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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늑대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34/155)


34화. 늑대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2022.05.30.


계단을 내려온 크리스틴과 아델은 황금빛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 부부에게 예를 올렸다.

그동안 황후는 시종일관 못마땅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적당히 웃는 얼굴로 덕담을 하며 뒤에 있던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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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오게.”

사람들은 이 상황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시종장이 황제에게 칼을 건네고, 그 칼로 아델의 목을 베어버리는 상상을 하면서. 아델을 질투하는 몇몇 사람들은 정말 그러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종장이 들고 온 것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류였다.

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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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 그릴스. 황제의 권한으로 이 시간 이후 그대를 오스월드 후작가에서 제명할 것이오. 이의가 있는가?”

그 순간 아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크리스틴과 약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오스월드 후작 부인이었다. 끔찍한 족쇄처럼 따라다니던 호칭.

그러나 이제는 망령 같은 오스월드의 이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델.

그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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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폐하.”

아델은 붉어진 눈시울로 황제를 향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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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나의 선물이오. 아델 양.”

얀은 서류와 함께 작고 화려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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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남쪽에 있는 별궁의 열쇠지.”

그 순간 크리스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아델을 황궁 안에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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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약혼녀가 머물 저택은 이미 마련해두었습니다, 폐하.”

얀은 한껏 자애로운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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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게. 근위대장은 앞으로 황궁에서 살다시피 해야 할 터. 한창때의 연인들을 생이별시킬 수야 있나. 부디 짐의 마음을 거절하지 말게.”

수많은 귀족이 눈을 반짝이며 크리스틴과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누가 봐도 얀은 이미 많은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선물을 거절당한다면 황제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칼을 뽑아야 했다.

게다가 오스월드 가문으로부터 아델을 해방시켜 주었으니, 크리스틴으로선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얀은 보란 듯 열쇠를 건넨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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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받으시오.”

얀은 재촉하듯 아델에게 열쇠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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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으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델이 공손하게 받아들자,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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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 백작과 그의 아름다운 약혼녀를 위하여!”

언제 아델의 목이 날아가려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조금 김이 빠졌다. 하지만 다들 속내를 숨기며 황제를 따라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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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입가에 술잔을 가져가던 크리스틴과 황제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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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문서는 잘 확인했네. 약속대로 자네가 원하는 여자와 약혼을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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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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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날 배신한다면 그녀가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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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법입니다. 폐하께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 저와 화이트 고스트 기사단은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나눈 얘기를 다시 한번 눈빛으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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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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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의외로군요. 당연히 에이프릴의 약혼식이 될 줄 알았는데.”

황제 부부에게 다가온 사람은 흑발의 우아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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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이자벨 님.”

얀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이자벨 발렌시아.

전대 황후로 얀의 형수였다. 전쟁으로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황제는 그녀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로드웰 공작으로 원로 귀족회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현재 얀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인물 중 한 명.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은 다시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송년 연회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야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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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우리 에이프릴이 칼라임의 악녀에게 진 건가요?”

이자벨의 목소리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음이 묻어 있었다.

황후가 정색하며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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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요. 우리 에이프릴은 남자를 만나기엔 아직 어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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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얌전한 고양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처녀 아이에겐 꽤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아닌가요?”

황제 부부와 함께 있던 에이프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때 아델이 조심스럽게 인사하며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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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라는 것은 원래 부러운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 나는 법이지요. 그리고 소문은 결국 진실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당돌한 아델의 태도에 이자벨은 심기가 상한 듯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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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의 남자를 빼앗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모양이죠? 편드는 척이라니.”

그러자 에이프릴이 어른스럽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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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어머님께서 뭔가 오해하신 모양이네요. 제게 백작은 오라버니와 같은 사람이에요. 아델 양은 제 친구고요. 말 만들기 좋아한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을 낸 걸 그대로 믿으시다니요.”

아델도 다시 에이프릴의 편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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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해서 구역질만 해도 이상한 소문이 나는 곳이 사교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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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기침했다간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겠어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자벨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에이프릴은 아델과 함께 돌아섰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아델과 에이프릴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라도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델은 에이프릴을 편들고, 에이프릴은 그녀를 친구라고 말했다.

