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칼라임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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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칼라임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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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칼라임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
2022.05.27.
“폐하께서 찾는 문서가 맞습니까?”
“맞네. 10년 전 그대로군.”
그러더니 황제는 다시 덧붙였다.
“태워 없애게.”
하지만 케니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 문서에는 보호 마법이 함께 걸려 있습니다. 마법을 건 당사자가 해제시켜야 태우는 게 가능합니다.”
“그자는 죽었네. 방법이 없겠나?”
“죽은 마법사보다 더 상급 마법사라면 가능합니다.”
“자네보다 더 상급 마법사를 찾아야 한다는 건가?”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이 문서를 없앨 수 없습니다.”
얀은 낭패스러운 표정이었다. 칼라임의 전쟁으로 마법사들은 대부분 희생되었거나, 희생되지 않기 위해 숨어버렸다. 케니 역시 전쟁에서 화상을 입고, 두 눈을 잃은 후 겨우 목숨을 부지 한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걸 없애야 하는데…….’
얀은 그래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검은 성의 성탑 위.
크리스틴은 팔짱을 끼고 성벽 난간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럼 자네보다 더 상급 마법사를 속히 찾아보게.]
[시일이 좀 걸릴 것입니다.]
[자네만 믿지.]
끼이익.
뚜벅, 뚜벅…….
황제가 문을 닫고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지 문서를 건네받은 얀은 마법사를 만나서 문서의 진위를 확인했다. 진품인 걸 확인하고는 바로 불태우려고 했다.
그렇다면 백지 문서는 얀의 약점이라는 뜻.
그토록 손에 넣으려고 한 이유는 그것이 세상에 나오면 그가 매우 곤란해진다는 얘기였다.
“맞네. 10년 전 그대로군.”
문서가 작성된 것이 10년 전.
오스월드 후작이 도적들에게 습격당해 산송장과 다름없게 된 것도 10년 전이라고 했다.
두 사건이 결국 연관 있다는 것인가?
후작은 발렌시아 대공의 약점이 담긴 문서를 손에 넣었고, 대공은 그 문서를 빼앗기 위해 도적들을 이용해 후작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살해는 실패하고 후작은 산송장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 문서는 후작의 금고 안에 잠자고 있다가 아델에게로 넘어온 것이리라.
여기까지 가설을 세우던 크리스틴의 입매가 스르르 올라갔다.
“생각보다 재미있게 됐군.”
황제가 아델이라는 약점을 찾아냈듯이, 그 역시 황제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문서를 언제라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아델이 오랫동안 갖고 있었기에 이미 그녀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었다. 황제가 어디에 숨겨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황제는 그가 가진 능력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
사흘 후 약혼식 당일.
“진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바이스 백작님과 약혼이라니!”
타냐는 아침부터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몰랐다.
그때마다 조용히 웃었지만, 아델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마크의 진료소에서 겨우 몸을 추스르고 나온 게 어제 오후였다. 그런데 오늘 바로 약혼이라니.
게다가 황제의 특별 배려로 두 사람의 약혼식은 황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해마다 악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억울하고 비참한 기분을 느끼곤 했던, 그 황궁 대연회장에서 말이다.
그뿐 아니었다. 황제는 약혼식 준비를 위해 그녀가 귀빈실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귀빈실 밖은 이제 크리스틴의 부하가 된 근위대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 모두가 황녀에 준하는 대우였다.
귀빈실 안은 샤넬의 집 최고 디자이너들이 아델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화장과 머리 손질을 도왔다.
타냐는 옆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보며 쉴 새 없이 감탄하는 중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마음에 드세요?”
샤넬 부인의 말에 하녀들이 아델의 앞에 전신 거울을 가져왔다.
“……!”
거울 속 낯선 여자의 모습에 아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들여 화장한 덕분에 그녀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더 윤기 나고 청순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초록색 눈동자는 한층 고혹적인 느낌이 들도록 눈매가 강조되었고, 입술은 갓 피어난 장미 꽃잎같이 촉촉하고 사랑스러웠다.
웨이브를 넣어 틀어 올린 머리는 안개꽃과 진주로 장식했고, 덕분에 가늘고 우아한 목선과 어깨가 한층 돋보였다.
거기에 샤넬 부인의 최대 야심작이라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는 그녀를 완벽한 여신처럼 보이게 했다.
“꺅, 예뻐요, 예뻐!”
옆에 있던 타냐와 하녀들이 호들갑스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게까지 호응 안 해 줘도 돼.”
민망한 아델은 그녀들에게 살며시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샤넬 부인도 드레스의 주름을 잡아주며 동조했다.
“어머, 감탄이 나오는 게 당연하죠. 부인께선 제 최고의 작품이니까요. 백작님이 심장마비에 걸리실까 봐 정말 걱정되네.”
샤넬 부인은 실력만큼이나 말재주도 뛰어났다. 괜히 칼라임의 인기인이 아니었다.
인사치레라는 걸 알면서도 아델은 조금 들떴다. 확실히 평소보다 아름다운 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크리스틴에게 보여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근거렸다.
“고마워요. 부인의 덕분에 저도 백작도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아요.”
“그래 주신다면 제가 더욱 영광이죠. 약혼 축하드려요.”
샤넬 부인이 아델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인사할 때였다.
“저기 백작님이 오시네요! 임관식이 끝났나 봐요.”
