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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그저 옷 벗는 걸 도울 뿐이야 (23/155)


23화. 그저 옷 벗는 걸 도울 뿐이야
20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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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하고 하얀 목면 침구가 깔린 침대 위에 아델을 내려놓았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덕분에 그녀는 깊고 고른 숨을 쉬며 잘도 잤다.

하얀 얼굴에 발그레하게 붉어진 뺨과 검고 가지런하게 내려온 속눈썹. 살며시 벌어진 붉은 입술은 청초한 소녀 같기도 했고, 요염한 요부 같기도 했다.

크리스틴은 그런 아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도 났다.

꽃잎처럼 보드랍고, 꿀처럼 다디달 것만 같은 여자.

꺾어서라도 가지고 싶은 아름다운 장미.

꿀꺽.

그의 목울대가 가파르게 흔들렸다.

주먹을 꽉 움켜쥐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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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나도 안다고…….”

붉은 입술 사이로 이를 갈 듯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머가 경고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밤 폭주해버리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는.

하지만 눅눅한 공기와 와인을 마신 탓인지 아델의 체향은 그 어느 때보다 달큼하고 강렬했다. 마치 10년 전 그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 그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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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사람을 미치게 해놓고 잘도 자는군.”

그런 아델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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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응…… 음…….”

그 무렵 아델이 뒤척이다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술이 덜 깼는지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몽롱한 눈으로 엷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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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크리스…….”

살며시 잠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는 너무나 무방비해서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이대로 손만 뻗어 움켜쥐면 단숨에 널 망가뜨릴 수도 있는데, 대체 넌 뭘 믿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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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머리 아파…… 물 좀…….”

그런데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물심부름까지 시켰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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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가지가지 하는군. 찬물? 따뜻한 물?”

이렇게 묻는 자신은 더 어이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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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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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그가 방을 나가자 아델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어지러워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와인은 자주 마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취해버릴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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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된 거였더라?’

그 순간 불쑥 황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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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후작 부인과 친해지라고 시킨 게 나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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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따뜻한 물, 둘 다 가져왔어.”

잠시 후 크리스틴이 두 잔의 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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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두고 나가.”

아델은 조금 전과 달리 냉랭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태도가 달라진 걸 그는 금방 눈치챘다. 벽난로 선반 위에 물잔이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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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게 해줘야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아델이 쳐다보자 크리스틴은 손수건이 감긴 오른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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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어? 당신이 약 발라주기로 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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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못 구했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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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이군. 남자랑 노닥거리느라 다친 동생 따윈 까맣게 잊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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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나중에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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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듣고 싶은데. 당신이 왜 잔뜩 화가 나 있는 건지. 그놈이랑 좋은 시간을 방해서? 아니면 이미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걸림돌처럼 느껴진 건가?”

아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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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우리 문제에 마크는 끌어들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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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이제 서로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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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아델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황궁 정원에서 들은 얘기들이 윙윙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을 속이고 다가온 크리스틴이 미웠다. 그에게 대책 없이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게 너무 한심했다.

그럼에도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녀의 남자나 다름없는데 뭘 어쩌자는 건지.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모르겠다. 지금은 취해선지 머릿속이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다 잊고 그냥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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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나가줘. 부탁이야.”

아델이 간곡하게 말했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들던 아델은 조용히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과 마주쳤다. 서늘한 기운이 심장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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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 아델.”

놀란 아델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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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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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옷을 빌렸으면 잘 뒀다가 돌려줘야지. 그대로 입고 잘 건가?”

아델은 비로소 마크의 아내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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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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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신은 지금 취해서 몸도 못 가누잖아. 그러다 그 낡아빠진 옷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는 소름이 끼치도록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걱정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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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취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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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벗어봐. 괜찮은지 지켜볼 테니.”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살며시 기울어지며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와 한 침대에 있다는 실감이 느껴지자 아델은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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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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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짓도.”

그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동안에도 차갑고 고요한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가까이에서 그 시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살갗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발가벗겨져 적나라하게 몸을 내보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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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가 빨개졌어. 설마 나를 남자로 의식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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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소리!”

정곡을 찔린 아델은 강하게 잡아뗐다.

그러자 크리스틴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올라갔다. 마치 구석으로 쥐를 모는 데 성공한 고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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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취기가 오르는 모양이군. 옷을 벗는 데 도움이 필요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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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델은 그의 말장난에 놀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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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남자로 의식하지 않으니 상관없잖아. 그저 당신이 옷 벗는 걸 도울 생각이니까.”

크리스틴은 아델의 블라우스 단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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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흣!”

손이 닿는 순간 아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지르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강렬한 눈빛에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그녀의 턱을 움켜쥔 게 더 빨랐다.

그는 아델이 시선을 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턱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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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봐, 아델.”

마치 주술 같은 목소리.

아델은 그의 눈을 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늪과 같은 청회색 눈동자가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스르르 힘이 풀리고, 몸 안의 열기가 피어올라서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공포, 원망,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욕정…….

그 모든 감정이 뒤엉켜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조금씩 붉어지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꼭꼭 눌러왔던 감정들이 결국 임계점을 지나 흘러나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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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울음소리에 놀란 아델이 얼른 제 입을 틀어막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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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아델…….”

