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너의 진심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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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너의 진심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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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너의 진심이 뭐였을까?
2022.04.11.
“바이스 백작!”
사람들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크리스틴이 날아오던 황후의 채찍을 움켜쥔 것이다. 기다란 채찍이 그의 손을 매섭게 휘감으며 피가 튀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황후 폐하?”
하지만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정중하게 물었다.
오히려 그의 앞에서 말채찍을 들고 서 있던 황후가 잔뜩 겁을 먹었다.
“후작 부인과 얘기 중이었습니다. 백작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얘기 중인 거로는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크리스틴은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청회색 눈동자가 소름 돋을 만큼 서늘했다.
그 뒤에 서 있는 짐머와 십여 명이나 되는 수하들의 분위기도 매서웠다. 모두 다 백작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목숨을 버린다던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 출신들이었다.
“지금 감히 나를 추궁하는 겁니까!”
압박감을 못 견딘 황후가 소리를 지르자,
척!
동시에 크리스틴의 수하들은 일제히 황후의 앞을 막아서며 벽을 만들었다. 다시 또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됐다. 모두 물러가.”
그러나 크리스틴의 명령에 다들 소리 없이 물러갔다. 이 정도로도 황후를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말씀 끝나셨으면 후작 부인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황후는 아델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세요. 제국의 영웅도 그 여자의 차 한 잔에 무너질 수 있으니.”
하지만 마지막 독설은 잊지 않았다.
“염려 감사드립니다.”
크리스틴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괜찮아? 황궁 진료소는 어디에 있어? 얼른 거기 가자.”
황후에게서 물러나자마자 아델은 크리스틴을 재촉했다.
“소란 떨지 마. 모기에 물린 것보다 더 아무렇지 않아.”
그는 심드렁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정원의 화단에 걸터앉았다. 이미 눈치 빠른 짐머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게 한 뒤였다.
“어디 좀 봐.”
다가들며 크리스틴의 손을 살피던 아델은 깜짝 놀랐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채찍을 맞은 상처라기보다 다른 데서 이미 다친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손 다쳤었니?”
“검술 연습 좀 하다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무심히 대답했다.
“그런데 왜 끼어들었어. 나랑 황후 폐하의 일인데.”
아델은 속상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상처에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것만으로도 크리스틴에겐 끼어들 가치가 충분했다는 것을.
“안 끼어들었으면 당신이 이렇게 됐을걸.”
“어림없지. 난 재빨리 피했을 거야.”
“그러니까 괜히 도와줬다?”
“물론 도와준 건 고마워. 하지만 앞으로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뜻이야.”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건 싫으니까.
아델은 그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고 보니 이 손수건, 내 거네. 항상 갖고 다녔어?”
크리스틴은 자신의 손에 묶인 손수건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한스 부인의 파티에서 그녀의 다친 손을 묶어준 것이었다.
“돌려주려고 갖고 다녔어.”
아델이 얼른 변명했다.
“집에 있을 때 주면 되지.”
그러면서 크리스틴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아델은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 그의 눈은 꼭 속마음을 읽는 것 같았으니까.
“깜빡했어. 난 뭐 네 손수건 돌려줄 생각만 하고 사는 줄 알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왜 화를 내지?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럴수록 크리스틴은 더 짓궂게 웃었다.
“목소리가 자꾸 커지잖아. 이제 보니 얼굴도 빨개지…… 아아!”
아델이 그의 발을 꾹 밟은 것이다.
“무슨 짓이지?”
크리스틴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썼지만, 아델은 야무지게 경고했다.
“계속 놀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
그는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하여간 성깔 있다니까. 그런 성깔로 황후한테 덤비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오늘은 처음이라서 방심하다가 당한 거야. 다음엔 절대 안 당할 거라고!”
아델이 주먹까지 움켜쥐며 야심 차게 결심했지만,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황후를 상대로 어림없지.”
“진짜라고. 내가 또 당할 거 같아? 오늘 세이라도 멋지게 한 방 먹여 줬는데.”
“세이라 오스월드?”
“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한스 부인의 파티에서 당할 뻔한 걸 생각하면 오늘 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배를 움켜쥐고 끙끙대며 한스 부인을 끌고 가던 세이라를 떠올리니 조금 통쾌했다.
황후 덕분에 그 통쾌한 기분을 만끽할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당신을 응원하지.”
“그럼 나 이제 그만 가볼게. 타냐가 납품을 끝내고 기다릴 거야.”
“데려다줄게.”
크리스틴이 화단에서 일어났지만, 아델은 손사래를 쳤다.
“얼른 가서 손부터 치료받아. 상처 그대로 두면 큰일 나. 우린 이따가 집에서 보고…….”
말을 하던 아델이 멈칫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집에서 보자는 말이 나와버린 것이다.
그는 곧 돌아갈 사람이고, 더 가까워지면 안 되는데 그걸 자꾸 잊어버렸다.
“왜 그래?”
갑자기 아델이 침울해지자 크리스틴이 의아해했다.
“아냐, 아무것도. 나 이제 갈게.”
황급히 돌아가려 그녀를 그가 붙잡았다.
“이따가 집에 가면 당신이 약 발라 줄 거지?”
“황궁 안에 진료소 있잖아?”
“바빠서 치료받을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당신 때문에 다친 거니까, 당신이 책임져.”
이럴 때의 그는 오래전 어린 소년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며 떼를 쓰던 그 아이.
아델은 순순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 구해 놓을게.”
“역시 아델 당신밖에 없어.”
그는 아델의 마음이 약해지도록 예쁘게 눈웃음을 쳤다. 그 소년 때처럼.
“그렇게 웃지 마.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오해하잖아.”
