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세상에 공짜 거래는 없지 2022.05.09.
“황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
역시! 크리스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왠지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믿었어도 마음 한 곳에선 부정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 이제 칼라임 제국의 2인자가 되겠구나. 곧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도 생기고. 정말 축하해, 크리스.”
크리스틴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스쳤다.
“축하? 그런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얼굴이 그랬던가?
“조금…… 억울해서.”
“뭐가?”
아델은 콧등을 찡긋하며 속물처럼 말했다.
“사실 후작가에서 백지 문서를 빼내는 데 꽤 애를 먹었거든. 그런데 너만 좋은 일을 시킨 셈이니까.”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종종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지금도 여지없이. 그래서 아델은 마주하고 있기가 힘겨웠다. 이윽고 그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군. 세상에 공짜 거래는 없지.”
“다행이다. 말이 통해서.”
“그래서 뭘 원하는데? 돈?”
크리스틴은 이제 장미색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흥정하려는 사람처럼. 아델도 맞은편 의자에 앉아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네가 쉽게 줄 수 없는 걸 원해.”
“내 몸이라도 원해?”
농담 반 진담 반인 것 같은 말에 아델도 여유롭게 응수했다.
“미안하지만 황녀님과 척을 질만큼 널 원하지는 않아. 내 최고의 고객을 잃을 순 없지.”
“날 열 받게 하려는 의도라면 성공했어.”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네.”
“하!”
크리스틴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데, 아델은 금방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네가 찾아줄 게 있어.”
“뭘 찾아주면 되는데?”
“은빛 늑대.”
“……!”
크리스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아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궁에 나타났다는 은빛 늑대를 찾아줘. 그게 백지 문서를 주는 대가야.”
크리스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
그는 이대로 눈을 뜬 채 잠이 든 걸까 싶을 정도였다. 아델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눈을 깜박였다. 은빛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가며 청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얼음장 같은 눈.
“……은빛 늑대를 왜 찾지?”
“어쩌면…… 엄마를 죽였을지 모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아니야!”
완강하게 부인하는 크리스틴이 아델은 오히려 더 이상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은빛 늑대 같은 건 세상에 없어. 황제도 괜한 소문에 휩쓸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고. 그러니까 너도 그 늑대는 얘기 꺼내지 않는 게 좋아.”
그러나 아델은 고집스러웠다.
“아니야.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은빛 늑대를 봤다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재미 삼아 하는 얘기에 현혹되지 마!”
크리스틴의 성마른 음성이 집 안을 울렸다. 항상 여유롭고 느긋하던 그는 왠지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델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럼 황궁 검시관을 만나게 해줘. 죽은 경비병의 시신에 대해 몇 가지만 물어볼게. 백지 문서를 주는 대가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백지 문서 따위, 없어도 그만이야.”
“그럼 황녀님과 결혼을 못 할 텐데?”
“정말 내가 그 결혼을 원한다고 생각해?”
아델은 황당한 얼굴로 나무랐다.
“그럼 결혼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황녀님을 안은 거야? 크리스, 대체 어디까지 날 실망시킬 거니?”
“실망한 건 나야, 아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믿었어야지.”
원망하는 그의 눈에 아델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럼…… 황녀님이 임신하신 게 아니야?”
“내가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안지도 않은 여자를 임신시킬 수는 없지.”
“그 말…… 정말이야……? 하지만 입덧을…….”
“내 알 바 아니야.”
크리스틴은 귀찮은 파리라도 쫓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네가 밤마다 그분 방을 드나들었다던데?”
“소문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
그 순간 아델은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질투에 휩싸여서 사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를 의심한 것이다. 크리스틴은 장미색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래, 백지 문서가 필요해서 당신을 찾은 건 사실이야. 그날 밤 내 행동이 거칠었던 것도 사과하지. 하지만 내가 줄곧 안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이었어.”
집요하고도 열기 어린 시선에 아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크, 크리스…….”
그런 아델을 조롱하듯 그는 가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틴은 아델의 집을 나갔다. *** 현관문을 나서던 크리스틴은 마침 아델의 정원으로 들어오던 미아와 마주쳤다. 뜻밖에 그를 만난 미아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하며 물었다.
“아델은 괜찮나요?”
“당장 나와 싸워도 이길 기세더군요.”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요. 혼자 쓰러져 있을까 봐 걱정돼서 왔는데.”
그러고는 얼른 계단을 뛰어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사이 크리스틴은 정원 한쪽에 세워둔 말을 향해갔다.
‘젠장, 갑자기 은빛 늑대는 왜!’
사실 그는 아델이 은빛 늑대 얘기를 꺼낼 때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아델의 어머니 죽음은 크리스틴에게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마을에선 그녀가 숲의 짐승에게 당한 거로 처리되었다. 크리스틴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런데 은빛 늑대가 아델의 어머니를 죽였을지 모른다니. 설마 아델은 그렇게 믿고 있는 걸까? ……어째서? 하지만 아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을 무렵엔 크리스틴이 막 늑대로 변이가 시작된 시기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변이가 되었을 때의 일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 손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죽였을 리 없지 않은가? 절대 그런 일은……. 생각에 잠긴 채 그가 훌쩍 말에 올라탈 때였다.
“도와주세요, 백작님!”
집 안에서 미아가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아델이 쓰러져서 의식이 없어요!”
크리스틴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아델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와인을 마시려고 했는지 깨진 와인 병과 붉은 와인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아델, 정신 차려 봐! 아델!”
미아가 끌어안고 뺨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멀쩡해 보이더니…….
“비키십시오!”
