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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제가 보기보다 짐승이라서 (27/155)


27화. 제가 보기보다 짐승이라서
20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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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흐으윽!”

황제의 집무실은 에이프릴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녀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울다가 지친 에이프릴은 언제쯤 울음을 그쳐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이 생각처럼 쉽게 흘러갈 것 같지 않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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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과 둘이 얘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폐하.”

그 무렵 들려온 크리스틴의 말은 반갑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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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잠시 머리를 식힌 후에 돌아오지.”

황제가 집무실을 나가자 이제 에이프릴과 크리스틴, 단둘뿐이었다.

둘만 있게 되자 에이프릴은 긴장이 됐다. 거짓말에 서툴러서 크리스틴에게 들킬지도 몰랐으니까.

이토록 감정 하나 없이 날카로운 눈을 가진 사람을 과연 속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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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짓을 해서 더 미움받는 거 아닐까?’

조금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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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라 양의 말을 듣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아델만이라도 떼어낸다면 그렇게 손해는 아닐지도 몰랐다.

응접실에서 자신이 헛구역질하는 걸 아델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이미 황궁 안에는 자신이 크리스틴의 아이를 임신한 것 같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무리 파렴치한 여자라도 이 정도면 알아서 물러나지 않을까?

그럼 절반은 성공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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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으십시오.”

생각에 잠겨 있던 에이프릴은 고개를 들었다. 뜻밖에도 크리스틴이 손수건을 내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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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감사해요. 백작.”

얼른 손수건을 받아서 눈물을 닦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손수건에서는 깊은 숲을 떠올리게 만드는 비밀스럽고도 서늘한 향이 났다. 꼭 그를 닮은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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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하려면 일단 의자에 앉아야겠지요?”

손을 내미는 그의 얼굴은 조금 전의 서늘함이 거짓말인 것처럼 자상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던 에이프릴은 머뭇머뭇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크리스틴이 빼주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이번엔 테이블 위의 찻잔에 차를 따라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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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마셔요, 에이프릴.”

에이프릴.

그에게 이름이 불리자 에이프릴의 심장은 요동치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렇게 자상한 그와 단둘이 있으니,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역시 세이라의 작전이 통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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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이 좀 됐습니까?”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틴은 엷게 웃었다.

그 모습을 에이프릴은 넋이 나가 쳐다보았다. 차갑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웃는 모습만으로도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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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날 밤의 일을 얘기해보세요. 그날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사실대로 말해도 다 이해해줄 것 같았다. 아니,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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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 털어놓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에이프릴은 곧 마음을 다잡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크리스틴이 다시 달래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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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제가 황녀님께 실수했습니까?”

그는 그날의 일을 기억 못 하는 것처럼 물었다.

에이프릴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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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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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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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날 비를 맞고 제 침실의 발코니를 넘어오신 건 기억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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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드문드문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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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키스하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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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가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하자 에이프릴은 조금 강하게 나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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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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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제가 황녀님을 안았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오는 질문.

에이프릴은 그것까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그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들통이 나면 어쩌지?

하지만 이미 그를 속이기로 작정하고 벌인 일이 아닌가? 이대로 계속 직진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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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많이 취하셨던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전 그날 일…… 후회 안 해요.”

말을 하면서도 에이프릴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심하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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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어쩌자고 이런 거짓말을……!’

찻잔을 입에 대기 직전 크리스틴의 입매가 야릇하게 올라갔다.

그가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짧은 시간이 에이프릴에겐 수십 년처럼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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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걸까? 아니면 거짓말을 눈치챘을까?’

그의 무심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 불안했다.

이윽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크리스틴은 다시 상냥하게 눈을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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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께선 남자가 처음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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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요!”

에이프릴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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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음 날 아침부터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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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가 잘못됐나요?”

크리스틴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에이프릴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너무 야릇해서 음란한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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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제가 정말 황녀님을 안았다면 다음날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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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뜻……?”

에이프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은 넘실대는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감미롭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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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와 달리 짐승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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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에이프릴의 얼굴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그의 음성만으로도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어느새 처음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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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 모두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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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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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뭐든 적당히 끝내지 않는답니다. 잘못을 바로잡을 때도, 여자를 안을 때도.”

칼날같이 매서운 눈빛이 금방이라도 목을 벨 것만 같아서 에이프릴은 한동안 숨도 쉴 수가 없었다.

***

창가 앞에서 뜨개질하던 미아는 우연히 밖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날이 어두워진 저녁에 누군가 그녀의 집 정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델이었는데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나, 창백한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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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 어떻게 된 거야?”

