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 결혼의 흑막2022.03.21.
스컥! 서늘한 칼날이 이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어억!”
그는 졸도할 것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잘린 것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재갈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백작! 아, 아까 살려준다고 그랬잖습니까!”
덕분에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튼은 울면서 항의했다. 크리스틴이 그의 턱을 홱 잡아 올렸다.
“아주 그림 솜씨가 좋으시더군. 이튼 자작.”
서늘한 목소리가 넓은 홀 안을 웅웅 울렸다. 무엇에 관한 얘기인지 깨달은 이튼은 얼른 변명했다.
“그건 한스 부인의 파티에서 망신당한 게 화가 나서…… 그냥 장난으로…….”
“장난으로 담장에 낙서할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종소리를 듣고 아델에게 되돌아오던 크리스틴은 그녀의 집 담장에 그려진 낙서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엔 벌거벗은 여자가 남자와 음란하게 얽혀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후작 부인과의 뜨거웠던 밤을 추억하며>
“살려주십시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이튼은 의자에 묶인 채로 쉬지 않고 빌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잘 답하도록.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이 칼날이 네놈을 꿰뚫을 테니.”
크리스틴은 레이피어를 빼 들며 손가락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쓰다듬었다. 섬뜩한 경고에 이튼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 물론입니다!”
“왜 후작 부인을 괴롭히지?”
“그건…… 제 청혼을 거절해서…….”
“청혼?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고백했다는 거 말인가?”
“실은 계속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네놈이 후작을 독살했나?”
이튼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후작 부인이 남편을 독살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증언만 있고, 증거는 없지.”
“하지만 후작이 먹는 모든 음식은 부인이 먹여주었습니다.”
레이피어를 쓰다듬던 크리스틴의 손이 멈칫했다.
“음식을 먹여줘?”
“후작은 거동이 불편해서 부인이 항상 수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가문의 명예 때문에 비밀에 부쳤지만.”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아델이 늙은 후작과 결혼했다는 건 알았지만 거동도 불편한 환자였다니.
“……언제부터?”
“결혼할 때부터였죠.”
그러더니 이튼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떠들기 시작했다.
“실은 말이 후작 부인이지, 오스월드가에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후작의 수발들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만만한 집안의 딸을 데려다 후작 부인으로 만들고 부려먹을 생각이었죠. 하녀보다 훨씬 그럴듯해 보일 테니까.”
“말만 후작 부인이었다?”
“예! 그릴스 백작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제 딸을 그 자리에 앉힌 거죠.”
그릴스 백작은 아델의 생부였다.
“그걸 알면서 딸을 결혼시켰다고?”
“한창 사업 자금이 필요할 때였으니 기회다 싶었겠죠.”
크리스틴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아델 넌 대체 왜……? 귀족이 되어 잘 살겠다더니. 자신을 버린 생부를 따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더니……. 겨우 그렇게 살려고 그랬나?
“아주 나쁜 놈인 게, 후작 부인의 상속지분을 미리 받는 조건으로 딸을 결혼시켰거든요. 후작이 사망한 후에 딸은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죠. 한마디로 사생아로 버려둔 딸을 돈 받고 팔아넘긴 겁니다.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르고 결혼한 후작 부인만 안쓰러웠죠.”
혀를 차던 이튼은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후작가의 사정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군.”
“사실 저희 어머니 쪽으로 먼 친척이라서요. 헤헤.”
“그래서 정말 그녀가 남편을 독살했다고 생각하나?”
“말씀드렸잖습니까. 후작이 먹는 모든 음식은 부인이 먹여 줬다고.”
“남편이 독살당하면 제일 먼저 누가 의심받을까? 그런데도 그녀가 남편을 독살했을까?”
“제가 그 속사정까지야 어떻게 알…….”
“아니, 네놈은 알고 있어. 그녀가 남편을 독살했다고 믿었다면 청혼하지 않았겠지.”
“그, 그건……!”
어느새 크리스틴의 레이피어가 이튼의 목에 겨눠졌다. 그것만으로도 이튼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파티장에선 왜 놔준 줄 아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곳은 폐허가 된 수도원의 예배당이었다. 날이 춥고 해가 짧은 겨울엔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
“여기서 죽는다면 겨울이 지나서 발견되겠지. 반쯤 썩은 미라가 되어.”
“흐헉! 배, 백작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이튼은 다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울었다.
“그럼 성의있게 답해봐.”
“저, 저도 누가 죽였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부인은 평소 후작에게 지극정성이었으니 독살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그럼 누가 했을까?”
“정말 모릅…… 헙!”
강하게 부인하던 이튼은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 톤…….”
“후작의 장남 말인가?”
“예, 후작이 죽던 날 둘이 말다툼하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부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도 스톤이었고요. 물론 제 추측일 뿐이지만.”
“그래, 스톤이 있었군.”
중얼거리던 크리스틴은 갑자기 사나운 얼굴로 이튼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왜 그녀를 변호해주지 않았지? 좋아했었다면서?”
“저 같은 게 변호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스톤은 오스월드 가문의 후계자라고요.”
오스월드 후작가. 귀족 원로회를 이루는 다섯 명문가 중 하나였다. 후작의 죽음으로 후계자인 스톤이 자동으로 원로회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튼 같은 별 볼 일 없는 귀족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이튼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아니, 네놈은 그녀가 더욱 궁지에 몰리길 바랐겠지. 그렇게 무너지고 망가지면 훨씬 더 갖기 쉬워질 테니.”
“……!”
“너무 정곡을 찔렀나?”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음산했다. 이튼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녀와 뜨거운 밤이라도 보냈나?”
이튼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부인은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군.”
