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게 떠난 진짜 이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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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그게 떠난 진짜 이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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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그게 떠난 진짜 이유였어
2022.05.16.
“그래, 말해줘. 사실은 줄곧 궁금했어. 당신이 생부에게 돌아간 이유. 늙은 오스월드 후작과 결혼한 이유. 귀족이 되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겠지?”
잠시 숨을 고른 아델은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복수…… 하고 싶었어.”
“복수?”
뜻밖의 얘기였다.
“엄마를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어머니는 숲에서 짐승에게 당하신 거잖아. 설마 은빛 늑대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거야?”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가르덴 호수의 별장을 기억해?”
“기억해. 높은 귀족들이 자주 오곤 했었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우연히 거길 갔다가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어. 별장에 놀러 왔던 귀족들이 늑대를 키우고 있었대. 그리고 놈들은 재미 삼아 사람을 사냥하게 시켰대.”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에 크리스틴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정말…… 이야?”
“빵 배달을 갔던 엄마는 놈들이 사육하던 늑대에게 물어뜯긴 거야. 그런데 숲의 짐승에게 당한 거로 꾸며진 거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아델의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충혈된 눈에선 물기가 고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어머니의 참혹하던 주검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났으니까.
“어떤 새끼들이야?”
크리스틴의 엷은 푸른 눈이 끔찍한 살기로 섬뜩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전부 찢어발길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분노에 아델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자신과 같은 슬픔과 분노를 가진 그가 마치 분신 같이 느껴졌다.
“이미 죽었어.”
“죽었다고?”
“응, 모두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이 기묘했다.
“설마…… 당신이…….”
당신이 죽인 건가?
그 말을 하려던 크리스틴은 깜짝 놀랐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델이.
하지만 그만큼 아델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래. 내가 독살한 건 후작이 아니라 그들이었어.”
크리스틴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힘을 가진 높은 귀족이 되면 복수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릴스 백작의 제의를 받고 후작의 아내가 되기로 했던 거야.”
크리스틴이 알던 아델은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던 마음 여린 소녀.
배고파하는 자신을 유일하게 걱정하던 선하고 착한 소녀.
그런데 담담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그녀는 지독하게 낯설었다.
창백한 얼굴에 깊은 초록색 눈동자가 이토록 서늘했던가?
그래서 그녀를 이렇게 만든 놈들이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게…… 떠난 진짜 이유였어?”
“응, 그리고 2년 동안이나 그 빌어먹을 후작가에 붙어 있었던 진짜 이유.”
“왜…… 말 안 했지?”
“내 엄마의 일이니까. 그 짐승을 잡겠다던 너희 아버지까지 사경을 헤매실 정도로 다쳤잖아. 더는 신세 지고 싶지 않았어.”
크리스틴은 격해지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느라 눈가가 붉어졌다.
“내 어머니는 내게도 어머니 같은 분이었어. 적어도 나한텐……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네 힘이 될 수 있었잖아!
지난 시간 아델을 원망했던 것들이 미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그 큰 아픔을 감당하려고 안간힘 썼을 그녀를 떠올리면 미칠 것만 같았다.
아델이 그렇게 끔찍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무능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되어 크리스틴은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던 그가 충혈된 눈으로 아델을 응시했다.
“도대체 네게 난 뭐였던 거지, 아델?”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느라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델은 깊고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잊었어, 크리스틴? 넌 그때 없었어.”
“……!”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의 장례식 때도…… 다 끝나고 나서야 나타났지.”
아델은 그가 알몸으로 숲에 있는 걸 봤다는 소문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크리스틴은 절대 함부로 몸을 굴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던 건 사실이었다.
친혈육과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래서 말하지 않고 떠났던 건지도 몰랐다. 신세 지기 싫었던 게 이유가 아니라.
어쩌면 그를 조금 원망을 했을지도.
“아아, 그랬지……. 내가…….”
괴로워하며 중얼거리는 크리스틴에게 아델은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웃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 그땐 너도, 나도 어렸으니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일은 둘 사이에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금을 만들었다는 것을.
