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소문에 죄를 물을 순 없다 (26/155)


26화. 소문에 죄를 물을 순 없다
2022.05.02.


16548766557954.jpg

 

16548766557958.jpg

“하아…….”

황궁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아델은 계단 난간을 붙잡고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까진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에이프릴이 헛구역질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크리스틴의 아이를 임신하다니…….

16548766557958.jpg

‘그냥 체하신 게 아니었을까?’

사교계의 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멋대로이고 개똥 같은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황녀가 그저 헛구역질 한번 한 거로 임신이 아니라 숨겨둔 애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는 것이다.

16548766557958.jpg

‘그래, 그냥 개똥 같은 소문이겠지.’

그러다 아델은 갑자기 모든 게 우스워졌다.

16548766557958.jpg

‘황녀가 임신한 게 아니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두 사람은 곧 결혼할 테니 언젠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할 것이다. 그저 조금 빨라지고 늦춰지는 것뿐 상황이 달라질 건 없었다.

16548766557958.jpg

‘한심해. 아직도 그에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거니?’

그는 황녀와 결혼하기 위해 백지 문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친밀하게 접근해왔던 것뿐이고.

그런 것도 모르고 혼자 들떠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놓고서…….

16548766557958.jpg

‘아주 볼썽사납구나, 아델.’

크리스틴의 생각을 털어버리며 아델은 서둘러 걸었다.

어서 이 황궁에서 벗어나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16548766557978.jpg

“시신이 아주 끔찍했어. 역시 그 짐승의 소행이겠지? 은빛 늑대.”

16548766557978.jpg

“쉿! 은빛 늑대 얘긴 함구령이 떨어진 거 몰라?”

문득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델의 걸음이 멈칫했다.

은빛 늑대라니……?

그와 동시에 끔찍하던 기억이 소환되어 버렸다.


16548766557978.jpg

“아델 오지 마라, 거기 있어!”

16548766557978.jpg

“세상에! 어떤 짐승이 이런 짓을…….”

16548766557978.jpg

“시신이 너무 끔찍하네요.”

 
어머니의 주검을 둘러싼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숲에 진동하던 피비린내.

사람들이 보지 말라고 막았지만, 아델은 기어코 보고야 말았다.

눈이 내린 하얀 숲을 온통 검붉게 물들인 채 그 한가운데 처참하게 쓰러져 있던…….

16548766557958.jpg

“흡!”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입을 틀어막았다.

10년이 지났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잊지 말라는 듯 매번 꿈속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숲에서 은빛 털을 가진 기이하게 생긴 늑대를 봤다고.

그 늑대가 아델의 어머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경비병들에게 더 자세히 묻고 싶어서 아델은 얼른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성급했던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찰라,

턱!

다행히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16548766557958.jpg

“아!”

놀라서 돌아보던 아델의 얼굴이 굳어졌다. 크리스틴이었다. 검은 제복 차림의 그는 눈이 마주치자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16548766557954.jpg

 

16548766557958.jpg

“어디에 정신을 팔고 다니는 거지?”

그 목소리는 눈물이 날 만큼 매정했다.

하지만 아델은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이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뭘 기대한 거야.

16548766557958.jpg

“상관하지 마.”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는 허리를 휘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16548766557958.jpg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델은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16548766557958.jpg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이스 백작. 그러니 이제 놔주시겠습니까?”

그녀가 정색하며 그의 손을 밀어내자 크리스틴의 표정도 싸늘해졌다.

16548766557958.jpg

“물론이지요, 부인.”

미련 없이 아델을 놓아준 그는 정중하고도 사무적인 제스처로 인사를 한 후 곁을 지나갔다.

16548766557958.jpg

“……시간 날 때 집에 한 번 들러.”

크리스틴이 멈칫했다.

16548766557958.jpg

“약속대로 원하는 걸 줄 테니까.”

16548766557958.jpg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16548766557958.jpg

“후작의 백지 문서, 필요한 거 아니었어?”

아델을 돌아보는 그의 붉은 입술에 기묘한 미소가 물려 있었다.

16548766557958.jpg

“글쎄, 내가 원하는 게 정말 그거였을까?”

아델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얼마나 날카롭고 뜨거운지 온몸을 샅샅이 핥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의 뜨겁던 키스가 떠올랐다.

정신 잃고 빠져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끔찍했다.

