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당하기만 할 줄 알았니?
(19/155)
19화. 당하기만 할 줄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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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당하기만 할 줄 알았니?
2022.04.08.
쨍그랑!
장미무늬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 긴장했나 봐요.”
과장되게 당황한 시늉을 하며 아델은 허둥지둥 찻잔을 주웠다.
“괜찮아요, 부인. 찻잔이 깨졌으니 조심하세요.”
에이프릴이 말리는 순간이었다.
“앗!”
아델의 손가락에서 빨갛게 피가 베어 나왔다.
“괜찮으세요, 부인? 당장 의원을 부르세요!”
시종 장을 향해 소리치는 에이프릴에게 아델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살짝 베인 것뿐이에요. 손수건으로 감싸고 있으면 돼요.”
그러더니 아델은 세이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미안한데, 세이라. 구두를 좀 벗겨주겠니?”
“뭐……라고요?”
세이라가 기가 찬 표정으로 노려보자 아델은 천연덕스럽게 발을 내밀었다.
“발이 젖은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손을 다쳐서.”
조금 전까지 아델을 새어머니라고 부르며 온갖 친한 척을 했던 세이라였다. 그러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딸에게 얼마든 시킬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어서.”
모두 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에이프릴을 제외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마지못해 세이라가 아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무릎 위에 발을 올렸다.
“도와줘서 고맙구나, 세이라.”
여기저기에서 수군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이면 사교계에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다.
제국의 보석 세이라 오스월드, 칼라임의 악녀 아델의 앞에 무릎을 꿇다!
그 치욕적인 생각만으로도 세이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더 치욕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쩜, 두 분 사이가 참 보기 좋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에이프릴만 혼자서 흐뭇해했다. 그러자 아델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세이라는 가끔씩 제 발을 주물러 주기도 한답니다.”
당신, 미쳤어?
세이라가 분노한 얼굴로 아델을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델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황녀에게 웃어 보였다.
“지금도 발을 주물러주겠다고 하네요. 손가락이 길어서 정말 시원하답니다.”
“어머, 그렇겠군요.”
에이프릴이 두 손을 모으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아델은 다시 세이라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세이라, 나보단 황녀님의 발을 주물러 드리는 게 어떻겠니? 네 솜씨를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
세이라는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억지로 웃었다.
“어머니, 그건 황녀님께 결례가 아닐지요. 발은 아무에게나 만지게 해선…….”
에이프릴이 얼른 말했다.
“전 괜찮아요! 궁금하네요, 세이라 양의 솜씨가.”
“괜찮으시다잖니, 세이라. 어서 해드리렴.”
아델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허락을 한다는 듯.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황녀의 시녀들도 아델의 편을 들고 나섰다.
“황녀님께서 정말 궁금하신가 봐요, 세이라 양.”
“부러워라. 세이라 양의 솜씨를 보여드릴 좋은 기회네요.”
그녀들은 결코 아델을 돕기 위해 편드는 게 아니었다. 사교계의 속성이라는 게 원래 그랬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숙이지만, 조금이라도 약해지거나 틈을 보이면 끌어내려서 물어뜯고 싶어 했다.
다들 마음속으로는 세이라를 조롱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럼.”
세이라는 하는 수 없이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어쩜, 정말 손가락이 길고 아름다우시네요. 이런 손이라면 진짜 시원하겠어요.”
“황녀님의 발을 주무르다니 이런 영광된 기회가 어딨겠어요.”
여인들이 세이라를 조롱하는 재미에 한창 빠져 있을 때였다.
아델은 자연스럽게 황녀의 디저트 접시와 세이라의 접시를 바꿔치기했다.
이것이야말로 ‘뿌린 대로 거둔다.’의 정석이었다.
***
뿌우우웅!
차를 마시며 까르르 웃던 여인들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면서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뿌웅, 부르륵…… 부륵……!
그때 재차 이어지는 적나라한 소리에 다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스 부인, 괜찮으세요?”
그러자 세이라는 옆에 있던 한스 부인에게 자상한 얼굴로 물었다.
“저, 저요?”
