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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생각보다 쓸모 있는 남자 (29/155)


29화. 생각보다 쓸모 있는 남자
202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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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무렵이었다.

마크와 쥬디가 아델의 진료실에서 나오자 크리스틴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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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항상 단정하고 말쑥하던 제복의 그는 흐트러진 셔츠 차림에 조금 피곤해 보였다. 밤새도록 아픈 아이들을 간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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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열도 떨어지고 숨소리도 좋아졌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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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다행이군.”

마크의 말에 겨우 안도한 크리스틴은 마른 세수를 했다. 그가 초췌해 보였던 건 아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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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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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로 들어가던 크리스틴은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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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꽤 쓸모 있군, 캐슬러 남작.”

마크는 의외의 칭찬이라는 듯 눈썹을 살며시 올렸다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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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도 생각보단 쓸모 있었습니다.”

그의 대꾸에 크리스틴은 보일 듯 말듯 웃었다.
 

침상 위에 아델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파리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크리스틴은 간이의자를 가져다가 침상 옆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이마를 짚어보니 아직 미열이 있었지만 숨소리는 훨씬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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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아델은 눈을 감은 채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마른 입술은 껍질이 갈라져서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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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여기 있어.”

손수건을 적셔서 조심스럽게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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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어. 나 이제 어떡하면 좋아. 내겐 엄마뿐인데…….”

소리 없이 흐느끼는 아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10년 전 그날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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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너무 슬퍼하지마, 아델. 내가 있잖아. 내가 지켜줄게.”

크리스틴은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꿈속의 그녀가 조금은 안심하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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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어디 갔었어? 엄마의 장례식인데…… 나 혼자만 두고…… 어디에…….”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던 크리스틴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 어머니의 장례식…….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델의 어머니가 죽은 건 그의 몸에 변이가 시작된 초기였다.

그때에는 혼란스러움과 두려움,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다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스스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시로 숲으로 도망쳤다. 그러지 않으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만 같아서.

그런 와중에 아델의 어머니가 죽었고, 그는 장례식이 끝난 후에 겨우 돌아왔다.

하지만 아델이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랬구나, 너는 이렇게 날 기다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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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아델…….”

속죄하듯 가녀린 손을 꼭 움켜쥐었다.

***

아침이 되자 크리스틴은 마크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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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이죠?”

식사하는 내내 그를 힐끔거리며 소곤거리던 두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크의 아들 제이드와 아델이 구해준 주정뱅이의 아들 폴린이었다. 제이드가 폴린과 떨어지기 싫어해서 두 아이는 같이 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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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답 대신 아이들은 의자에 걸쳐둔 그의 제복을 가리켰다.

검은색 제복에는 화이트 고스트를 상징하는 하얀 늑대 장식의 견장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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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썰미가 좋구나.”

크리스틴의 칭찬에 제이드와 폴린이 헤벌쭉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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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바이스 백작님도 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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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적 있어요?”

막 식사를 마친 크리스틴은 냅킨 천으로 입가를 닦으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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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

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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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고스트 기사는 거짓말 안 해요. 아저씨 가짜죠?”

제이드의 도발에 크리스틴은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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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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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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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라는 걸 왜 증명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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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헹, 그러니까 거짓말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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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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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칼 한번 휘둘러 봐요. 바이스 백작님은 엄청 빨라서 칼이 안 보인대요.”

크리스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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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너 같은 꼬맹이나 믿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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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아니고, 제이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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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꼬맹이 제이드. 편식하지 말고 그 앞에 있는 당근이나 열심히 먹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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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웩, 당근 싫어! 토한 맛이 나.”

제이드가 토할 것처럼 혀를 빼물었다.

크리스틴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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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꼬맹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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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도 콩 골라냈으면서!”

제이드는 억울한 듯 크리스틴의 접시를 가리켰다. 정말로 크리스틴의 수프 접시에는 콩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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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미 다 컸으니까 상관없어, 꼬맹이.”

그 순간 화가 난 제이드는 목에 두르고 있던 냅킨 천을 크리스틴에게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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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결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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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처음엔 어이없어서 구경하던 마크가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이미 진지하게 결투 신청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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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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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다!”

마크의 걱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이드는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가는 크리스틴과 제이드를 불안하게 지켜보며 쥬디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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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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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이를 상대로 저렇게 진지할 거라곤…….”

마크는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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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받아요.”

폴린은 크리스틴에게 제이드의 검을 나눠주었다. 제이드가 평소 애지중지하는 목검이었다. 어린아이의 장난감치고는 제법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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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지급한 무기를 어떻게 믿지? 무슨 장치를 해놓았을 수도 있는데.”

크리스틴은 여전히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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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런가?”

