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청혼을 받아주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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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청혼을 받아주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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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청혼을 받아주실 겁니까?
2022.04.18.
쪼르륵…….
아델이 비운 와인 잔을 마크가 붉게 채웠다.
“덕분에 정말 즐겁고 맛있는 저녁 식사였습니다.”
“저도 즐거웠어요.”
와인 한 잔에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 탓이었을까? 마크는 속에 있던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실은…… 아까 아내가 잠시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어요. 그녀가 있었으면 늘 이렇게 따뜻한 저녁 시간이었겠구나 싶었죠.”
“아내 분이 제이드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예, 제이드는 엄마를 초상화로만 봤죠. 초상화 속 아내가 부인이 입은 그 옷을 입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마 그 옷을 가져왔나 봐요.”
“엄마가 많이 그리웠나 보네요.”
아델의 곁에서 계속 해맑게 웃던 제이드였다. 그런데 예닐곱 살의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 옷을 가져왔는지 알게 되자 안쓰러워졌다.
“그 옷을 건네준 사람은 부인이 처음이었어요. 다른 사람은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데. 심지어 저조차도.”
마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러다 아델과 시선이 마주치자 민망해서 콧등을 긁적였다.
“이거, 비가 와서 그런지 자꾸 감상에 빠져드네요.”
마크가 변명하자 아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비는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하죠. 특히 겨울비는.”
아델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창밖으로 빗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는데 가고 싶지 않았다. 가서 크리스틴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몰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비가 더 많이 내려서 갈 수 없게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취해버렸으면…….
“사실 그때 뺨에 키스한 거, 목숨 걸고 했던 겁니다.”
아델이 쳐다보자 마크가 얼굴을 붉혔다.
“백작에게 선공을 날리고 싶은 기분이었달까요. 제게 그런 위험한 기질이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백작은 제 동생인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되물으면서도 아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았으니까.
아델을 깊이 응시하던 마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제가 청혼을 한다면 받아주실 겁니까?”
“청혼…… 이라니요?”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아내가 죽은 후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게 불가능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인을 보면서 서로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크의 선한 푸른 눈동자가, 진실한 목소리가 아델을 괴롭게 했다.
그의 진심을 이용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저더러 후작을 독살했다는 그 소문을 믿으라는 겁니까?”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믿으시죠?”
“지금까지 부인이 죽어가는 사람을 몇 명이나 데려온 줄 아십니까? 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던 표정은 또 어땠고요. 그런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고요?”
“참회하는 걸지도 모르죠.”
다시 잔을 단숨에 비운 아델은 이번엔 스스로 와인잔을 채웠다.
쪼르르…….
결국, 마크가 그녀를 말렸다.
“천천히 마셔요. 이 비싼 와인을 혼자 다 마실 생각입니까?”
“아아…… 비싼 거라선지 어쩐지 맛있더라.”
아델은 낮게 웃으며 다시 보란 듯 잔을 들이켰다.
“이런, 이제 보니 술주정뱅이였군요.”
마크가 장난스럽게 혀를 내두르자 아델도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그래서 청혼을 철회하실 건가요?”
순간 아델의 표정이 어찌나 요염한지 마크는 조금 당황했다. 장밋빛으로 발그레해진 볼에 사르르 웃는 눈꼬리는 묘하게 색기가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져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부인에겐 제가 더 필요하죠. 술주정뱅이를 옆에서 챙겨 줄 남편이요.”
이상하게 목이 타는 것 같아서 마크는 와인 잔을 얼른 들이켰다.
뭔가 아슬아슬해진 기분이었다.
“남편…… 남편이라…….”
아델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남편이란 의미는 지독한 족쇄였다. 평생 모셔야 할 주인의 다른 이름.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깊은 늪…….
“그리고 설령 부인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쳐요. 하지만 분명히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순 아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공허한 표정으로 다시 잔을 비웠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마세요. 캐슬러 남작…….”
“마크. 마크라고 불러주십시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은 사람이었다.
“청혼을 수락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수락해줄 수 있는 거죠?”
더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크.”
마크가 이번엔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럼 나도 부인을 이름으로 불러야 서로 공평하겠군요. 안 그런가요, 아델?”
“고단수시네요. 좋아요, 그것도 수락하죠. 그럼 이제 가봐야겠어요.”
아델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돌아가기 싫었지만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더이상 여기 있다가는 이 남자에게 말려들지도 몰랐다.
마크 캐슬러.
좋은 사람이었지만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비틀!
걸음을 옮기려던 아델은 현기증이 나서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와인을 너무 마셨는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괜찮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마크가 아델의 어깨를 감싸며 잡아주었다.
“예, 조금 어지러웠을 뿐, 취한 건 아니에요. 절대.”
“네, 안 취했어요. 하지만 술이 좀 깨면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그 순간이었다.
“아니, 지금 데려가야겠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돌리던 마크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이스 백작?”
언제 들어왔는지 크리스틴이 식당 입구에 팔짱을 낀 채 기대 서 있었다. 비를 맞았는지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기가 바닥에 흥건했다.
***
뚜벅뚜벅.
크리스틴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걷는 걸음마다 길게 내려온 케이프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가자, 아델.”
가까이 다가온 크리스틴은 아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낮에 그녀가 상처를 싸매준 손수건이 그대로 묶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좋았었는데…….
아델은 그 손을 차갑게 외면했다.
“먼저 돌아가.”
그녀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아름답고 교활한 독사처럼.