황녀와 그런 사이면서 왜 나를……!

16548766557958.jpg

‘아직도 날 갖고 노는 건가? 내가 여전히 미운 걸까?’

아델은 온몸에 힘을 꼿꼿하게 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16548766557958.jpg

“남자에게도 정조라는 게 있어. 황녀님께나 잘해.”

16548766557958.jpg

“뭐?”

크리스틴은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16548766557958.jpg

“더는 실망스러운 모습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만.”

아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럴수록 안간힘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16548766557958.jpg

‘꼴 좋구나, 아델.’

며칠간 그와 달콤했던 시간의 대가로 더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기분이었다.

***

아델은 크리스틴의 앞에서만은 평정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착각이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인적인 감각이 발달한 그가 그녀에게는 더욱 예민했으니까.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꼴이라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주제에 안간힘을 다해 꼿꼿하게 구는 걸 보면 주저앉혀 울려버리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 따위 얼마든…….

16548766557958.jpg

“저…… 이건 어떻게 할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크리스틴이 시선을 돌렸다.

짐머가 머쓱한 얼굴로 초록색 리본 끈을 들고 있었다. 모처럼 아델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는데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16548766557958.jpg

“버려.”

16548766557958.jpg

“며칠 전 황궁에 왔을 때 부인께서 이 머리끈을 찾으러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두 분 폐하의 대화를 듣고, 단장님께서 백지 문서 때문에 접근하셨다고 오해…….”

16548766557958.jpg

“오해? 어느 부분이? 모두 사실이다.”

기껏 둘을 화해시켜주려고 했던 짐머는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았다.

하여간 고집불통!

다른 일에는 눈치가 귀신 같으면서 아델을 향한 자신의 마음에는 그렇게 눈치가 없었다.

16548766557958.jpg

“알겠습니다. 그럼 황녀님과 결혼 하시는 거로 알고 있지요. 하긴 그게 제일 무난한 선택이긴 합니다.”

크리스틴이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황제가 황녀와 결혼을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도 성가신데 이젠 아델과 짐머까지 황녀 타령이었다.

16548766557958.jpg

“왜 다들 황녀와 못 엮어서 난리지?”

16548766557958.jpg

“그걸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16548766557958.jpg

“모르니까 묻는 거다.”

짐머는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16548766557958.jpg

“그야 황녀님이 임신하셨으니까요.”

16548766557958.jpg

“결혼도 안 한 황녀가 임신했다고?”

크리스틴은 조금 황당했지만, 한편으론 안도했다. 이렇게 되면 황제도 황녀와 막무가내로 엮으려 들 수는 없을 테니까.

16548766557958.jpg

“지금 중요한 건 황녀님의 결혼 여부가 아닌 것 같은데요?”

16548766557958.jpg

“그럼?”

16548766557958.jpg

“누구의 아이인지가 더 중요하죠.”

16548766557958.jpg

“그래서 누구의 아이인데?”

크리스틴도 약간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대체 황녀가 누구와?

짐머가 살그머니 속삭였다.

16548766557958.jpg

“단장님이요.”

16548766557958.jpg

“어떤 단장?”

뚫어지게 바라보는 짐머의 시선에 크리스틴은 주변에 누가 또 있나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걸 보고는…….

설마? 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끄덕끄덕.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16548766557958.jpg

“농담도 선을 넘으면 화가 나는 법이다, 부관.”

16548766557958.jpg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황궁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16548766557958.jpg

“남자에게도 정조라는 게 있어. 황녀님께나 잘해.”

 
아델의 말이 떠오르자 크리스틴은 낭패스럽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16548766557958.jpg

“빌어먹을…… 대체 누가!”

만나면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16548766557958.jpg

“며칠 전 비 오던 날 밤 황녀님의 침실에 들어가는 걸 사람들이 목격했답니다. 그건 어찌 된 겁니까?”

역시 그 일 때문에 소문이 난 건가?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16548766557958.jpg

“그래, 황녀를 만나긴 했지. 하지만 그 뒤로는…… 기억이 거의 없어.”

16548766557958.jpg

“그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만은…….”

짐머는 살벌한 눈빛과 마주치자 리본 끈에 말라붙어 있던 진흙을 괜히 손톱으로 긁어댔다.

16548766557958.jpg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날 황녀를 안았다면 황궁 숲이 아닌, 그녀의 침대에서 눈을 떴겠지.”