크리스틴은 재빨리 케이프를 벗어 아델을 덮어준 후 번쩍 안아 들었다. 고열로 몸이 불덩이였다. 젠장, 이런 상태로 잘도…….
“제일 가까운 진료소가 어디입니까?”
“마차로 30분 이상 가야 해요. 하지만 요즘 성홍열이 유행이라 의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럼 황궁으로 데려가죠.”
그편이 더 빠르겠다.
“하지만 황궁까지는 너무 멀어요. 그러지 말고 마크에게 데려가요.”
“마크? 그 수의사?”
“웬만한 의사보다 더 진료를 잘 볼 거예요.”
크리스틴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아델은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괴로워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우선이었다.
“마크를 위해서라도 아델이 빨리 낫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랴하!”
그는 아델을 앞에 앉힌 채 세차게 말 고삐를 흔들었다. ***
“이쪽에 눕히세요!”
마크는 진료실 침상의 시트를 걷으며 소리쳤다. 크리스틴이 침상에 눕히는 동안에도 아델은 축 늘어져서 숨을 쌕쌕 몰아쉴 뿐이었다.
“어떤가? 괜찮겠나?”
다급하게 묻자, 그녀를 살피던 마크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역시 성홍열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잘 걸리는 병인데 면역력이 떨어지면 성인도 전염이 되죠. 그런데 몸이 이렇게 쇠약해져 있을 줄은…….”
아델을 응시하며 마크는 혀를 찼다. 며칠 만에 그녀는 눈에 띄게 야위었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낫게 할 수는 있겠지?”
성홍열에 걸려 죽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의사는 어떤 환자를 두고도 확신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죠.”
냉정한 그 말이 크리스틴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자가 잘못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하지만 마크에겐 그 협박이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일단 열부터 떨어뜨리고 얘기하죠. 속옷만 남기고 모두 벗겨주십시오.”
“아델의 옷을, 내가?”
“못 하겠으면 제가 하겠습니다.”
“……!”
크리스틴의 살기 어린 눈빛이 대답을 대신했다.
“옷을 벗기면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십시오.”
그 말을 남긴 채 마크는 서둘러 진료실을 나가려고 했다.
“어딜 가지?”
앞을 막아서는 크리스틴에게 그는 맞은편 진료실을 가리켰다.
“제가 굉장히 바쁜 사람이랍니다. 해열제는 곧 갖다 드리죠.”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진료실에도 서너 개의 침상이 있었다. 성홍열이 유행이라더니 어린 환자들이 거기에 누워 있었다. 마크가 나가고 나자, 작은 진료실 안에는 크리스틴과 아델 둘만 남았다. 열이 올라서 온몸이 홍조로 달아오른 아델의 옷을 벗겨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 문제는 뜨거워진 체온으로 인해 그녀의 체취가 너무 짙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를 자극하던 그 향기.
“젠장…….”
크리스틴은 낭패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는 수 없이 숨을 참고 아델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블라우스의 앞섶이 조금씩 열리며 안에 입은 하얀 슈미즈가 드러났다. 얇은 천으로 된 속옷 위로 그녀의 속살이 아스라이 비쳐 보였다. 애처로울 정도로 가느다란 팔다리와 달리 제법 볼륨이 있는 몸…….
“……!”
그는 하는 수 없이 눈도 꾹 감았다. 그녀의 블라우스를 겨우 몸에서 벗겨냈다. 하지만 스커트 허리에 묶인 스트링을 푸는 일은 도저히 눈을 감고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눈을 뜨는데, 흐트러진 아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땀에 젖고 잔뜩 홍조를 띤 야릇한 얼굴…….
“흡!”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아픈 환자가 이렇게 요염한 건 정말 반칙이 아닌가? 어쨌든 그의 손으로 아델의 옷을 벗겨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너무 위험했다. 그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였으니까. 이러다가 또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라도 하면……. 그때 누군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해열제와 미지근한 물수건을 가지고 들어온 마크의 조수 쥬디였다. 크리스틴은 살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아델을 대신 좀 돌봐줘. 꼭 좀 부탁하지.”
그의 간절한 청에 쥬디는 얼굴을 붉히며 넋이 나가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남작님을 도와야…….”
“남작은 내가 돕지.”
“예?”
“너는 지금부터 책임지고 아델을 돌보는 거다.”
위협적으로 명령한 크리스틴은 도망치듯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
“도울 일이 있나?”
어린 환자들을 돌보던 마크는 귀를 의심하며 돌아보았다.
“쥬디는 어디 가고 백작님이……?”
“아무래도 아델에겐 그녀의 도움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더니 크리스틴은 제복의 재킷을 벗고 셔츠의 팔을 걷어 올렸다.
“열이 오른 아이들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으면 되는 건가?”
“그렇긴 합니다만.”
크리스틴은 물통에서 수건을 건져 올린 후 적당한 힘으로 물기를 짰다. 그러고는 열이 올라 힘겨워하는 아이들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었다. 토한 아이들의 토사물을 치우고, 걸레질하고, 걸레를 빨아오는가 하면,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주기도 했다. 처음엔 불안하게 지켜보던 마크는 생각보다 능숙한 그의 행동에 안심했다. 칼만 휘두를 줄 아는 오만한 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왜 내가 너무 잘해서 놀랐나?”
그의 시선을 느낀 크리스틴이 잘난 척하며 묻자, 마크는 작게 코웃음 쳤다.
“다행히 걸리적거리진 않겠구나 싶어서요.”
크리스틴이 째려보자 마크는 바쁜 척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아델에게는 손도 못 대게 할 것 같이 굴더니 왜 직접 그녀를 돌보지 않는 건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