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밤마다 황녀님 방에 드나든다면서요?
(25/155)
25화. 밤마다 황녀님 방에 드나든다면서요?
(25/155)
25화. 밤마다 황녀님 방에 드나든다면서요?
2022.04.29.
“비 오던 날 밤, 바이스 백작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챙그랑!
놀란 에이프릴은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늘 새로운 화제에 목말라하던 귀부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 주었다.
“그날 밤에 백작과 만나셨다는 게 정말인가요?”
“누, 누가 그런 말을…… 아니에요!”
누군가 떠보기 위해 물어본 말에 에이프릴은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으니 여지없이 덫에 걸려든 것이다.
“그날 밤 침입자는 바이스 백작이 맞았던 거죠?”
“발코니로 뛰어가셔서 황녀님이 문을 열어주셨다면서요? 잠옷까지 다 젖으셨겠네요.”
쏟아지는 질문을 듣고 있자니 에이프릴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그날 밤의 일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뜨겁던 숨결과 은밀하고 야하게 속삭이던 목소리…….
그런데 그 일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아무리 비가 내렸다고 해도 황궁에 보는 눈이 얼마인데. 경비병들과 유모도 어쩌면 알면서 그냥 돌아가 준 걸지도 몰랐다.
에이프릴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이제 곧 혼인도 하실 건데.”
“너무 로맨틱하네요. 비 오는 날 밤의 발코니 밀회라니.”
귀부인들은 에이프릴이 부끄러워할수록 점점 더 놀려댔다.
“그, 그만들 하세요!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에이프릴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여인들은 웃음을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에이프릴은 목덜미까지 붉어진 채로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탁!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황궁 회랑의 발코니 앞에서 에이프릴은 속상해 중얼거렸다.
“뭘 모른다는 거죠?”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어느새 세이라가 와 있었다.
눈이 마주친 세이라는 사르르 예쁘게 웃어 보였다. 오후의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와 금빛 머리카락은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았다.
“속상한 일이 있으셨나 봐요, 황녀님.”
게다가 나긋한 목소리는 무슨 고민이라도 다 듣고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혹시 세이라 양도 알고 있나요? 백작과 내 소문…….”
“두 분이 황녀님 발코니에서 밀회를 즐기셨다는 소문 말인가요?”
“핫!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네…….”
울상이 된 에이프릴을 보며 세이라가 낮게 웃었다.
“사교계의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는 아시잖아요. 특히 백작과 황녀님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커플이니 다들 관심이 큰 거겠죠.”
“하지만 그날 아무 일도 없었는데 좀 억울하네요.”
“정말 아무 일도요?”
세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 키스는 했어요…….”
사실 키스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에이프릴은 사실대로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찾아와 놓고 그냥 가버리다니.
“어머, 키스까지 하셨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니요. 대체 어디까지 기대하신 거죠?”
에이프릴은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았다.
“세이라 양이 보기엔 어떤가요? 백작이 정말 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순진한 물음에 세이라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백작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나요?”
비로소 에이프릴은 이 불안한 마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백작을 떠올릴 때면 항상 아델의 얼굴이 찜찜하게 따라왔던 것이다.
한편 세이라는 순진한 황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했다.
틀림없이 크리스틴과 아델의 사이를 의심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포장해도 그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으니까.
“그건 백작의 잘못이 아니죠. 그 여자가 작정하고 꼬시면 안 넘어갈 남자가 없으니까요.”
“그 여자가 누군지 짐작하나요?”
세이라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칼라임의 악녀겠어요? 그 여자에 대해선 제가 누구보다 잘 아는걸요.”
“하지만 그렇게 부도덕하고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악마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더군요. 그 여자가 황실에 디저트를 납품할 수 있도록 누가 도와줬겠어요? 얼마 전엔 백작의 뒷배를 믿고 황후 폐하께도 대들었다죠? 게다가 그의 돈으로 집도 고치고 고용인과 드레스도 엄청나게 사들였다더군요. 이래도 그 여자가 좋은 사람처럼 보이나요?”
듣고 보니 세이라의 말이 전부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로 백작을 유혹해서 제 욕심을 채운 천박하고 부도덕한 여자.
그래놓고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떠들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인 여자.
에이프릴은 갑자기 아델에게 적개심이 들었다.
“그런데 세이라 양은 부인과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나요?”
뜨끔해진 세이라가 얼른 변명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한 번 마음 준 사람을 평생 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새어머니가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건실하게 속죄하며 살았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는 백작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고 싶어요.”
“세이라 양은 정말 착한 사람이네요.”
어느새 에이프릴은 세이라를 깊이 신뢰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며칠째 고민하던 속내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실은…… 그날 백작이 취했는지 날 그 여자로 착각한 것 같았어요. 키스할 때 그 여자 이름을 불렀거든요.”
“세상에, 정말인가요?”
“생각보다 둘이 더 깊은 사이면 어쩌죠? 아니, 백작이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울먹이는 에이프릴을 보며 세이라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내렸다.
사실 아델과 크리스틴의 관계는 그냥 추측해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얼음장 같은 남자가 키스하면서 아델의 이름을 불렀다니.
이건 둘 사이가 꽤 깊다는 뜻.
이대로라면 아델에게 그를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코,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얼마 전 아델에게 당한 일은 다시 생각해도 치욕스러웠다. 그녀의 뒤에 바이스 백작만 없었다면 충분히 짓밟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기필코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눈앞의 황녀는 아주 좋은 체스 말이 돼 줄 것 같았다. 이 순진한 황녀를 이용한다면 아델과 크리스틴을 떼어놓는 건 생각보다 쉬울지도.
“정말 백작과 결혼하고 싶으세요? 그럼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세이라는 에이프릴의 귓가에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유심히 듣던 에이프릴의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올랐다.