가장 절실한 순간에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사람.
크리스틴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한, 절대로 그 금을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은빛 늑대는 왜 찾지? 네 복수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
크리스틴은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에 사람들이 숲에서 기이하게 생긴 은빛 늑대를 봤다고 했어. 그들이 사육하던 늑대 중에 한 마리였겠지. 하지만 내가 그들의 늑대 우리를 찾았을 때 은빛 늑대는 없었어.”
“그들이 은빛 늑대를 사육한 게 아니었겠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크리스틴은 한편으로 안도했다.
그는 아델의 어머니를 해코지한 귀족 따위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사육된 적도 없었고.
그러니 아델 어머니의 죽음과는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아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늑대 우리의 늑대들이 모두 죽어 있었어. 엄마와 똑같이 다섯 개의 발톱 자국이 남은 채 온몸이 찢겨 있었지. 은빛 늑대가 거기 있던 늑대들도 죽이고 도망친 게 분명해.”
“가만, 다섯 개의 발톱 자국이라고?”
“그래, 놈은 평범한 늑대와 달라.”
“늑대가 아닐 수도 있어.”
“땅에 찍힌 건 분명히 늑대의 발자국이었어. 그리고 지금껏 잠잠하다가 얼마 전 황궁에 다시 출몰한 거야. 그리고 경비병이 죽었지. 만일 경비병의 시신에 다섯 개의 발톱 자국이 있다면 이번에도 놈의 짓이 분명해. 은빛 늑대!”
“그렇게 되는 건가……?”
“빨리 놈을 잡아야 해. 안 그러면 희생자들이 계속 나오게 될지도 몰라.”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다섯 개의 발톱 자국이라니…….
그는 보통의 늑대와 달리 변이되었을 때도 다섯 개의 발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늑대 우리에 갇힌 적이 없었으니, 늑대들을 죽이고 도망친 것 역시 자신이 아니라는 뜻.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아델의 어머니와 늑대 우리의 늑대들을 죽인 걸까?
어쩌면 황궁의 경비병을 죽인 것도 그것의 소행일지 몰랐다.
자신과 같은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짐승.
정말 늑대라면 놈도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늑대 일족 중의 하나일까?
아니면 만에 하나, 내가 해놓고 기억 못 하는 건……?
그럴 리 없어!
하지만 크리스틴은 반드시 그것의 정체를 밝혀야만 했다.
스스로에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일족을 찾기 위해서라도.
“알았으니까, 이 일은 내게 맡기고 당신은 손 떼.”
예상대로 아델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놈은 내 원수야. 그러니까 내가 찾을 거야.”
“이 일을 조사하기 위해선 지위도 있고, 부릴 사람들도 있는 내가 더 적합해. 감정보단 합리적인 결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하지만…….”
크리스틴은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아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10년 전 그 끔찍한 일을 당신 혼자 감당한 거로 충분해. 그러니까 이제 내게 모두 맡겨.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
“크리스…….”
“제발, 아델…….”
아델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너무나 간절했다.
충혈된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벌컥!
그 순간 진료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미아가 나타났다.
침상에 앉아 있는 아델과 그 앞에 간절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크리스틴.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그녀는 타이밍을 잘못 맞춰 등장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머, 제이드가 여기에도 없네. 제이드랑 술래잡기하던 중이었거든. 호호홍! 그럼 이만 실례!”
미아가 얼른 돌아서는데, 크리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드는 내가 찾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진료실을 나갔다.
***
하지만 복도로 나온 크리스틴은 난감한 얼굴로 멈칫했다.
“진짜 바이스 백작님 맞아요?”
“증거 있어요?”
“그럼 화이트 고스트 기사들은 어디 있어요?”
어린 환자들이 그를 에워싸며 쉬지 않고 물어왔다.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경외감이 가득했다.
그때 제이드가 앙증맞게 뛰어오며 소리쳤다.
“진짜 바이스 백작님 맞아! 나랑 칼싸움을 했는데 엄청, 엄청나게 셌어!”
