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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오늘 밤 나랑 같이하자 (16/155)

16화. 오늘 밤 나랑 같이하자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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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641143.jpg“……도와줄까?”

165487641143.jpg“응, 지하에서 밀가루 포대를 좀 갖다 줘.”

165487641143.jpg“그거 말고.”

165487641143.jpg“어?”

크리스틴의 눈빛이 너무 깊게 들어와서 아델은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는 꼭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아는 것처럼.

165487641143.jpg“아니야. 밀가루만 갖다 주면 돼?”

다행히 크리스틴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165487641143.jpg“응, 연약한 내가 들기엔 좀 무겁거든.”

165487641143.jpg“하, 그럴 리가.”

165487641143.jpg“나보고 뼈밖에 없다고 한 게 누군데.”

165487641143.jpg“알았어. 갖다 줄게.”

웬일로 쉽게 승복하며 크리스틴이 지하로 내려갔다.

165487641143.jpg“오스월드가에선 지하실 마님이라고 불렀다더군요.”

  조금 전 짐머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

165487641143.jpg“지하실 마님?”

165487641143.jpg“예, 오스월드 후작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부인의 침실은 지하실에 있었답니다.”

165487641143.jpg“지하실? 후작의 지시였나?”

165487641143.jpg“아뇨. 후작은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통증을 줄이기 위해 독한 약을 써서 의식이 온전치 못했답니다. 부인께선 후작의 의식이 있을 때 식사를 챙기고, 시중을 들었답니다. 그 외에는 하녀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합니다.”

165487641143.jpg“다른 하녀들도 지하실에서 생활했나?”

165487641143.jpg“그게…… 거긴 부인 혼자서만.”

165487641143.jpg“어째서?”

165487641143.jpg“아마 기선 제압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후작가의 안주인 행세를 못 하도록.”

알만했다. 광산 마을의 빵 가게 딸 아델.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에 명문가의 안주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후작의 자식들 대부분은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뼛속까지 오만한 귀족들에게 어린 그녀는 마음대로 쓰고 버릴 존재였으리라.

165487641143.jpg“결국, 후작을 죽이고 그녀에게 없는 죄까지 덮어씌운 건가?”

165487641143.jpg“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날 스톤과 후작이 다툰 건 사실이었지만, 부인 역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는 않았으니까요.”

165487641143.jpg“협박을 받았겠지.”

165487641143.jpg“하지만 스톤은 그 후 오르비스 왕국의 외교관으로 파견 근무 중입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계속 침묵하는 걸 보면…….”

165487641143.jpg“그래서 그녀가 후작을 죽였다?”

크리스틴은 전에 없이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165487641143.jpg“아닙니다! 하지만 부인이 얘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누가 죽였는지는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늙은 후작과의 결혼은 그렇다고 쳐도, 아델은 왜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계속 거기 있었던 걸까? 그리고 뭘 위해 침묵하는 걸까? ***

165487641143.jpg“다행이다. 이걸 어떻게 들고 올라올까 걱정했는데.”

크리스틴이 부엌의 조리대에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자 아델이 활짝 웃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벌벌 떨어놓고서는.

165487641143.jpg“또 도와줄 일은?”

165487641143.jpg“칼라임의 영웅께서 부엌 일을 도와주시겠다고?”

165487641143.jpg“칼라임의 영웅도 배는 채워야 하니까.”

165487641143.jpg“설마 또 배고프다고 하려는 건…….”

조리대에 걸터앉은 크리스틴은 느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641143.jpg“난 왜 당신만 보면 배가 고플까?”

165487641143.jpg“내가 먹을 걸로 보이니?”

165487641143.jpg“응, 당신이 참 맛있어 보여.”

입맛을 다시는 그는 금방이라도 아델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 쭈욱.

165487641143.jpg“으, 무슨 짓이야!”

아델이 크리스틴의 양 볼을 잡아 늘인 것이다.

165487641143.jpg“너 자꾸 느끼한 표정 지으면 내 집에서 쫓아낼 거야.”

아델은 단단히 경고한 후에 그의 볼을 놔주었다.

165487641143.jpg“미쳤어, 당신?”

크리스틴이 얼얼한 뺨을 만지며 발끈했지만, 아델은 명랑하게 웃었다.

165487641143.jpg“화 안 내고 얌전히 기다리면 팬케이크를 만들어줄게. 그건 금방 할 수 있으니까.”

165487641143.jpg“하, 겨우 팬케이크 따위로……!”

그러나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할 준비를 하는 아델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허기가 느껴졌다.

165487641143.jpg“맛없으면 진짜 당신을 잡아먹을지도 몰라.”

165487641143.jpg“아이, 무서워라. 일단 거기 달걀부터 깨트려줄래? 그리고 찬장 왼쪽 문 열고 버터 좀 꺼내줘. 그 위에 바닐라 에센스랑, 메이플 시럽도.”

165487641143.jpg“한 번에 하나씩만 시키지?”

