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건 꿈이었을까?2022.04.01.
타냐가 잠에서 깼을 땐 이른 아침이었다.
“아으으으!”
크게 기지개를 켜며 그녀는 터덜터덜 부엌으로 향했다. 어제 일찍 잠들었으니 오늘은 서둘러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델을 깨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실에 납품할 디저트 만들 재료도 준비해놔야 했다. 그나저나 바이스 백작님은 어제 안 들어온 건가?
“쩝, 아가씨랑 잘 됐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아쉬워서 입맛을 다시며 부엌문을 열고 들어갈 때였다.
“……!”
깜짝 놀란 그녀는 한동안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아델은 조리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맞은 편에 바이스 백작도 아델과 마주 본 채로 똑같이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서로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은 그들의 머리 위를 따뜻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적당히 흐트러지고, 적당히 나른한 두 남녀의 분위기가 왠지 야릇했다. 봐서는 안 될 은밀한 사생활을 엿본 기분이었다.
“……흡!”
얼른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뒷걸음질로 조심스럽게 부엌문을 닫고 나갔다.
“핫, 깜짝이야!”
뒤돌아서는 순간 짐머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열이 납니까? 볼이 왜…….”
짐머가 붉게 타오르는 타냐의 뺨을 가리켰다.
“쉿, 조용히 좀!”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그녀는 얼른 짐머를 끌고 거실로 갔다.
“왜 그러십니까? 저희 단장님은……?”
“주무세요.”
그러면서 타냐가 눈짓으로 부엌을 가리키자 짐머는 더 알쏭달쏭한 표정이 되었다.
“거긴 부엌 아닙니까?”
“예.”
“설마 저기서 주무신다고요?”
“밤새 우리 아가씨와 함께 계시다가 잠드신 것 같아요.”
“예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 단장님이, 밤새도록 후작 부인과 함께, 부엌에 계시다가, 거기서 잠이 드셨다?”
“예!”
“옷은…… 입고……?”
“아쉽게도요.”
“아쉽군요.”
짐머의 입에서도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젠장…….’
조리대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던 크리스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지만, 결코 작지 않은 소리였다. 귀가 밝은 크리스틴에게는 더더욱.
*** 크리스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2층 방으로 올라왔다.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고 셔츠의 단추를 잠그다가 거울 속에서 짐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 다물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시무시한 경고를 날렸다.
“물론입니다. 단장님.”
하지만 짐머에겐 그 경고가 위력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눈가에 가득한 저 웃음은 여자의 환심이나 사려고 부엌에서 잠이 든 빙충이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젠장…….’
식탁에 앉는데 타냐가 계속 방긋거리는 것도 크리스틴은 마음에 안 들었다.
“부족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백작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 가서 일 보도록.”
최대한 근엄하게 명령했다. 기사단장인 그에겐 원래부터 위엄과 근엄함이 몸에 배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백작님.”
타냐가 아델을 힐끔 보고는 씩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크리스, 나는 지금까지 타냐와 한 식탁에서 식사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하녀를 내 식탁에 같이 앉히겠다?”
“응, 우리 집에 왔으니 내 방식에 따라주면 좋겠어.”
크리스틴의 눈빛이 어찌나 살기 가득한지 그의 뒤에 있던 타냐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둘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백작의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맛있게들 드세요. 전 탈이 났는지 아침 생각이 없네요.”
타냐는 적당히 구실을 지어내 도망치려고 했다.
“그럼 짐머 경이라도…….”
아델이 쳐다보자 짐머 역시 거세게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전 원래 아침 안 먹습니다. 맛있게들 드십…….”
타냐와 짐머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 순간 들려온 조용한 명령.
“다들 앉아.”
“헛, 예!”
“예, 백작님!”
빛의 속도로 그들은 식탁 의자에 착석했다. 크리스틴은 못마땅한 얼굴로 세 사람을 둘러본 후 다시 근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먹지.”
그러자 아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맛있게들 먹어요. 오늘 빵은 특히 더 맛있을 테니.”
“아델, 그만!”
크리스틴이 나이프를 세워 들며 위협했지만 소용없었다.
“빵 반죽을 백작님께서 하셨거든요.”
푸핫! 수프와 물을 마시던 짐머와 타냐는 그대로 뿜어내고 말았다.
“젠장……!”
제국의 영웅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 우는 아이들도 울음을 그치게 한다는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의 단장.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 황녀는 물론 모든 사교계 여인들의 마음속 연인. 그런 그가 밤새도록 부엌에 있었던 걸로 모자라서 빵 반죽까지 했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오늘 칼라임의 가장 핫 뉴스가 분명했다. ***
“문서는 찾았나?”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크리스틴이 물었다. 제복을 입은 그는 근엄 그 자체였다. 밤새도록 부엌에서 빵 반죽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짐머 역시 평소처럼 진지하고 깍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수리를 핑계 삼아 집안을 전부 뒤졌지만 문서 같은 건 보지 못했습니다.”
“아델의 침실은?”
“부인께서 출입을 금하셔서 거기만 못 찾아봤습니다.”
사실 짐머는 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아델에게 있을지 모를 백지 문서를 수색한 것이다. 그 핑계로 왕 꽃무늬 벽지에 대한 로망을 실현시켜 보고자 했지만.
“제일 의심스러운 곳이다.”
“그래서 이번엔 고용인들을 시켜 찾아볼까 합니다.”