한스 부인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 해괴망측한 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예, 전 당연히 괜찮아요!”
하지만 세이라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황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황녀님, 잠시 한스 부인과 함께 산책을 다녀와도 될까요?”
“예, 그렇게 하세요.”
에이프릴은 민망해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전 괜찮아요! 진짜 괜찮다고요!”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치는 한스 부인을 세이라가 다독였다.
“누구나 겪는 일이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어서 나가요, 부인.”
“저 아니라고요! 진짜 저 아니에요!”
한스 부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생리현상에 이상이 없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몹시 급했던 세이라는 괴력을 발휘해 그녀를 끌고 나갔다.
“정말 천박한 출신은 어쩔 수 없네요.”
“그러게요. 대체 뭘 먹고 다니기에 이런 썩는 냄새가…….”
황녀의 시녀들은 코를 잡으며 한스 부인의 흉을 보았다.
한스 부인은 재력가였지만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세이라를 따라다닌 덕에 사교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러니 귀족 출신인 황녀의 시녀들은 속으로 그녀를 무시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사교계와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하는 아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종장이 황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오스월드 부인을 찾으신답니다.”
“어머니께서 부인을요?”
시종 장은 아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내하겠습니다, 부인.”
***
“부르셨습니까, 폐하?”
단정한 제복 차림의 크리스틴이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커다란 책상 앞에서 심각하게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황제는 그를 보자 반갑게 웃었다.
“어서 오게, 백작!”
40대 중반의 황제 얀 발렌시아는 큰 키에 마른 체형으로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즉위 초반에는 온화한 성품이었던 전대 황제와 많은 비교가 되곤 했었다. 특히 5인의 원로 귀족 회가 그를 가장 못 마땅해했다.
전쟁 중에 전대 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지만 않았더라면, 황위는 자연스럽게 황제의 어린 아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돌연 숨을 거둔 것은 한창 이웃 나라와 교전 중인 시기였다. 게다가 칼라임의 성들이 하나둘 함락되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급박한 상황. 제국에는 이 상황을 지휘할 통솔력을 가진 황제가 필요했다.
원로 귀족 회에서도 결국 죽은 황제의 동생인 얀 발렌시아 대공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얀 발렌시아는 이웃의 작은 나라들까지 차례로 정복하며 영토를 넓혔다. 덕분에 지금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드높았다.
“한잔하겠나?”
책상 앞에서 나온 얀은 투명한 황금색 술병을 들어 올리며 눈을 찡긋했다.
“훈련 중입니다.”
단호한 대답에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술병째 입에 대고 들이켰다.
“곧 임관식이로군. 자네가 근위대를 맡아주면 정말 든든할걸세.”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에이프릴은 언제 아내로 맞이할 건가? 임관식 때 약혼까지 해버리는 건 어떻겠나?”
“황명입니까?”
크리스틴의 반응은 딱딱하고 무례하기까지 했다.
얀의 미간이 일그러지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탁, 내려놓았다.
“자네가 후작 부인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얘긴 들었네. 어디까지나 내가 지시한 문서를 찾기 위해서였겠지?”
“개인적으로 조사할 것도 있었습니다.”
“내 경고 잊지 말게. 에이프릴이 속상할 일은 만들지 말라는.”
순간 크리스틴은 난처한 듯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저는 황녀님께 어떠한 미래도 약속드린 적이 없습니다.”
크리스틴에게 다가간 얀은 단정한 제복을 괜히 바로잡아주었다.
“잘 알잖나? 자네는 곧 나의 든든한 부마가 될 걸세. 그러려면 에이프릴과 서로 사랑하는 모양새를 갖춰야지. 솔직히 후작 부인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은 없네. 그러나 다른 사람이나 에이프릴이 의심하고 눈치를 채서는 곤란하겠지.”
크리스틴은 제복의 견장을 매만지는 얀의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곤란해지는 건 제가 아닙니다, 폐하.”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청회색의 눈동자.
“……!”
분노를 억누르느라 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크리스틴에게서 손을 잡아 빼내며 황제답게 명령했다.