아이 역시 심각하게 고민하며 턱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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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번만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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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나서 다른 말 하기 없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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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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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목검을 든 크리스틴과 제이드, 그리고 심판을 보기 위해 폴린이 정원으로 나왔다.

그러자 진료실에 누워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창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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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어른이니까 내가 먼저 공격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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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 정도 핸디캡은 받아들이지.”

크리스틴은 왼쪽 팔을 뒷짐 진 채 한 손으로 대련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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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아아아압!”

이윽고 제이드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크리스틴은 가볍게 공격을 피하며 아이의 통통한 엉덩이를 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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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제이드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목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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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얍! 얍! 얍!”

한번 맞아줄 법도 한데 크리스틴은 얄미울 정도로 모두 피했다. 그뿐 아니라 제이드의 엉덩이를 계속 쳐댔다.

톡! 톡!

공격하는 제이드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델의 상태를 체크하러 진료실에 들어온 쥬디도 창밖으로 보다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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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으로 진지하시네요.”

침상에 누운 채 밖을 내다보던 아델이 엷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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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다기보다…… 즐거운 것처럼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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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제이드와 대련을 하는 크리스틴은 보일 듯 말 듯 엷게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두 눈이 햇살을 받아 따뜻하게 반짝였다.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잊고 있었다. 그는 원래 이렇게 잘 웃고 장난스럽던 소년이었다는 걸.

어느새 구경하던 아이들은 아픈 것도 잊고 밖으로 몰려나왔다. 마크와 쥬디가 아무리 들어가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퍽!

그 무렵 제이드의 목검이 크리스틴의 허리를 후려쳤다. 그가 비틀거리자, 아이는 이때다 싶어서 다시 등을 공격했다.

크리스틴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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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하지 마. 이제 너는 죽은 목숨이다!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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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지.”

하지만 제이드는 크리스틴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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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번 한 번만 살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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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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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명예를 택한 기사는 살려주고 싶어.”

흙을 털고 일어난 크리스틴은 제이드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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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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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 다시 결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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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만.”

발끈하는 아이를 크리스틴은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 맸다.

아이와 있는 그 모습이 제법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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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에 지고도 용케 살아 돌아왔네.”

진료실로 들어오는 크리스틴에게 아델이 농담을 던졌다.

새벽까지만 해도 파리해 보이던 그녀는 이제 침대에 앉아 있었다.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빗질한 머리카락도 차분하게 어깨를 뒤덮고 있었다.

확실히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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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그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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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건 아직 힘들지만, 훨씬 좋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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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말고 며칠 푹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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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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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친구가 쓰러진 당신을 발견했어. 그리고 수의사가 아주 돌팔이는 아니라서 다행이었고.”

마크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평가는 여전히 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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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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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더군.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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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과로를 좀 했더니 그런가 봐.”

그녀가 왜 그랬는지 짐작한 크리스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려서부터 아델은 기분이 우울할 때면 몸을 혹사할 정도로 일에 몰두하고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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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크리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그가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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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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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만 듣고 널 믿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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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라면 이제 됐어. 나도 소문만 믿고 당신을 오해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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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서로 주고받은 건가?”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제는 그토록 끔찍한 일들만 연달아 생기더니 오늘은 평화롭기만 한 아침이었다.

아니,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아침이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하고 싶은 얘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꺼내는 순간 잠시 찾아온 이 평화로움이 깨질지도 몰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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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거 받아.”

크리스틴이 생각났다는 듯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선물해주었던 초록색 리본 머리띠였다. 반나절 만에 잃어버려서 아델이 속상해했던.

진흙투성이던 그것은 깨끗하게 세탁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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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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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정원에서 짐머가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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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묶어줄래?”

아델은 고개를 돌려 뒷머리를 그에게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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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를 달래듯 아델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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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해봤으니 이번엔 잘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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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게 있다고.”

크리스틴은 투덜대면서도 손가락으로 빗질을 한 후 그녀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여전히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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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태로운 평화를 먼저 깨트린 것은 크리스틴이었다.

전보다 말끔하게 그녀의 머리를 묶어준 그는 의자를 끌어다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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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늑대에 관한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죽음에 그 짐승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

사실 크리스틴은 은빛 늑대에 관한 얘기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수만은 없는 일.

지금은 자신이 그녀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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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니라 내가 더 용서하지 못할 거야. 아델.’

그래서 아델의 얘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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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얘기…….”

아델은 갈라지고 마른 입술을 파르르 떨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도 그 얘기를 꺼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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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를 하려면 10년 전에 내가 왜 널 떠났는지부터 말해야겠지.”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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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말해줘. 사실은 줄곧 궁금했어. 당신이 생부에게 돌아간 이유. 늙은 오스월드 후작과 결혼한 이유. 귀족이 되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겠지?”

잠시 숨을 고른 아델은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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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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