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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캐슬러 남작에게로 (21/155)


21화. 캐슬러 남작에게로
20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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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으세요, 이러다 감기 드시겠어요.”

마차 안에서 타냐가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델은 넋 놓고 앉아 있기만 했다.

타냐가 황궁 정원에서 비를 맞고 있는 그녀를 찾았을 때부터 계속 이랬다. 갑자기 내린 비로 온몸이 흠뻑 젖었는데도 피할 생각은커녕, 비가 내리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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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가 아프시면 제가 더 곤란하다고요.”

하는 수 없이 타냐는 제 손으로 그녀를 닦아주었다.

아침에만 해도 예쁘게 웨이브를 살린 머리는 볼품없이 젖어 있었다. 그 비싼 실크 드레스도 젖어서 후줄근했다.

하지만 제일 엉망인 건 아델의 얼굴이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텅 비고 어두워진 초록색 눈동자.

마치 오스월드가에 있을 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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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타냐가 조심스럽게 아델의 손을 감싸 쥐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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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었어.”

아델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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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라 아가씨가 또 못된 짓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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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져서.”

아델은 마차의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더는 아무 말도 시키지 말라는 무언의 요청이었다.

타냐는 하는 수 없이 아델의 어깨 위에 겉옷을 덮어준 후 불안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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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꺅!”

시내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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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에요? 아가씨가 다치실 뻔했잖아요!”

타냐가 마부석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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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누가 갑자기 쓰러져서요.”

그제야 아델은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사나운 비가 퍼붓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웬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놀란 아델이 얼른 마차에서 내리자 타냐도 우산을 챙겨서 내렸다.

자세히 보니 쓰러져 있는 것은 열 살 남짓의 사내아이였다. 아이의 온몸은 멍과 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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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부딪힌 게 아니에요. 이 아이가 갑자기 뛰어들더니 쓰러졌다고요.”

아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마부와 타냐를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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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어서 마차에 태워요! 타냐, 근처에 가까운 진료소가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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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가까운데도 30분 이상은 걸릴 거예요. 그리고 이미 문 닫을 시간이고요.”

잠시 생각하던 아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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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러 남작의 집이 이 근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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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앞에서 미루나무 길로 꺾어지면 바로 보일 거예요.”

두 사람은 예전에도 급한 환자를 데리고 마크의 집을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는 수의사였지만 가난하거나 위급한 사람들을 진료하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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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로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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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부인?”

아델을 본 마크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녁 시간에 난데없이 찾아온 손님. 게다가 그가 앞치마를 두른 차림으로 맞이한 첫 손님이 아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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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급한 환자가 있어서.”

마크는 마부가 안고 있는 피투성이 아이를 보자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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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진료소로 옮겨요!”

마크의 저택 한쪽은 진료소로 쓰고 있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환자용 침상과 온갖 약품과 의료기구들이 빼곡하게 정리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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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심각한가요?”

침상에 눕혀진 아이를 보며 아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이를 살펴보던 마크는 다소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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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타박상 외에 심각한 상처는 없네요. 팔이 찢어지면서 출혈이 있었는데, 잘 봉합하고 처치하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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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의식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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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실조 때문일 거예요.”

아이는 누가 봐도 영양실조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깡말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델에게도 낯이 익은 아이였다. 아이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로 유명했는데, 술을 구해오라며 아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는 했다. 동네 사람들이 말린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이번에도 아버지에게 맞아서 이렇게 됐으리라.

찢어진 팔에서 피를 흘리며 빗속을 도망쳤을 아이를 생각하니 아델은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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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 돌아가서 핸리랑 같이 저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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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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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낼 거라고 얘기해줘. 그리고 앞으로 저 아이를 또다시 다치게 하면 그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전해. 아마 핸리에게 얘기하면 알아서 잘 해결해 줄 거야.”

비록 힘없는 후작 부인이었지만, 그래도 오스월드가의 이름이라면 어느 정도 위협은 될 것이다. 핸리라면 누구보다 그걸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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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어요!”

타냐가 마부와 함께 돌아갔다.

그제야 아델은 문 뒤에서 예닐곱 살의 사내아이가 빼꼼히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갈색 곱슬머리에 초롱초롱한 파란 눈이 귀여웠다.

마크의 아들 제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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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제이드. 이리와 보렴.”

아델이 손을 내밀자 제이드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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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예의 없이 굴면 안 돼. 공손하게 인사드려야지.”

아이를 치료 중이던 마크가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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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미안해, 제이드.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아델이 상냥하게 웃자, 제이드도 배시시 웃으며 문 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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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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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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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만든 쿠키 맛있어. 미아 고모가 말해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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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래? 나는 빵도 잘 만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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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수프랑 콩 요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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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러자 제이드가 맑은 파란 눈으로 마크를 간절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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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줌마한테 해달라고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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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제이드. 손님에게 무례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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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웩, 아빠 요리는 진짜 맛없단 말이야! 양말 맛이야.”

아이가 혀를 빼물며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몰랐다.

마크가 난처해하며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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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을 해주던 하녀가 며칠 전 그만뒀거든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식사를 준비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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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앞치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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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마크는 아직까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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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잘 어울리세요.”

그가 민망한 듯 눈썹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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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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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에요. 그럼 진료를 보시는 동안 식사 준비는 제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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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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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도와주셨으니, 저도 뭔가 도와드려야죠. 부엌이 어디니, 제이드?”