“한 달을 주지. 그 안에 백지 문서를 찾고 후작 부인의 집을 나오게.”
“모든 건 제가 정합니다.”
얀이 서슬 퍼렇게 노려보았지만,
크리스틴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도 자네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나?”
이건 협박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럼 황녀님께도 제 정체를 털어놓아야겠군요. 그래도 폐하께선 저와 결혼을 강행시키실 거고, 심약한 그분은 매일 밤 두려움 속에서 제 옆에 눕겠지요. 그리고 저는 짐승이라 욕정을 다스릴 줄 모른답니다.”
“네노오옴!”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얀이 술병을 집어던졌지만 크리스틴은 가볍게 잡았다. 그뿐 아니라 힘주어 움켜쥐는 순간 손안의 술병은 ‘팟!’ 터지듯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크리스틴의 손안에서 유리 조각들이 반짝이며 떨어지자 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인간과 다른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 새삼 두려워진 것이다.
“잊지 마십시오. 얀 발렌시아 대공을 황제로 만든 게 누구인지.”
이것이야말로 협박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크리스틴은 곧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탁!
그가 문을 닫고 나갔지만, 얀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놈을 너무 키웠어……!”
온 세상이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칼라임의 황제.
그런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저 거만한 눈이라니!
하지만 소득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약점이라곤 없는 것 같던 저 짐승 놈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아델 오스월드…….
결코, 단순히 아는 사이는 아닌 것이다.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사나운 수컷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를 제어할 고삐가 되어 줄 수도.
***
황후는 사냥을 다녀오는 길인 것 같았다.
승마복 차림에 손에는 말 채찍을 든 채 황궁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녀의 옷 여기저기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그녀는 하급 기사 가문 출신으로 황제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고 했다. 그로 인해 원로 귀족 회에선 황후의 출신과 자질을 문제 삼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든 황후는 원로 귀족회 가문의 영애들이었으니까.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델이 인사하자,
“그동안 형편이 아주 좋아진 것 같네요.”
아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던 황후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해마다 송년 연회에서 가장 초라하게 나타났던 아델이었다. 유행이 다 지난 드레스에 장신구 하나 없는 가난뱅이 후작 부인.
그런데 지금은 입고 있는 옷도, 전체적인 분위기도 훨씬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이토록 화사해진 얼굴이라니.
“모두 두 분 폐하의 덕분이십니다. 제 디저트를 황궁에 납품할 수 있게 허락해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글쎄, 여자들은 남자가 생기면 예뻐진다던데. 특히 돈 많은 남자가 생기면 여러모로 풍족해지겠지요.”
“예?”
놀란 아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후는 가늘게 웃으며 뒤에 있던 시종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피투성이 금발 머리 여인이 끌려 나와 바닥에 무릎 꿇려졌다.
황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델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나는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을 가장 경멸한답니다. 특히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남의 남자를 집적거리는 천박한 족속들은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델은 모욕당한 기분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이 여인은 폐하의 정부인 리네드 부인이랍니다. 남자의 총애만 믿고 감히 황후의 물건에 손을 댔으니 손목을 잘라 버릇을 가르치려고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투성이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황후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곧 시종들에게 붙잡혀 끌려나갔다.
황후는 이번엔 말 채찍의 손잡이 끝으로 아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죠. 우리 에이프릴은 곧 바이스 백작과 혼인 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함부로 몸을 굴려선 곤란해요.”
아델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흘끗거리며 소곤거렸다. 마치 창부를 흉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양손을 꼭 맞잡으며 아델은 황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몰라도, 백작을 그렇게 못 믿으십니까?”
“뭐라?”
“두 분 폐하께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마음에 있는 여자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릴 사람이 아닙니다.”
“입 닥치세요!”
황후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델은 고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상 백작의 명예를 의심하는 말씀은 제가 참을 수 없습니다.”
“이이, 네까짓 게 감히!”
황후의 말 채찍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촤아악!
매서운 채찍질 소리가 들리고 허공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꺅!”
놀라서 소리 지르던 아델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을 커다란 그림자가 막아선 것이다.
“바이스 백작!”
사람들이 비명처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