“그럼 이제 살려주시는 걸로 알고…….”
크리스틴이 고개를 저었다.
“말했을 텐데?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그래서 전부 사실대로 말했잖습니까? 진짜입니다!”
“담장의 낙서는?”
“……!”
그 순간 이튼은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지금 네놈 입으로 실토한 걸 잊었나? 그 낙서는 거짓이었다고.”
“그, 그건...!”
이튼이 오싹해진 얼굴로 바라보자 크리스틴의 붉은 입술 끝이 가늘게 올라갔다.
“물론 살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뭡니까?”
“당장 모든 걸 정리하고 그린힐을 떠나라.”
“하지만 저희 가문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그것만은!”
“그러면 여기서 죽던가.”
그는 너무나 단호했다. 살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 따윈 없는 것이다. 이튼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겠습니다.”
챙강! 크리스틴이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그의 앞에 던져주고 돌아섰다. 의자에 묶여 있던 이튼은 발을 뻗어 레이피어를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를 결박하고 있던 줄을 쉽게 잘랐다. 그러나 명검을 손에 쥔 이튼은 금방 음흉한 유혹에 빠졌다. 크리스틴은 지금 무방비하게 등을 노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빈손. 아무리 용맹한 전사라도 기습을 당하면 빈손으로 뭘 어쩌겠는가? 그의 말대로 여기서 죽는다면 겨울이 지나서야 발견되리라. 모든 게 감쪽같이 묻혀질 것이다.
“이야아아!”
그는 크리스틴의 등을 향해 있는 힘껏 레이피어를 찔러넣었다. 하지만 곧 허옇게 질려서 입을 떡 벌렸다.
“헉, 이, 이건……!”
겁에 질린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경악스럽게 커졌다. 휘이익! 거대해진 크리스틴의 그림자가 날렵하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끄아아악! 아아악!”
피비린내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
수도원을 나오는 크리스틴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투명하도록 하얀 피부와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은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 같았다. 창백하게 하얀 뺨 위에 붉은 핏방울이 흩뿌려져 있었지만, 그것마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짐머가 얼른 달려와 기다란 케이프를 둘러주었다.
“후작이 거동도 불편한 환자라는 걸 알고 있었나?”
케이프를 몸에 두르며 크리스틴이 물었다.
“예, 뭐…… 후작가에선 비밀에 부친 모양이지만.”
크리스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보고 안 했지?”
오히려 짐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작 부인에 대한 조사는 필요 없다고 하신 거 잊으셨습니까? 배신자라면서…….”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기에 크리스틴은 미간을 구겼다.
“아델에 관한 조사는 필요 없지만, 전대 오스월드 후작의 죽음에 관해 조사하도록. 스톤 오스월드에 관해서도.”
“그러실 줄 알고 이미 조사중입니다.”
크리스틴이 멈칫하며 쳐다보자 짐머가 상냥하게 웃었다.
“언젠간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눈치가 귀신같은 놈.
“그리고 간단한 짐을 싸서 아델의 집에 갖다두도록.”
“예, 단장님!”
크리스틴은 빙글거리며 웃는 짐머의 얼굴이 심하게 기분 나빴다. 진작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은 표정.
“네놈이 생각하는 거랑 다르다.”
“전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역시 기분 나쁜 놈.”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며 그가 마차에 올라탔다. 얼른 뒤따라 올라타며 짐머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겨울이면 한창 짝짓기 때인데 그분과 한집에서 지내시는 거. 황제께선 에이프릴 황녀님과 혼인을 생각 중이신 것 같은데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크리스틴이 인상을 쓰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예. 저야 어느 쪽이든…….”
짐머가 소매로 창문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덜 따가워질 때까지.
“황제의 명령이다.”
“예?”
“그녀에게서 찾아야 할 게 있어. 황제의 사인이 담긴 백지 문서.”
짐머는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럼 설마 후작 부인에게 일부러 접근하신 겁니까?”
“말했을 텐데. 나는 배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짐머는 이번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 좋아서 접근한 게 아니라고? 아델과 만나기만 하면 감정이 널을 뛰듯 하면서? 그렇게 뜨거운 눈빛이 되면서? ***
“아델 오지 마라, 거기 있어!”
“세상에! 어떤 짐승이 이런 짓을…….”
새하얀 눈밭 위를 온통 검붉게 물들인 피……. 그리고 그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하아악!”
아델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에 낯익은 침실 풍경이 보였다.
‘후우…… 꿈이었구나…….’
잠이 안 와서 계속 뒤척이다가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그 사이 악몽을 꾼 것이다. 늘 같은 꿈. 아델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침대에서 나왔다. 쪼르르……. 벽난로 위의 와인 병을 열어 입을 대고 마셨다. 크리스틴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이상 설탕을 탄 우유 따위로 잠을 청하는 소녀가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이렇게 술기운에 의지하고는 했다. 높은 도수의 와인이 알싸하게 내장을 훑는 감각을 느끼며 그녀는 벽난로 옆의 책장으로 갔다. 제일 아래 칸의 책들을 빼낸 후 벽을 더듬자, 드르륵. 책장 뒤쪽 벽이 서랍처럼 튀어 나왔다. 그 안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붉은 두루마리 문서가 들어 있었다. 생전의 오스월드 후작이 금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것. 매우 중요한 것 같아서 8년 전 후작가를 나올 때 아델이 빼돌린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문서 안에는 아무 내용도 없었다. 하단에 발렌시아 대공의 사인뿐이었다. 발렌시아 대공의 사인은 조금 의외이긴 했다. 그는 원로회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당연히 후작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얼마 후 그 발렌시아 대공은 황제가 되었다. 현 황제의 사인이 담긴 백지 문서…….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