“많이 취했어, 당신.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후회는 이미 하고 있는걸.”
난 왜 바보같이 우리가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너무 오랫동안 외로웠기 때문이었겠지? 너의 거짓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건.
“아델…….”
한편 크리스틴은 인내심이 바닥이 날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재촉했다.
그러나 아델은 완강했다.
“돌아가라고 했어, 크리스. 난 내가 알아서 돌아갈 테니.”
크리스틴은 둘 사이에서 난처해하는 마크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아델을 부축하듯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게 눈에 매우 거슬렸다.
저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게다가 아델은 낮에 입었던 드레스는 어디다 벗어버리고, 제집처럼 편안한 차림이었다.
옷까지 갈아입고서 이 시간에 단둘이 술이라니!
칼을 뽑지 않은 건 크리스틴으로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대체 이 여자에게 술을 얼마나 먹인 거지?”
아델이 발끈해서 마크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술을 먹인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마신 거야. 그리고 나, 취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크리스틴이 조롱하듯 웃었다.
“하, 취한 게 아니라고? 당신 지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서 저 남자의 부축을 받고 있어. 자꾸 이러니까 이상한 소문이 나고 오해를 사는 거 아니야?”
“날 위하는 척하지 마!”
“당신을 위한 충고야.”
아델의 입매가 비아냥거리듯 올라갔다.
“넌 네 여자 일이나 신경 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네가 뭔데 이제 와서 날 위하는 척…….”
눈물을 참느라 그녀의 초록색 눈가가 붉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눈동자는 파랗게 피어오르는 불꽃 같았다.
이러다간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아서 마크가 중재하고 나섰다.
“지금은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백작. 아델은 내가 금방 데려다줄 테니 염려 말아요.”
하지만 크리스틴에겐 그의 말 따윈 들리지 않았다.
“핸리!”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택 밖까지 울렸다.
“예, 주인님!”
때마침 마차에서 내리던 핸리와 하인들이 허둥지둥 뛰어들어 왔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늘 단정하던 핸리는 겉옷의 단추조차 어긋나게 잠근 상태였다.
“부인을 집으로 모시도록.”
“예, 주인님!”
핸리와 하인들이 다가오자,
“됐어요. 내가 알아서 돌아가요.”
아델은 그들을 거부했다.
“부인을 모시고 오지 못하면 다들 해고다.”
“크리스!”
아델의 외침을 외면한 채 크리스틴은 그대로 저택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올 때처럼 다시 말을 몰아 빗속을 달려나갔다.
“그럼 부인은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한시름 놓은 핸리는 마크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리고 아델에게 간절하게 비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부인.”
***
늦은 밤이었지만 아델의 저택은 대낮처럼 불이 환했다. 하인들도 아직 잠들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아까부터 현관 입구에 석상처럼 버티고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전신에선 알 수 없는 살기가 흘렀다. 곁에 다가가는 것조차 겁이 날 정도였다.
그의 부관인 짐머도 잔뜩 긴장한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상황이 분명했다.
모두 크리스틴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빗속을 뚫고 정원으로 들어오는 마차가 보였다.
‘아가씨…….’
타냐는 안도하는 한편 왠지 두려워졌다.
크리스틴이 이토록 저기압인 원인은 아델 때문인 게 분명했으니까. 그녀를 데리러 갔던 그가 저런 얼굴로 혼자 돌아온 걸 보면 둘이 다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늘 밤 별일은 없겠지?
“워! 워!”
마부가 말을 멈추기 무섭게 크리스틴은 마차로 다가갔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안에서 핸리가 나왔다.
“부인께선 잠드셨습니다. 깨울까요?”
아델은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로 곤히 잠든 얼굴은 소녀처럼 사랑스러웠다. 조금 전 고집을 피우며 그의 속을 뒤집어 놓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런 아델을 보며 안도하는 자신에게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안고 가겠네.”
마차 안으로 들어간 그는 조심스럽게 아델을 안고 나왔다.
두 사람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핸리가 얼른 우산을 씌워주었고, 등불을 환히 밝힌 하인들은 저택의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아델을 안고 들어오는 크리스틴을 보며 저마다 안도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훨씬 누그러들었기 때문이다.
“늦었으니 다들 돌아가 쉬도록.”
“예, 주인님.”
몇 시간째 안절부절못하던 하인들은 재빨리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래야 한숨 돌리고 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짐머와 타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확실히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들은 아델을 안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는 크리스틴을 따라 들어왔다.
아델의 침대를 정리하며 타냐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제 제가 아가씨 신발을 벗기고 옷을 갈아입히겠습니다.”
“됐으니 나가봐.”
“예? 하지만 아가씨 시중은 제가…….”
크리스틴이 미간을 모았다. 두 번 말 하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자 짐머는 타냐에게 백작의 말을 들으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자칫하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으니까.
“예, 백작님.”
하는 수 없이 타냐는 울상이 되어 물러났다.
“너도 마찬가지다, 짐머.”
크리스틴은 옆에 붙어 있는 짐머에게도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오늘은 위험한 날입니다, 단장님.”
겨울이었다. 그것도 날씨가 좋지 않은.
게다가 그는 지금 숨이 거칠 정도로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내가 알아서 한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짐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다른 사람이 그를 말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평생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럼.”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짐머는 둘만 남겨둔 채 아델의 침실을 나갔다.
탁!
이제는 크리스틴과 그녀, 단둘뿐이었다.
겨울비가 사납게도 내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