뜨개질하던 걸 내던지고 얼른 밖으로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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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타 남작님 좀 뵐 수 있을까?”

아델의 손을 만져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왠지 넋이 나가서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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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안으로 들어와.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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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델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미아는 하녀에게 얼른 따뜻한 밀크티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앉히고 양손을 주물러 주었다.

미아의 손안에서 아델의 손이 계속 덜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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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오스월드 부인?”

소란을 듣고 서재에 있던 보니타 남작도 나와 보았다.

미아의 남편, 보니타 남작은 통통한 체구에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미아와는 나이 차이가 꽤 있었지만, 마을에서 알아주는 애처가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둘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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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실은 남작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는 황궁의 문서 출납을 맡고 있어서 궁 안의 소식에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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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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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황궁 경비병이 어떤 짐승에게 당했다고 들었어요. 그 시신이 어땠는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은빛 늑대에 대해서도요.”

보니타 남작은 당황스러웠다. 그 괴이한 사건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갖고 수군거리긴 했다.

하지만 아델은 호기심이 아니라 절박한 얼굴이었다. 그 사건과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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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쪽 일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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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담당 검시관님을 만나게 해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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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힘들 겁니다. 황제께서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셨거든요. 특히 은빛 늑대에 관해선 함구령이 떨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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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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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안에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게다가 은빛 늑대라니, 터무니없는 얘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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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은빛 늑대는!”

창백하게 떨고 있던 아델은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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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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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지만…….”

사실 아델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은빛 늑대를 본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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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없는 겁니다. 이대로 소문을 놔두면 조만간 금빛 늑대도 나오고 무지갯빛 늑대도 나오겠지요. 소문이란 그런 겁니다, 부인.”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미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밀크티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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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델, 진정하고 일단 따뜻한 차부터 마셔.”

하지만 아델은 다시 절박한 얼굴로 보니타 남작에게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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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 가지만 확인해주세요. 시신에 발톱 자국이 몇 개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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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자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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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늑대나 표범 같은 맹수에게 당한 거라면 네 개의 발톱 자국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다섯 개라면 뭔가 이상하잖아요.”

아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참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어머니의 몸에 또렷하게 새겨진 다섯 개의 발톱 자국!

마을 사람들도 그게 제일 이상하다고 했다. 다섯 개의 발톱을 갖진 맹수라면 곰일 확률이 높았지만, 칼라임 북부에는 곰이 살지 않았다. 그러니 기이한 생김새의 은빛 늑대라면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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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검시관에게 한번 물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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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려요.”

그제야 아델은 미아가 건넨 밀크티를 겨우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목이 타는 것처럼 아파서 넘기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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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

미아는 그런 아델이 걱정스러웠다. 창백한 얼굴이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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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집을 엉망으로 해놓고 나와서 가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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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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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황궁에 다녀왔더니 피곤해서 일찍 쉬어야겠어. 차 잘 마셨어.”

아델은 보니타 부부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

미아의 집에서 아델의 집까지는 고작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였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고 힘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훅훅 쏟아져 나오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확실히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오늘 너무 여러 번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황녀가 크리스틴의 아이를 임신하고, 어머니를 죽인 은빛 늑대의 출현이라니…….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맞나보다.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더는 나쁜 일은 없을 테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도착하면 계피와 과일을 넣은 와인을 뜨겁게 데워서 마셔야겠다. 푹 자고 일어나면 오늘 일 따위 기억에서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저택 앞에 키가 큰 남자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형체만으로도 아델은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달빛에 반사된 은빛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빛났다. 그 모습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다른 무엇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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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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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걸 받으러 왔어, 아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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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쁜 일의 끝판왕인 건가?

아델은 깊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절대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그래야 마음 따위 다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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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들어와.”

 

아무도 없는 집 안은 어둡고 온기가 없었다. 미처 벽난로를 신경 쓰지 못하고 외출한 터라 불씨마저 모두 꺼져 있었다.

아델은 서둘러 등불의 심지를 올리고 실내부터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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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급했나 보네. 백지 문서 얘기에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올 줄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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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남아서.”

믿지 않는다는 듯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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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과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겠지. 그게 있어야 폐하께서 허락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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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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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니야? 결혼식까지 못 기다릴 만큼…… 급했잖아. 이미 황궁에 소문이 파다해.”

아델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왠지 나무라는 투가 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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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

역시!

크리스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믿었어도 마음 한 곳에선 부정하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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