 

***

부엌으로 들어온 아델은 깜짝 놀랐다.

조리대가 음식 재료와 조리 기구들로 빈틈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요리를 만들려고 했는지 맥락을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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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와 전쟁 중이었나 보네.”

아델은 조리대부터 정리했다.

그때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던 제이드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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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얀 리넨 블라우스와 붉은 체크 스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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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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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젖었어. 그러면 감기들어. 입어.”

그러고 보니 아델의 실크 드레스는 빨래를 하고 난 것처럼 푹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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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너 진짜 똑똑하구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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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가지고 뭘.”

어른스럽게 겸양까지 하는 제이드를 보며 아델은 결국 소리 내 웃었다.

그녀가 얼른 옷을 갈아입고 요리를 시작하자, 옆에서 제이드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도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이는 계속 까르르 웃으며 아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덕분에 아델도 잠시 크리스틴의 일은 잊을 수 있었다.

아델이 식탁을 차릴 무렵 마크가 넉살 좋게 웃으며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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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우리 집에서 나는 냄새가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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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재료들로 대충 만들어봤어요. 어서 앉으세요.”

하지만 마크는 멈춰선 채로 한동안 아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아델은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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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잘못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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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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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제 드레스가 젖어서 갈아입었어요.”

제이드가 얼른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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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줬어! 엄마랑 똑같아!”

그제야 아델은 이 옷이 제이드의 죽은 엄마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남자 둘만 사는 집에 다른 여자 옷이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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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몰랐어요. 제가 큰 실례를 범했네요.”

아델이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하자,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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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잘하셨어요. 자, 얼른 식사하죠. 보고만 있으려니 고문이네요.”

짧은 시간 동안 아델은 머쉬룸 스프와 완두콩 퓌레가 얹어진 빵, 샐러드, 닭고기 요리 등 그럴듯한 식탁을 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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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아이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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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어요. 깨어나면 수프라도 먹이려고요.”

그때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상처투성이 아이가 식당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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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됐다. 같이 먹자.”

아델은 얼른 가서 아이를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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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같이 먹어도 돼요?”

놀란 아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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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식기 전에 어서 먹자.”

마크도 사람 좋게 웃으며 아이 몫의 스프와 식기들을 놓아주었다.

네 사람이 모두 식탁 앞에 앉자 마크는 양손에 포크와 스푼을 든 채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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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 호탕한 목소리에 제이드와 아이도 따라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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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세 남자는 곧 허겁지겁 식사하기 시작했다.

조촐한 식탁 위에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와 그들이 말하고, 음식을 씹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아델은 오래전 크리스틴과 함께 지낼 때가 떠올랐다. 그와 그녀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음식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다. 그때마다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던 어머니의 기분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밖은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따뜻하고 정겨운 식사였다.

***

식사를 마친 두 아이는 졸린다며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이제 식당에는 아델과 마크 두 사람뿐이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다시 크리스틴에 대한 생각이 아델의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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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후작 부인과 친해지라고 시킨 게 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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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문서를 찾기 위해 백작이 일부러 그 여자에게 접근했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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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그러니 모른 척하시오. 한 달 뒤면 그 문서를 찾고 에이프릴과 성대한 약혼식을 하게 될 테니.”

 
크리스틴이 정말 일부러 내게 접근한 걸까?

후작의 백지 문서를 찾기 위해서?

그는 역시 나를 용서한 게 아니었나?

그런 것도 모르고 혼자 얼마나 들 떠 있었던가? 동생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에이프릴과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해놓고서는.

아델은 그가 밉기보다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스스로가 부끄럽고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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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댁에서는 결례가 많았습니다.”

마크의 목소리에 겨우 생각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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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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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볼에 입맞춤한 거…….”

부끄러워하며 마크가 콧등을 긁적였다.

이렇게 수줍음 많은 남자가 그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나 싶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 바이스 백작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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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백작이 무례하게 굴어서 제가 더 죄송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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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시면 한잔하실래요?”

어느새 마크가 와인 병과 잔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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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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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술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인걸요.”

아델은 힘없이 웃었다. 하기야 오늘 같은 날은 술이 필요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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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딱 한 잔만요.”

쪼르르르…….

붉은 와인이 투명한 유리잔을 채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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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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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은?”

귀가한 크리스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물었다.

우산을 들고 그를 맞이하러 나온 핸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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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러 남작의 저택에 계신답니다.”

순간 크리스틴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깊이 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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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러 남작의?”

저택의 다른 하인들과 함께 서 있던 타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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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아이가 있어서 거기 데려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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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아이를 수의사에게 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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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소가 이미 문 닫을 시간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틴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타냐는 왠지 겁이 났다. 이상했다. 그는 평소처럼 잘생긴 얼굴 그대로였는데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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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지. 그런데 이 시간까지 왜 아직 안 돌아온 거지?”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저녁이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아델은 마크와 교재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귀가가 늦어진다는 건 두 사람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

그런데 크리스틴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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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이가 회복되는 걸 보려고 기다리시는 모양입니다.”

타냐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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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주인의 안전과 평판을 지키는 게 자네의 임무 아니었나?”

크리스틴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나직했다. 하지만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서늘함이 가득했다.

아델이 어려워하던 핸리 역시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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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주인님. 곧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핸리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외출준비를 하는데, 크리스틴은 어느새 말에 훌쩍 올라타 고삐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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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랴 핫!”

그를 태운 말이 빗속을 사납게 질주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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