타냐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아델이 밖을 내다보자 크리스틴 일행은 황궁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귀빈실은 3층이라서 그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검은색 근위대 정복에 황금 견장을 단 그의 모습이 태양 아래에서 눈부셨다.
어깨에 두른 기다란 케이프 자락은 걸을 때마다 절도 있게 흔들렸고, 날렵한 허리에 찬 칼이 용맹스러움을 더했다.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엉덩이를 가로지르는 새시에는 못 보던 훈장이 매달려 있었다. 임관식에서 황제에게 받은 것이리라.
그의 뒤에는 짐머를 비롯해 수십 명의 근위대 장교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내 남자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순간 선두의 크리스틴이 걸음을 멈추었다.
척!
뒤따르던 장교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왜 갑자기 멈췄지?’
아델이 의아해하는데, 크리스틴은 그녀가 있는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지켜보고 있었던 걸 다 알았던 것처럼.
“……!”
눈이 마주치자 아델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창가에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사람들에게 다 들킬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크리스틴이 팔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고르고 하얀 치아가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꺅! 난 몰라!”
타냐와 하녀들이 방방 뛰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행이었다. 그녀들 덕분에 아델은 오히려 침착해 보일 수 있어서.
“아가씨, 창문을 열어서 꽃을 던져주세요!”
“그, 그렇게까지……?”
망설이는 아델을 향해 타냐가 화병에서 얼른 장미 한 송이를 꺼내왔다.
“어서요!”
“어서!”
사람들의 재촉에 아델은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엉겁결에 장미꽃 위에 입을 맞춘 후 크리스틴을 향해 힘껏 던졌다.
파란 하늘 위로 붉은 꽃이 새처럼 날아가더니……,
부드럽게 그의 손에 안착했다.
그는 보란 듯 아델이 입을 맞춘 것처럼 꽃잎 위에 제 입술을 내렸다.
“와아아아!”
뒤를 따르던 근위대 장교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델이 있던 귀빈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고상해 보이던 샤넬 부인까지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으니.
‘아아, 잠시 미쳤었나 봐.’
아델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얼른 창가에서 도망쳐 숨어버렸다.
그리고 이 부러운 광경은 아델과 크리스틴 주변 사람들만 본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약혼 연회에 참석하러 모이던 귀족들도 똑똑히 본 것이다.
황제와 에이프릴, 그리고 세이라까지도.
***
황궁의 대연회장인 그랜드 홀은 인파로 가득 찼다.
칼라임 대부분 귀족이 참석한다는 송년 연회보다 더 많은 인원이었다. 심지어 송년 연회에 불참하던 원로 귀족회 의원들까지 모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크리스틴과 아델의 약혼은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들은 칼라임 최고의 유명인이었으며, 너무나 파격적인 약혼이었으니까.
황제의 오른팔이며 근위대의 대장 바이스 백작.
다들 그가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황제의 부마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약혼녀가 느닷없이 남편을 독살한 칼라임의 악녀로 뒤바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황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바이스 백작은 임신한 황녀를 버리고 평소 오누이 같은 사이라던 아델을 선택한 것이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한 먹잇감이 또 있을까?
아델이 백작에게 주술을 건 거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밤마다 잠자리로 끌어들여 유혹했다는 말도 돌았다.
이에 분노한 황제가 오늘 그녀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일로 백작과 황제가 갈라서게 될 거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돌았다.
앞서가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들이 갈라서며 내란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들 황제가 그들의 약혼식을 위해 그랜드 홀을 내준 것은 뭔가 속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사람들은 조마조마하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차서 황제와 백작을 살폈다. 이건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구경거리였으니까.
물론 아직까지 황제와 백작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황제는 여전히 백작을 신뢰한다는 얼굴이었고, 백작은 그의 옆에서 절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은은하게 흐르던 악단의 연주곡이 로맨틱하게 바뀌었다.
잠시 후, 그랜드 홀 중앙의 나선형 계단 위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장내에서 나직한 함성과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계단 위에 아름다운 여신 같은 여인이 서 있었다.
처음엔 다들 누군지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 여자가 정말 오스월드 후작 부인이라고요?”
“정말 마법이라도 쓴 거 아닌가요? 전혀 다른 사람인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곳에서 추레한 상복 같은 옷을 입고 따돌림을 당하던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후광이 비출 정도로 눈부시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성큼성큼.
그녀를 마중하듯 계단을 올라간 크리스틴은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미치겠군,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나타난 거야?”
그는 매우 곤란한 얼굴로 아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왜, 나 뭐 실수한 거야?”
아델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익숙했지만 자신 때문에 크리스틴까지 그렇게 만들까 봐 걱정스러웠다.
“사람들이 다 알아버렸잖아.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황당해서 눈을 깜빡거리던 아델은 곧,
“풉!”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간 떨어질 뻔했잖아. 크리스.”
밉지 않게 흘겨보며 아델은 새침한 고양이처럼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그 손등 위에 사랑스럽게 입 맞추며 크리스틴이 다시 속삭였다.
“나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어, 아델.”
“샤넬 부인에게 특훈이라도 받은 거야?”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아델은 그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갔다.
칼라임의 오만한 귀족들이 부러움과 질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몇몇 여인들의 눈에서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멸시와 조롱받는 것보다는 확실히 이쪽이 더 나았다.
아델은 보란 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그저 만끽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