상냥하게 그 이름을 부르며 크리스틴이 젖은 눈가로 붉은 입술을 내렸다.

따뜻한 혀가 부드럽게 눈물을 핥아주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짐승처럼 정성스럽고도 애절했다.

그의 입술은 다시 콧등으로, 뺨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초옥, 초옥…….

끈적하고 야릇하게 울리는 입맞춤 소리가 아델에게 최면이라도 거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너무나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더 많이, 더 깊게 탐닉하고 싶어졌다.

이 순간 이성 따위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아델은 홀린 사람처럼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입술을 찾아 제 입술을 비볐다. 연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맞닿고 지그시 뭉그러지며 들끓는 피의 온도가 전해져왔다.

그 순간 미치도록 애가 타서 서로를 더 깊이 갈망했다.

휙!

날렵한 짐승처럼 크리스틴이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위로 올라왔다.

그동안에도 쉴새 없이 서로의 입술이 비벼지고 달짝지근한 호흡이 얽혔다.

그때마다 들리는 야릇한 숨소리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10년 전보다 더 농밀해지고, 더 음란했으며, 절박함마저 드는 키스에 아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그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집요하게 몰아붙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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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만…….”

아델이 겨우 고개를 돌려 입맞춤을 멈췄지만, 그는 다시 달려들어 짐승처럼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블라우스 단추를 재빨리 풀어내려 갔다.

안 돼, 이러다간……!

아델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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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크리…… 흡!”

아델이 밀어냈지만, 그는 질주를 시작한 말처럼 계속 내달릴 생각인 것 같았다.

입맞춤과 옷을 벗기는 손길이 서두르듯 더 다급해지고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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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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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결국, 크리스틴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입맞춤을 멈췄다. 제 입술을 닦아낸 그의 손등에 피가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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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 내가 너무 취해서 잠시 어떻게 됐었나 봐.”

아슬아슬한 슈미즈만 걸친 채 그녀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나왔다. 아직도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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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등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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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델이 돌아보자 그는 조금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눈동자가 탁하게 어두워진 것도 같고, 왠지 무시무시한 위화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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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전히 제멋대로야, 아델. 시작도 끝도 항상 마음대로지.”

휘이잉…….

순간, 침실 안의 촛불과 벽난로의 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제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가에서 들이치는 희미한 빛뿐이었다. 그 빛에 겨우 서로의 형체만 보일 뿐이다.

왠지 모르게 겁이 나서 아델은 도망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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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불을 가져와야겠어.”

그녀가 침실을 나가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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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있어!”

크리스틴이 양쪽 어깨를 사납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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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델이 아파하며 소리를 냈지만, 그는 오히려 어깨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생 원망해도 상관없었다.

가질 수 없다면 더 후회할 테니까.

어둠 속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매우 거칠었다. 짐승의 것처럼 난폭하고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들썩이는 어깨는 아까보다 훨씬 더 거대해진 것 같아서 아델은 온몸이 달달 떨려왔다. 이건 왠지 크리스틴이 아닌 것 같았다.

맹수에게 붙잡힌 것처럼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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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 크리스…….”

애원하는 그녀를 크리스틴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작고 가냘픈 여자. 겁먹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가련한 초식동물 같았다. 그럴수록 미치도록 달큼한 냄새가 포식자를 유혹했다.

대체 넌 뭘 믿고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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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네가 했지만, 끝은 내가 내.”

그가 아델의 슈미즈를 단숨에 어깨에서 끌어 내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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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해…….”

어둠 속에서 울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틴이 멈칫하자 아델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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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모르지? 네가 왜 이러는지 알면서, 널 밀어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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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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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문서, 그것 때문이잖아.”

번쩍!

동시에 번개가 내리치며 창밖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아델을 잡은 손을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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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델은 낙담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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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백지 문서는 내가 갖고 있어. 그래서 내게 접근했니? 그걸 가져가야 황녀님과 혼인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아델에 대한 마음이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평생 잊고 살려고 했는데 왜 이 여자에게 접근했을까?

정말 백지 문서 때문에?

아니면 아직도 뭔가 미련이 남은 건가?

젠장,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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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가 빠르네, 아델.”

아델은 상처 입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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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말하지……. 네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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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군.”

그 순간 아델의 얼굴이 상처 입은 채 절벽 끝에 내몰린 초식 동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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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니까…… 날 기만하는 일은 여기까지야, 크리스.”

그녀는 흐트러진 슈미즈를 끌어올린 후 침실을 나갔다.

***

침실 복도 앞에는 짐머와 타냐가 불안한 얼굴로 안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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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얇은 슈미즈 차림의 아델을 본 타냐가 얼른 담요를 가져와 둘러주었다. 잔뜩 걱정하는 타냐에게 아델은 오히려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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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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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으셨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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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홍차 좀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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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얼른 끓여올게요.”

아델은 뒤에 있는 짐머를 향해서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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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는 대로 짐 정리를 해서 나가주세요, 짐머 경.”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담담하게 복도를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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