바닥에 이마를 찧어대며 아델에게 절을 했다.

16548762956677.jpg“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후작 부인! 부디 용서를! 취해서 홧김에 그랬습니다. 제발! 이 미천한 것에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제발!”

그는 아델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이런 자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이 아델은 허탈해졌다.

16548762956659.jpg“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세요!”

16548762956677.jpg“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는 아랫도리에서 오줌을 뚝뚝 흘리며 도망쳤다.

16548762956659.jpg“너무 쉽게 용서해주는 거 아닌가? 재미없게.”

크리스틴이 못마땅한 얼굴로 입맛을 다실 때였다. 챙강! 아델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칼을 휘두르더니 가련한 어린 짐승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16548762956659.jpg“괜찮아?”

16548762956659.jpg“으응, 고마워…… 크리스…….”

여전히 떨고 있는 주제에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인사치레를 했다.

16548762956659.jpg“청소해야 할 것 같으니 오늘은 다른 곳에서 자는 게 좋겠군.”

그가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닥엔 기름이 흥건했고, 창고 문의 부서진 잔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16548762956659.jpg“괜찮아. 이 정도는…….”

16548762956659.jpg“하긴 자주 있는 일이라 단련된 건가?”

크리스틴은 비아냥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꼴이 된 것이 그녀 탓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자꾸 괜찮은 척하는 것이 화가 났다. 꼴좋군. 혼자 잘 살겠다고 떠나더니, 사람들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꼴이나 당하고.

16548762956659.jpg“그럼 내 도움은 필요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단호하게 돌아서려던 크리스틴이 멈칫했다. 시선을 내리니 주저앉아 있던 아델이 그의 외투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16548762956659.jpg“조금만……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 꼴불견인 건 알지만 그래도 잠시만 같이…… 응?”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눈. 그 눈동자가 너무 애처로워서 크리스틴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16548762956659.jpg“조금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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