그가 눈썹을 추어올리며 인상을 쓰는데,

165487641143.jpg“미안한데 딱 한 가지만 더 시켜도 돼?”

아델은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펴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165487641143.jpg“안 돼!”

165487641143.jpg“에이,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쓰시지?”

165487641143.jpg“그럼 딱 한 가지 만이야.”

크리스틴이 여전히 인상을 썼지만, 아델에겐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것까지 시키는 걸 보면.

165487641143.jpg“내 앞치마 주머니에 머리끈이 있을 거야. 그걸로 머리 좀 묶어줘.”

165487641143.jpg“머리를 뭐…… 해달라고?”

지금까지 머리를 베어본 적은 있어도 머리를 묶어본 적은 없는 그였다. 하지만 아델은 넉살 좋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

165487641143.jpg“내 손엔 밀가루가 묻어서. 대충 묶어줘. 반죽에 머리카락만 안 들어가게.”

165487641143.jpg“내가 왜 이런걸…….”

투덜대면서도 크리스틴은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색바랜 초록색 리본 머리끈. 여자들의 머리끈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낡은 리본을 머리에 단 여자는 없을 것 같았다.

165487641143.jpg“대체 얼마나 오래 쓰면 이런 넝마가 되는 거지? 잡아당기면 끊어지겠군.”

165487641143.jpg“한 10년 됐나?”

아델의 머리카락을 쓸어모으던 크리스틴의 손이 멈칫했다.

165487641143.jpg“당장 갖다버리고 새것을 사.”

165487641143.jpg“아직 쓸만해.”

165487641143.jpg“못 버리는 것도 병이야.”

165487641143.jpg“싫어. 손때 묻은 거라서 소중하단 말이야.”

165487641143.jpg“쓰레기에 의미 부여하고 집착하지 마.”

165487641143.jpg“어머, 어쩜 타냐랑 그렇게 똑같은 소리를 하니?”

165487641143.jpg“하녀라도 똑똑해서 다행이군.”

165487641143.jpg“그 애가 나더러 집착녀래. 오래된 물건 하나도 집착하고 못 버린다고. 생각해보니 내가 그런 경향이 있긴 한 거 같아.”

아델은 장난스럽게 쿡쿡거리며 웃었다.

165487641143.jpg“그럼 오래된 사람은?”

문득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나직한 음성.

165487641143.jpg“……응?”

고개를 들자, 크리스틴의 가라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165487641143.jpg“10년 전…… 그렇게 떠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해서. 오래된 물건 하나도 못 버리는 당신이라면.”

아델은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깨물었다.

165487641143.jpg“말했잖아. 귀족이 되고 싶었다고.”

165487641143.jpg“그래서 원하던 귀족이 됐어?”

낮게 가라앉은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추궁하는 것만 같았다. 하기야 그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후작가에서 얼마나 비루하게 살았는지.

165487641143.jpg“한마디로 속았지 뭐. 후작 부인이 돼서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는데.”

아델은 쿨한 척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기분은 걷잡을 수 없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165487641143.jpg“그런데 왜 거기서 도망치지 않았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잖아.”

165487641143.jpg“도망치면 갈 데는 있고?”

165487641143.jpg“우리 집.”

그 말에 아델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끈해져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게 떠난 자신이라도 기다렸다는 말처럼 들려서. 망설임 없이 우리 집이라고 해준 것이 너무나 따뜻하고 고마워서. 크리스틴이 그녀를 돌려세워 마주 보았다.

165487641143.jpg“아델…….”

165487641143.jpg“미안해. 팬케이크는 조금 있다가 만들어줄게.”

더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아델은 그를 밀어내며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놔주지 않았다.

165487641143.jpg“말해 봐. 당신이 숨기는 게 뭐지? 정말 후작을 죽인 건가?”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아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165487641143.jpg“넌 내가 밉지도 않아? 가장 필요할 때 널 버리고 떠났는데.”

165487641143.jpg“미웠었지. 한동안 당신을 증오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때는 당신도, 나도 어렸어.”

그러니까 모두 말해 봐, 아델. 어쩌면 당신을 이해해 줄 수도 있으니까.

165487641143.jpg“사생아로 버려둔 딸을 돈 받고 팔아넘긴 겁니다.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르고 결혼한 후작 부인만 안쓰러웠죠.”

  아델은 겨우 숨을 고르며 크리스틴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165487641143.jpg“그래, 난 후작을 죽이지 않았어.”

165487641143.jpg“역시 스톤이 한 짓인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641143.jpg“하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 그러니까 내게 죄가 없다고 할 수도 없지.”

165487641143.jpg“그렇다고 일부러 누명을 쓸 필요까진 없잖아? 내가 도와줄게.”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165487641143.jpg“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저 소문뿐인걸. 정말 나를 도와주고 싶다면 머리나 빨리 묶어줘.”

아델은 찰랑거리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정지된 그림처럼 그녀를 날카롭게 바라보기만 했다.