“겨우 이걸로?”
크리스틴은 손가락으로 아델의 머리카락을 쓱 넘기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놀란 아델이 쳐다보자 그가 눈을 찡긋했다.
“이 정도는 해야 오해받아도 덜 억울하지.”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인 그는 성큼성큼 가버렸다.
***
‘진짜, 어쩌려고…….’
크리스틴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아델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이 자꾸 울렁거렸다.
그를 볼 때마다 욕심이 생겨버렸다.
머릿속으로는 에이프릴과 잘 되길 빌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곱게 그를 보내주지 못했다.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 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온통 비틀린 생각만 들었다.
그를 갖고 싶었다. 그의 결혼을 막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얼거리던 아델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진짜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허겁지겁 몸을 돌리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세이라와 마주쳤다.
잠깐 사이 세이라는 10년쯤 늙어버린 것 같았다. 배를 움켜쥔 채 한스 부인의 부축을 받아 비틀대며 걷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이 악독한 게 디저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델을 본 그녀는 머리채라도 잡아 뜯을 것처럼 사납게 달려들었으나, 다시 이상 신호가 오는지 배를 움켜쥐었다.
“끄으으응!”
그 사이 아델이 침착하게 다가갔다.
“무슨 짓은 네가 했지, 세이라.”
“끄응, 무슨 개소리야!”
“황녀님의 디저트에 슈가 파우더 대신 이상한 가루를 듬뿍 뿌린 게 누구였더라? 난 그걸 바꿔치기했을 뿐이고.”
세이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한 짓을 아델에게 들킨 것이다.
그런다고 순순히 꼬리를 말고 물러갈 그녀가 아니었지만.
“억지 부리지 마! 네가 디저트에 독을 탔잖아. 가서 전부 얘기하겠어!”
아델은 침착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고, 너만 그 모양이니 누구 말을 더 믿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본 대로 전부 얘기할 거고.”
세이라는 더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델이 하는 말 따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델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세이라와 그녀의 잔당들의 말 몇 마디면 그게 진실이 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델의 뒤에 바이스 백작이 있었다. 그가 아델의 편을 들고 조사라도 한다면 세이라가 한 짓은 모두 드러날 것이다. 바이스 백작이 마음만 먹는다면 세이라가 하지 않은 짓까지 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으리라.
그는 이 황궁에서 황제 다음의 권력자였으니까.
“더러운 여자! 언제까지 백작의 뒤에 숨어서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난 백작 뒤에 숨은 적 없어. 가문의 이름 뒤에 숨어서 못된 짓을 저질러 온 건 너였지.”
“이게 진짜!”
하지만 세이라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끄으응…… 소리를 내며 한스 부인에게 매달렸다.
“다시…… 가…… 요…… 아으으……!”
“또 마려워요?”
한스 부인의 노골적인 질문에 세이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천박한 소리예요!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래요!”
“아, 알았어요.”
한스 부인은 다시 그녀를 부축해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델은 씁쓸하게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이라를 보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겉으로는 아무리 당당한 척을 했지만, 오스월드가의 사람들은 항상 위협적으로 느껴졌으니까.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긴장을 한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저도 모르게 크리스틴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세이라의 말대로 그의 뒤에 숨어서 잘난 척하는 걸지도.
그리고 제 분수도 모르고 그를 욕심까지 내고 있었다.
‘아델, 너 정말 염치없구나.’
하지만 이 마음을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저 좋은 누나처럼 곁에 머물며 바라만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아무도 다치지 않게, 상처받지 않게…….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 한참 찾았어요.”
그때 타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아델을 찾아다녔는지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얼른 돌아가자.”
“그런데 리본 끈은 어디 두셨어요?”
마차 안에서 내내 그걸 신경 쓰던 아델이 아니던가?
“응?”
아델은 놀라서 얼른 자신의 머리를 매만져 보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 묶여 있던 초록색 리본이 없어졌다.
분명히 황후를 만나러 갈 때까지는 하고 있었는데…….
황후와 헤어지고 나서 떨어트린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황궁 정원 어딘가에 흘린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얼른 찾아올게.”
“아가씨!”
타냐가 불렀지만, 아델은 어느새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틴의 선물이었다.
10년이 아니라 평생을 간직하고 싶은 것.
***
“정말 느긋하십니다, 폐하!”
“무엇이 말이오?”
“바이스 백작과 후작 부인을 저대로 둘 생각이세요?”
리본 끈을 찾느라 왔던 길을 되짚어 오던 아델은 멈칫했다.
정원의 높은 관목 나무숲 뒤에서 황제 부부의 대화가 들린 것이다. 은밀한 밀담이라도 나누는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들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았다.
하지만 아델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자신과 크리스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하지 않소.”
“하, 오누이요? 그들이 오누이라면 폐하와 저도 오누이겠습니다. 후작 부인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고요.”
“하하하!”
“웃지만 말고 어서 백작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하세요. 그 끔찍한 여자에게 홀려서 정신 못 차리면 어쩌려고요!”
“사실은 후작 부인과 친해지라고 시킨 게 나였소.”
“폐하께서요?”
“뭘 좀 찾을 게 있어서 말이오.”
“찾다니요, 그 여자한테서 말이에요?”
“음. 죽은 후작이 남긴 문서가 하나 있는데, 그걸 아무래도 후작 부인이 갖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럼 그 문서를 찾기 위해 백작이 일부러 접근했다는 건가요?”
“그렇소. 그러니 모른 척하시오. 한 달 뒤면 그 문서를 찾고 에이프릴과 성대한 약혼식을 하게 될 테니.”
“아아,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괜히…….”
툭! 툭! 투둑!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델은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