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아무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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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아무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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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아무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2022.05.23.
크리스틴은 아델의 침상에 걸터앉으며 그녀의 창백한 손을 보듬어 쥐었다.
“결혼하자, 아델.”
한동안 어리둥절하던 아델은 화들짝 놀라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고 더 꼭 움켜쥐었다.
“장난하지 마…… 크리스…….”
“장난 아니고,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진지해.”
“황녀님은 어쩌고?”
“황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오해는 풀렸을 텐데?”
“하지만 모든 사람은 네가 황제의 부마가 될 거로 생각해. 가장 적임자이기도 하고.”
크리스틴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생각은 상관없어. 당신과 내 결혼이고, 우리의 생각이 중요해.”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청혼이라니…….”
“싫어?”
우습게도 아델은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황녀님 대신 나를 선택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장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심하게 쿵쿵 뛰며 설레기까지 했다.
이렇게 기습 프러포즈라니.
“왜 말이 안 돼. 나는 당신이 내 아내가 됐으면 좋겠어.”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오해했었으니까. 당신이 돈과 지위 때문에 날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닌 걸 알았으니 더는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난, 잘 모르겠어.”
혼란스러워서 고개를 젓는 아델을 크리스틴이 끈기 있게 설득했다.
“당신이 그랬잖아. 당신이 의지하는 만큼, 힘이 돼 주고 싶은 사람과 결혼 할 거라고. 내 힘이 되어줘, 아델.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야.”
“말도 안 돼. 넌 모든 걸 다 가졌잖아. 내 도움 따윈 필요 없으면서.”
“아니, 당신을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가진 거야. 그리고 난 계속 불행할 거야.”
“협박하니?”
아델이 어이없어하자, 그가 사르르 눈웃음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승낙해주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
세상에서 이토록 섹시한 얼굴로 협박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 기가 막혀…….”
“날 아직도 미워하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리냐는 듯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 없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아델의 순진한 목소리에 크리스틴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하지만 당신 어머니의 죽음도 장례식도 함께해주지 못했잖아.”
“난 사경을 헤매는 아저씨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널 두고 떠났는걸. 내 복수에만 눈이 멀어서. 그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언젠가 만나면 꼭 사과하고 싶었어.”
“사과는 됐어. 10년 동안의 나빴던 기억 같은 건 다 잘라버리고 다시 행복하게 살자. 당신은 다시 열여덟 그 소녀로 돌아가는 거야.”
아델은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늘 원하던 것이었다.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으니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와 함께라면 10년의 세월을 지워버린 것처럼 사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럴 수 있을까?”
“나만 믿어. 이제는 발을 밟지 않고 춤출 수 있는 남자가 됐으니까.”
춤뿐 아니라 크리스틴은 이제 세상의 어떤 남자보다 더 완벽하고 믿음직했다. 그의 손만 잡으면 눈을 감고도 안전하고 행복한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선물이 빠졌군. 다시 프러포즈할게 아델.”
그는 재킷 안쪽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야심 차게 열었다.
“나와 결혼…….”
그러다 당황해서 얼른 닫았다.
“크흠, 프러포즈 선물은 나중에 하는 거로…….”
하지만 아델은 그의 손에 들린 상자를 집어서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건 화려한 보석 반지가 아닌, 작은 꽃을 엮어서 만든 꽃반지였다.
“미안, 짐머에게 급하게 준비하라고 시켰더니.”
알고 보면 짐머는 꽃 성애자인지도 몰랐다.
“여기 메모가 있네.”
아델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메모지를 펼쳐서 읽었다.
[반지는 두 분이 함께 고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아델과의 결혼은 황궁에서 마크의 진료소로 오는 동안 결정한 일이었다. 그 사이 짐머에게 급하게 반지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짐머 경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승낙한다는 뜻인가?”
대답 대신 그녀는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끼워줄래?”
상자 안에 든 꽃반지를 조심스럽게 꺼낸 크리스틴은 가늘고 하얀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창백하고 마른 손가락은 꽃반지를 낀 것만으로도 화사해졌다.
“어때?”
아델은 꽃반지를 낀 손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좋은 반지를 선물 받은 것처럼.
“예뻐. 눈부실 정도로. 하지만 그 반지가 시들기 전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반지를 맞추러 가자.”
“으응.”
그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아델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왜인지 모르겠다. 뭔가 울컥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오래전부터 간절히 기다렸던 순간인 것처럼.
놀란 아델이 얼른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는데,
“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
크리스틴의 짓궂은 농담에 그녀가 픽, 웃었다.
“바보야. 당연히 아니지. 너무 꿈같아서…….”
크리스틴은 빙그레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아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큰일이네, 키스하고 싶은데 당신이 아프니까 참아야 해서.”
아델은 민망해서 눈을 흘기더니, 새침하게 제 뺨을 가리켰다.
“뭐, 여기 정도는…….”
그는 아델의 양쪽 뺨에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맞췄다. 그러다 입맞춤을 멈추고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얼른 나아, 아델.”
그의 얼굴에는 겨우 참는 중이라는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어루만지는 손길이 야릇했다.
“그렇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짓지 마.”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아델이 그의 양 뺨을 잡아 흔들었다.
“읏! 결혼하면 당신은 이거부터 금지야.”
그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경고했지만,
“그럼 그 전에 많이 해둬야겠네.”
아델은 다시 장난스럽게 그의 양 뺨을 잡으려고 했다.