165487641143.jpg“뭐해 빨리. 발효시킬 반죽을 다 해놓고 자려면 시간 없단 말이야.”

재촉하는 아델을 향해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487641143.jpg“설마…… 스톤을 좋아한 건가?”

165487641143.jpg“……!”

아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 순간 크리스틴은 제 안의 무언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

165487641143.jpg“하, 역시 그거였나?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거기 있었던 이유.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면서까지 침묵하는 이유. 그자를 유혹했다는 소문이 소문만은 아니었던 건가?”

그는 쏟아져 나오는 독설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결국, 아델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흐느끼는지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젠장……!

165487641143.jpg“아델…….”

그 순간,

165487641143.jpg“푸훗!”

갑자기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부엌이 떠나갈 것처럼 크게 소리 내 웃었다.

165487641143.jpg“미안. 정말 이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잖아. 내가 그 인간을? 말도 안 돼!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

아델은 소름 끼친다는 듯 어깨를 쓸어내렸다.

165487641143.jpg“……아니면 말고.”

크리스틴은 당황스러웠지만 묘하게 안도가 되었다.

165487641143.jpg“크리스 너 진짜 상상력이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어쨌거나 그 끔찍한 작자는 내 아들이기도 했다고.”

165487641143.jpg“가설 중 하나일 뿐이었어.”

165487641143.jpg“그 작자가 날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알아? 벼락이 내리칠 때마다 놈의 머리 위에 떨어지라고 수없이 기도했단 말이야. 오르비스 왕국에서 평생 안 돌아왔으면 좋겠어.”

165487641143.jpg“그럼 내가 죽여줘?”

165487641143.jpg“그래 주면 내 전 재산을 내놓지!”

아델이 그를 뼛속까지 싫어한다는 게 너무나 잘 느껴졌다. 뒤틀리던 기분이 어느새 사라진 걸 깨닫고 크리스틴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165487641143.jpg“알았어. 이제 머리 묶게 돌아서.”

아델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그러모으며,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낡은 리본을 돌려 묶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165487641143.jpg“아델, 아무래도…… 당신 머리카락은 살아 있는 것 같아.”

뭐든 빨리 능숙하게 해내는 데 자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를 묶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같았다.

165487641143.jpg“그럴 리가. 보름달 뜨는 밤에만 살아나는데.”

165487641143.jpg“그런데 왜 전부 내 손에 달라붙지?”

165487641143.jpg“정전기 때문이야. 대충 안 풀리게만 묶…… 아야!”

165487641143.jpg“아, 실수 아니고 고의.”

165487641143.jpg“크리스!”

165487641143.jpg“가만있어 봐. 지금 거의 다 돼…….”

아델의 머리에 리본 매듭을 묶느라 애쓰던 크리스틴이 멈칫했다. 잔털이 가지런히 돋아난 하얀 목덜미와 가녀린 목선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설탕을 탄 우유처럼 달큼하고 나른한 맛이 날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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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641143.jpg“다 됐어?”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델은 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165487641143.jpg“……푸흡!”

순간 그녀를 본 크리스틴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유리창에 제 모습을 비쳐 본 아델도 어이가 없었다. 반이나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정전기 때문에 여기저기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165487641143.jpg“누가 보면 너랑 머리채라도 잡고 싸운 줄 알겠다.”

그동안에도 크리스틴은 계속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그의 감정에 전이된 것처럼.

165487641143.jpg“머리를 제대로 못 묶었으니까 다른 부탁 하나 더 들어줘.”

웃던 크리스틴은 금방 정색을 했다.

165487641143.jpg“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델은 막무가내로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생글거렸다.

165487641143.jpg“오늘 밤 나랑 같이하자.”

크리스틴의 목울대가 꿀꺽 흔들렸다.

165487641143.jpg“오늘 밤 당신이랑 뭐, 뭐를……?”

너무 놀라서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나왔다.

165487641143.jpg“생각해보니 내 손에 상처가 아직 안 나았더라고.”

아델은 단검을 휘두르다 상처가 생긴 손을 내보였다. 큰 상처는 아니라서 거즈 면을 붙이고 천으로 묶어 두었다.

165487641143.jpg“네가 반죽을 하는 거야. 팔 힘 좋은 네가 치대면 더 쫄깃해질 거야.”

165487641143.jpg“아, 그러고 보니 짐머하고 약속이 있는 걸 깜박…….”

도망치려는 크리스틴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가 살살 눈웃음쳤다. 사실 눈웃음 공격은 크리스틴만의 필살기가 아니었다.

165487641143.jpg“네가 해줘, 크리스. 해줄 거지? 응?”

그리고 조르기 2차 공격.

165487641143.jpg“안 들려.”

그는 외면했지만 소용없었다.

165487641143.jpg“아잉, 크리스…… 으응, 해줘…… 해주세요, 네? 네?”

애교까지 3단 콤보를 날리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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