“됐다. 침실은 당분간 놔둬.”
“알겠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짐머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의 상관은 냉정하게 대화를 거부했다.
“생각할 게 많으니 말 시키지 말도록.”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날카로운 옆모습이 마치 베일 것처럼 서늘해서 도저히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짐머는 턱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젯밤은 두 분이 정말 반죽만 하셨을까? 진짜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크리스틴의 눈동자가 창밖에서 짐머에게로 옮겨졌다. 살기를 스멀스멀 끌어올리면서. 그러나 짐머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감고 계속 중얼거렸다.
“더구나 겨울엔 한창 욕망이 충만한 시기에, 후작 부인의 냄새는 참기 힘들다고 하셨는데 말이야. 밤새도록 정말 반죽만 하셨다면 이거야말로 문제…….”
“짐머 크라이튼.”
풀네임을 부르는 서늘한 목소리에 짐머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다 살기 그득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기겁을 했다.
“헛, 죄송합니다! 마음의 소리가 그만 입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 마음의 소리가 한 번만 더 들리면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예, 알겠습니다!”
짐머는 금방 절도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존경스럽습니다.”
“됐다. 존경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크리스틴의 경고에도 짐머는 소신 있게 상관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정말이지 고자가 울고 갈 인내심입니다.”
슈칵!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크리스틴의 검이 바람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짐머가 앉아 있던 마차의 방석은 처참하게 두 동강이 났다. 몰론 짐머는 십 년 감수한 얼굴로 피했지만. 의외로 죽이 잘 맞는 한 쌍이었다. *** 한편 크리스틴과 짐머를 배웅한 후 아델과 타냐는 본격적인 디저트 작업에 돌입했다.
“깜짝 놀랐어요. 저세상 미모에 지옥의 포스를 뿜어내는 백작님께서 밤새도록 빵 반죽을 하셨다니.”
타냐가 소리 내 웃자, 아델도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나도 조금 놀랐어. 정말 해줄 줄 몰랐거든.”
“아가씨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는 거 같아요.”
“어렸을 때도 그랬어. 안 한다고 투덜대면서도 결국 다 따라줬거든. 그게 참 귀여웠는데.”
“상상이 안 돼요. 귀여운 백작님이라니.”
“사실은 나도 그의 귀엽던 모습이 가물가물해. 지금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칼라임의 영웅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일은 전부 비밀이다? 영웅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물론이죠. 발설했다간 제 목숨이 위태로울걸요.”
타냐는 영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영리한 타냐는 아델이 유난히 기분 좋다는 걸 느꼈다. 커스터드 거품을 만들며 콧노래를 부르고, 오븐에서 잘 익은 슈를 꺼내면서 손뼉을 치는 게 아닌가? 확실히 차분하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 분 정말 밤새도록 빵 반죽만 하셨어요?”
삐끗! 동그란 슈 안에 커스터드 크림을 채워 넣던 아델의 손이 미끄러졌다.
“당연하지! 그럼 부엌에서 달리 뭘 하겠어?”
아델의 목소리가 어색할 정도로 커졌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타냐가 아니었다.
“흠…….”
“정말 반죽만 했다니까!”
“그럼요. 동생과 다름없는 분이랑 뭘 했겠어요. 그렇죠?”
“당연하지. 근데 좀 덥지 않아? 창문 좀 열자.”
아델은 붉어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얼른 창가로 갔다. 활짝! 주방 창을 열자 알싸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쳤다. 새하얀 자작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이 좋아서 아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건 꿈이었을까? *** 크리스틴에게 빵 반죽을 맡긴 아델은 조리대에 엎드려 깜빡 졸았다. 그러다 오른손이 간지러워서 눈을 떴다. 그가 약을 발라주고 있었는데, 상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옆모습이 다정했다. 마치 자신의 상처처럼 안타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가물거리는 등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델…….”
제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도 유난히 듣기 좋았다.
“앞으로는 뭐든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 참지도 말고, 견디지도 마.”
그는 내가 잠에서 깬 걸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꿈을 꾸는 걸까?
‘그래, 꿈일 거야. 이렇게 행복하고 따뜻하니까.’
아델은 이 행복한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다시 눈을 감았다.
“쓸 줄도 모르는 단검 같은 거 휘두르지 않게 해줄게…….”
그의 목소리가, 그의 말이, 너무 위안이 되어서 아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록 꿈 일지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마음 놓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울었나 보다. 그의 손가락이 쓸고 지나가는 눈가가 촉촉했다. 아델은 결국 눈을 떴다. 푸른빛이 가득한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켰다.
“크리스…….”
“더 자.”
마치 주문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입술에 와닿는 부드러운 숨결.
‘그래, 전부 꿈일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달콤하지.’
***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아델은 덧그리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눈을 감고 입술에 닿았던 그 감각들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닿았던 걸까? 아니면 그저 숨결이 스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릿한 전율이 아델의 몸을 휘감았다.
“아델! 아델!”
그때 뒤에서 들려온 미아의 목소리에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돌아보자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헐떡이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왔어?”
자주 있는 일이라서 아델은 평온한 얼굴로 인사했다. 하지만 미아는 하루 사이에 바뀐 그녀의 집 안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세상에! 백작이 이 집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그러게. 중간에 인부들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면 나도 우리 집을 못 찾을 뻔했어.”
“그럼 집수리는 다 끝난 거야?”
“응.”
“그러면 저기 들어오는 마차들은 다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