풀썩!
결국, 크리스틴은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올라왔다. 아델의 심장이 쿵쿵 심하게 울려댔다.
이 소리는 내 것일까? 어쩌면 그의 것인지도…….
오롯이 그녀를 담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가 너무 뜨거웠다. 마치 이성 따윈 없는 짐승의 눈 같았다.
이대로라면…….
“크리스, 나 아직…… 환자야.”
그제야 크리스틴은 아델의 손목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감당할 수 없으면 건드리지 마. 다음엔 못 참을지도 모르거든.”
그의 무시무시한 경고에 아델은 심장이 쿵쿵 뛰다못해서 울렁거렸다. 하지만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뭐야, 무서워서 장난도 못 치겠다. 그런데 결혼하려면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그녀는 오스월드 후작가에 들어오던 첫날 결혼식을 올렸다. 소수의 후작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인사를 하고 결혼 서약서에 사인한 것이 전부였던 결혼.
형식적으로라도 축하의 인사 따윈 없었다. 생전 처음 실크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어린 신부를 다들 날카롭게 관찰하기만 했을 뿐.
물론 아델에게는 그런 분위기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처음 만난 남편의 모습이 너무 충격이었으니까. 남편에 대한 기대 따윈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휠체어에 실려 나온 거동도 못 하는 늙은 후작이라니.
울고 싶은 걸 겨우 참아야 했던, 장례식보다 더 우울했던 결혼식이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일단 사흘 후에 약혼식부터 할 거야.”
생각에 잠겨있던 아델은 깜짝 놀랐다.
“사흘 후에 약혼식?”
“음, 내 임관식이 끝난 뒤 바로. 약혼 후에 우리는 함께 살 거고.”
“가만, 우리가 함께 산다고?”
아델은 정신없이 진행되는 일정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래. 앞으론 당신을 내 곁에 두고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할 거야.”
그는 아델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다시는 그녀가 힘들고, 아프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황제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도 안 하고 같이 산다니…….”
“그럼 사흘 후에 아예 결혼식을 해버릴까?”
아델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거야, 크리스.”
너무 들뜬 나머지 아델은 잠시 현실을 잊었다.
그녀는 오스월드 후작 부인이었다. 남편을 독살했다는 혐의는 있지만, 독살을 입증하지 못했다며 가주인 스톤은 가문에서 파문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그의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첫째는, 아델을 배려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자신의 평판을 올리는 것.
둘째는, 그녀를 평생 오스월드 가에 묶어둘 계산이었다는 것.
“오스월드가에서 파문하거나 제명당하지 않는 이상 난 오스월드 후작 부인이야. 그러니 다른 남자와 결혼은 물론 약혼도 할 수 없어.”
게다가 한 가지 더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보고만 계실까?”
이미 임관식이 끝난 후에 에이프릴과 약혼식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그 약혼녀가 바뀌게 됐으니, 황제가 순순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아델의 걱정을 알아챈 듯 크리스틴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염려하지 마, 황제와 이미 다 얘기됐어. 당신은 얼른 몸을 추스르기만 해.”
하지만 아델은 순순히 믿을 수 없었다. 만일 황제가 이 모든 것을 승인했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백지 문서를 주기로 했구나?”
크리스틴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음. 하지만 황제가 왜 그걸 찾는지는 나도 몰라. 당신은 짐작 가는 게 있어?”
“그건 말 그대로 백지 문서일 뿐이야. 황제가 되기 전 발렌시아 대공의 사인이 전부고.”
“그렇게 보이도록 어떤 장치를 해뒀겠지.”
“나도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글씨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아마 마법으로 봉인을 해뒀을 거야. 10년 전만 해도 마법사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
칼라임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많은 마법사가 동원되어 희생되었다. 혹자들은 교황청에서 마법사들을 없애려고 일부러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틴은 호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해. 그 문서는 원로회의 약점일 수도 있고, 황제의 약점일 수도 있다는 것. 일단 황제의 손에 쥐여 줘 보면 알 수 있겠지.”
***
황궁 북쪽의 검은 성.
커다란 청동화로 위에 청록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가까이 다가가도 뜨겁지 않은 것이 마치 환영인 것만 같았다.
“조심하십시오, 어느 순간 불꽃이 집어삼킬 수도 있으니.”
넋 놓고 바라보던 얀은 음산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의 옆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후드 아래로 화상을 입은 피부와 짐승의 눈을 박아 넣은 것 같은 기괴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칼라임에 몇 명 남지 않은 상급 마법사 케니였다.
케니는 자루 안에서 말린 약초를 꺼내 불꽃 위에 던졌다.
파앗!
그의 말을 증명하듯 청록색 불꽃은 약초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러자 주변이 온통 기묘한 냄새를 풍기는 뽀얀 연기로 뒤덮였다.
얀은 얼른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한 손으로 붉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크리스틴에게 넘겨받은 백지문서였다.
“시작하게.”
자욱한 연기 속에서 케니가 붉은 두루마리를 길게 펼치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화상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ՁթպֆՓ…….”
보는 것만으로도 음산하고 기분 나쁜 장면에 얀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우우우웅…….
이내 주변을 맴돌던 연기가 텅 빈 두루마리 속으로 빨려드는가 싶더니, 일렁이며 글자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얀은 여전히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그 위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크리스틴의 예상대로 그것은 백지처럼 보이도록 봉인해 놓은 문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