“에이, 별로 안 세 보이는데.”
“맞아, 백작님은 몸이 집채만 하다고 했어. 얼굴도 무시무시하게 생기고.”
아이들이 믿지 않자 제이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맞다니까!”
“거짓말, 거짓말쟁이!”
아이들의 소란에 급기야 마크까지 복도로 나왔다.
“요놈들! 빨리 안 들어가면 엄청, 엄청 쓴 약을 먹일 줄 알아라!”
그 말에 아이들이 후다닥 병상으로 뛰어 들어갔다. 밤새도록 앓던 아이들은 열이 떨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팔팔해 보였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마크는 흐뭇하게 웃다가 제이드에게도 엄포를 놓았다.
“너도 제이드. 진료소에 자꾸 드나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델에게 이거 주려고요.”
제이드는 그림을 그린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그림 속에 흑갈색 머리카락에 초록 눈의 여자가 아델인 모양이었다. 새빨간 입술로 활짝 웃는 모습이 마녀 같았지만, 그 아래 ‘아프지 말고 빨리 나으세요.’라는 삐뚤빼뚤한 글씨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얼른 그림만 전해드리고 나오는 거다. 깨끗이 손 씻는 거 잊지 말고.”
“네, 아빠!”
신나서 아델의 진료실로 뛰어가는 꼬마 제이드를 보며 크리스틴은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활기찬 아이들의 소란과 기분 좋은 마크의 웃음소리, 바빠죽겠다면서도 흥얼거리며 돌아다니는 쥬디…….
오래된 나무 복도에 스며드는 겨울 햇살이 이곳에선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의지하는 만큼 나도 그 사람의 힘이 돼 주고 싶어서, 결혼은 그래서 하는 거 아닐까?”
“그게 그놈이다?”
“아마도.”
아델이 그를 왜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난 시간 그녀의 삶이 너무 추웠을 테니 이런 온기가 그리웠으리라.
이 남자라면 어쩌면 자신보다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아델을 부탁해.”
갑작스러운 말에 마크가 당황했다.
“그게 지금 무슨 뜻……?”
그러자 크리스틴은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황궁에 들어가 봐야 하니 그동안 부탁한다는 뜻이야. 또 무슨 뜻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예, 그 생각이었습니다, 백작님.”
마크는 노여워하지 않고 사람 좋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온화해서 크리스틴은 왠지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서 인사도 없이 진료소를 나가 버렸다.
아델을 위해서 포기하는 게 맞다고 해도,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피비린내 가득하던 전쟁터에서도 늘 그리워했었다.
그녀의 웃음, 그녀의 체취, 그녀와 함께 있던 집을…….
***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어느새 옆에 다가온 미아가 마크와 함께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 마당을 가로지르는 크리스틴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념해, 마크.”
무슨 뜻이냐는 듯 마크가 바라보자 미아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아델 말이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재채기와 사랑은 숨기지 못한다더니 아델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너무나 잘 보였다.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크리스틴의 이름만 나와도 그렇게 애틋한 눈빛이 되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게다가 조금 전 두 사람의 분위기는 결코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글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단념한다고 해서 단념이 되는 것도 아니지.”
마크는 눈 시리게 맑은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히 웃었다.
“마크…….”
미아가 미련스러운 혈육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지만, 정작 본인은 씩씩했다.
“그렇게 보지 마, 미아. 나는 그냥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할 거야. 상처받더라도 그건 내가 감당할 몫이지. 그리고 나, 치료 전문가잖아.”
미아가 눈을 흘겼다.
“동생 입장에선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거 알지?”
“내가 내 동생이라도 때려주고 싶었을거야.”
“하, 진짜!”
황당해서 웃는 미아의 옆에서 마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미 그도 알고 있었다. 아델을 향한 크리스틴의 마음이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지난밤 사경을 헤매던 아델이 줄곧 부른 것은 ‘크리스…….’였으니까.
하지만 크리스틴에게 굳이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