“세상에! 나더러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라고요?”
당황하는 에이프릴을 세이라가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이대로 그 부도덕한 여자에게 백작을 빼앗기시던가요.”
“그건 안 돼요!”
“그러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하지만…… 폐하께서 아시면 전 어쩌고요.”
“이건 폐하를 돕는 일이기도 하답니다. 폐하께선 지금 바이스 백작이 필요하시잖아요.”
에이프릴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소문에 죄를 물을 순 없으니까요.”
세이라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델, 너는 평생 천덕꾸러기 악녀로 살 운명이야.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녀는 정말로 한 번 마음을 준 사람은 제 사람으로 생각했다. 제 사람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지만.
***
아침 일찍 아델의 집을 방문한 미아는 깜짝 놀랐다.
부엌의 조리대 위에 갖가지 모양의 쿠키가 잔뜩 구워져 있었다. 해가 뜬 게 얼마 전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쿠키를 구웠다는 것은…….
“설마 밤을 새운 거야?”
며칠 전 크리스틴이 돌아가고 난 후에 아델은 쉬지 않고 빵과 디저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것들을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녀를 꺼리는 사람들도 다들 그녀의 선물은 반가워했다. 특히 먹거리가 궁한 아이들 사이에서 아델은 인기가 좋았다.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델은 흐뭇한 얼굴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미아와 타냐는 불안하기만 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우울할 때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델은 지금 복잡한 머릿속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크리스틴이리라.
“잠도 안 오고, 주문받은 것도 있어서.”
“그래도 그렇지. 이러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타냐가 있었으면 말렸을 텐데.”
타냐는 어제 동생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집에 돌아간 것이다. 그러면서 미아에게 아델을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타냐가 말려서 될 일이 아니었어. 어제 황궁에서 주문이 들어왔거든.”
“납품하는 날짜는 아직 남았잖아?”
“황녀님이 내가 구운 쿠키가 먹고 싶다고 특별히 사람을 보내셨어.”
“황궁에는 쿠키 만들 요리사가 없다니? 왜 시도 때도 없이 주문하고 그래.”
“그만큼 감사한 일이지.”
아델은 조심스럽게 다시 오븐 팬을 꺼냈다. 사각형의 팬에는 알록달록한 머랭 쿠키가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었다.
“진짜 고퀄이네. 황녀님이 반할만도 해.”
“먹어볼래?”
“그럴까?”
군침이 고여서 저도 모르게 집어 먹던 미아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참, 이게 아니지. 너, 일만 하고 식사도 제대로 안 챙길 거 같아서 내가 특제 수프를 끓여왔어. 그거부터 얼른 먹자.”
미아의 성화에 억지로 수프를 먹고 난 아델은 황궁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사준 드레스 대신 예전의 낡은 옷을 입었다. 그가 사준 드레스는 모두 샤넬의 집에 돌려보낸 것이다.
그가 데려온 고용인들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그들의 해고 권한은 크리스틴에게 있었다. 그래서 숙소로 쓰는 저택에서 지내게 하고 아델의 집에는 오지 못하게 했다.
아델의 저택은 예전처럼 적막해졌고, 예전보다는 조금 더 침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무슨 일로 싸웠는지 모르지만, 백작과 잘 풀어봐. 이제 좀 사람답게 사나 싶었더니.”
미아의 말에 아델은 전에 없이 서늘한 표정이 되었다.
“백작과는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다 정리된 일이니까.
***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델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다들 조금 놀랐다. 얼마 전 황궁에 왔을 때와는 너무 달라 보였던 것이다.
낡은 잿빛 코트 차림의 그녀는 눈에 띄게 야윈 얼굴과 밤잠을 설쳐서 몹시 초췌해 보였다.
“역시 샤넬 부인의 드레스가 대단하긴 한가 봐요.”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당장 한 벌 더 맞추러 가야겠어요.”
모두 아델이 그때 예뻐 보였던 건 오직 드레스 때문이라며 비꼬는 것이다.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들은 아델이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런 개똥 같은 소리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까.
“머랭으로 쿠키를 만들어봤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와, 정말 예뻐요.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다 먹죠?”
상자 안에 든 쿠키를 보자 에이프릴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해맑은 황녀의 얼굴이 보기 좋아서 아델도 조용히 웃었다.
“다음엔 더 맛있는 쿠키를 구워 올게요.”
“정말이죠? 사실 요즘 통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그런데 부인의 쿠키가 너무 생각나지 뭐예요.”
에이프릴은 사랑스러운 얼굴로 쿠키를 하나 집어서 입안에 넣었다. 그 순간…….
“우욱! 욱!”
바로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으세요, 황녀님?”
옆에 있던 세이라가 놀라서 다가들었다.
에이프릴은 온통 빨개진 얼굴과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델에게 깊이 사과했다.
“미안해요, 후작 부인. 먹고는 싶은데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서요.”
세이라가 에이프릴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으켰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오실래요?”
“그래야겠어요.”
세이라는 황녀를 부축해서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자 남아 있던 사람들끼리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정말인가 봐요. 밤마다 바이스 백작이 황녀님 방에 드나든다면서요.”
“비 오는 날은 또 어땠게요. 발코니에서 두 분이 아주 뜨거웠다던데요.”
“설마 그럼 임신…… 아니에요?”
“세상에, 입덧이라고요?”
“쉿! 폐하께서 아시면 큰일 날 소리를!”
“어차피 혼인하실 거잖아요. 그래도 황녀님처럼 순진하신 분이 의외네요.”
“상대가 바이스 백작이잖아요. 나라도 얼마든지 그랬겠네요.”
아델은 머리가 웅웅 울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황녀가 입덧이라니.
설마 크리스틴의 아이를 가졌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