그날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크리스틴은 본능적으로 황녀를 찾아갔던 것 같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황궁의 숲이었다. 욕망을 제어할 에너지가 필요해서 사냥했다는 뜻이었다.

16548766557958.jpg

“그럼 역시 죽은 경비병은 단장님께서…….”

그날 밤 짐승에게 물어 뜯겨 죽은 경비병.

하지만 크리스틴은 자신의 짓인지 아닌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사냥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을 잃은 상태라고 해도 그의 사냥감은 항상 짐승이었다.

그러나 기억은 모호했고, 황궁 숲에서 희생자가 나왔다.

경비병을 해치지 않았다고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황제의 시종이 회랑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앞에 멈춰선 시종은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용건을 전했다.

16548766557978.jpg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시종이 돌아가자 짐머가 한숨을 내쉬었다.

16548766557958.jpg

“황녀와의 소문 때문이겠지요? 골치 좀 아프시겠습니다.”

16548766557958.jpg

“별로.”

크리스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다가 짐머의 손을 노려보았다. 그가 꼭 움켜쥔 초록색 리본 끈이 눈에 거슬려서 홱 잡아챘다.

16548766557958.jpg

“버리라면서요?”

16548766557958.jpg

“내가 버리지.”

 

***


16548766557958.jpg

“흐흑, 흑!”

크리스틴이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에이프릴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실크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화려하게 펼쳐진 채, 넘실대는 금발 머리에 보석으로 치장한 여자가 우는 모습은 한 장의 그림 같았다.

슬프다기보다 아름답게 우는 여자의 그림.

16548766557958.jpg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게.”

황제 얀의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에이프릴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의 울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냉정하게 물었다.

16548766557958.jpg

“뭘 설명해야 합니까?”

암체어에 팔걸이를 기대고 앉았던 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크리스틴의 물음은 뻔뻔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16548766557958.jpg

“자네가 밤마다 황녀의 방을 드나든 걸 봤다는 사람들이 있던데.”

16548766557958.jpg

“그들이 뭘 또 봤답니까?”

16548766557958.jpg

“뭐라?”

16548766557958.jpg

“얼마 전 황녀님을 찾아간 제 행동이 무례했던 것은 인정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의 태도와 목소리가 너무 냉정하고 차가워서였을까? 잦아들던 에이프릴의 흐느낌이 더 커져갔다.

16548766557958.jpg

“흑, 흐흑!”

사랑하는 딸의 울음소리에 얀은 잠시 이성을 잃었다.

스릉!

암체어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칼을 뽑아 크리스틴의 목에 겨눴다.

16548766557958.jpg

“네놈! 감히 짐의 딸을 농락하고 무사할 줄 아느냐?”

16548766557958.jpg

“아바마마! 안 돼요!”

놀란 에이프릴이 얀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16548766557958.jpg

“비켜라, 에이프릴!”

16548766557958.jpg

“싫어요. 백작이 잘못되면 저도 죽을 거예요!”

딸의 강경한 태도에 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6548766557958.jpg

“그럼 말해라. 백작이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에이프릴은 다시 양손에 얼굴을 묻고 더 크게 울기만 했다.


16548766557958.jpg

“황녀님께서는 그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입덧 한 번만 하시면 된답니다. 그리고 누가 진실을 묻거든 울기만 하세요. 그럼 다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떠들어 댈 테니.”

16548766557958.jpg

“하지만 백작은 진실을 알잖아요?”

16548766557958.jpg

“백작도 그날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면 기억을 못 할 거예요. 그러니 황녀님은 최대한 가련하게 울기만 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16548766557958.jpg

“그래도 안 되면요?”

16548766557958.jpg

“그땐 체해서 구역질했던 거라고 둘러대고 빠져나와야죠. 황녀님의 입으로 임신했다고 말한 적은 없으니까.”

16548766557958.jpg

“그럼 나만 우스운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요?”

16548766557958.jpg

“하지만 그 여자는 떼어낼 수겠죠. 아델 오스월드.”

 
세이라가 알려준 대로 에이프릴은 최대한 가련하게 울었다. 그러는 한편 얀과 크리스틴의 분위기를 살폈다.

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세이라의 말대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이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시종일관 냉담했다. 마치 에이프릴의 머릿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서늘하고 소름 돋는 시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