크리스틴을 사이에 두고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아니 무척 친근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소문이 잘못된 거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겨진 이자벨은 민망해서 귀까지 빨개졌다. 순진한 에이프릴에게 이렇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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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보던 사이에 어른이 됐군요, 에이프릴이.”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우아하게 부채질을 하며 돌아섰다.

황제 부부는 겨우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되었다.

***

에이프릴은 아델과 함께 연회장 옆에 딸린 개인실로 들어왔다.

탁!

문을 닫기 무섭게 그녀가 아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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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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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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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요! 누가 당신 칭찬 따위 듣고 싶다고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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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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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 말대로 당분간 친구처럼 보이도록 하는 게 좋겠네요.”

연회가 시작되기 전 아델은 에이프릴을 찾아왔던 것이다.

크리스틴과 불미스러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선 서로 친해 보이는 게 좋을 거라고.

물론 에이프릴은 동의하지 않고 아델을 쫓아내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우습게도 아델과 손을 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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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같은 여자.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해서 믿었는데…….”

아델은 씁쓸하게 웃었다. 악녀라는 소리를 듣는데 이골이 나 있었지만, 에이프릴에겐 정말 못된 짓을 한 기분이었다.

크리스틴과 오누이 같은 사이라는 말에 황녀가 얼마나 호의적이었던가?

그래놓고 뒤통수를 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황녀가 잘못 한 것도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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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께서도 바이스 백작과 사람들을 속이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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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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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너무 간절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달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더니 아델은 에이프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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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이에요! 얼른 일어나요!”

에이프릴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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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과의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습니다. 저 역시 그와 오누이처럼 지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도저히 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사게 되어 죽더라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그러니 부디 마음을 풀어주세요, 황녀님.”

아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제는 그를 향해 내달리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 마음이 부디 크리스틴의 앞길에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에이프릴은 그런 아델이 밉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해도 됐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느끼지 않았던가. 그녀와 크리스틴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곳은 없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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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 백작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것만은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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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에이프릴은 다시 한번 아델이 미워죽겠다는 듯 노려보았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저 표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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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날 밤 백작이 내 침실에 들어온 건 사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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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다는 표정. 그건 크리스틴을 절대적으로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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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도와준 건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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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께서도 절 도와주셨습니다.”

에이프릴은 시종일관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아델이 못마땅했다. 크리스틴이 왜 자신이 아닌 그녀를 택했는지 알 것만 같았으니까.

성숙하고 우아한 그녀의 옆에 있으니 자신은 아직도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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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가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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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

아델이 방을 나오자 밖에 크리스틴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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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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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약혼녀를 지키기 위해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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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과 얘기를 나눈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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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황녀야.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당신을 해칠 수 있어.”

한껏 진지한 크리스틴을 보며 아델은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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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여자들끼리 풀 문제가 있었어. 그리고 잘 풀었고.”

온화한 표정으로 그를 안심시킨 아델은 자연스럽게 그의 팔뚝에 손을 올렸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더 바싹 팔짱을 끼게 했다.

제복 아래에 돌같이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게다가 조금만 가까워지면 그 팔에 가슴이 닿을 것만 같아서 아델은 난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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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무 가까워, 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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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약혼식인데 뭐 어때.”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크리스틴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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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건 예의에 어긋나.”

크리스틴도 멀끔하고 신사적인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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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쁜 입술로 자꾸 속삭이니까 키스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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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

짓궂게 사르르 휘어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델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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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그는 정말 여기서 키스를 해버릴 것처럼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크리스틴이었으니 내키면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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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아까 장미꽃을 받는 순간부터 계속 키스하고 싶었어.”

꾸욱!

아델은 그의 발을 지그시 지르밟으며 미소를 짓는 얼굴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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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난처한 소리를 하면 이번엔 뒤꿈치로 밟아버릴 거야, 크리스.”

그녀는 지금 샤넬 부인의 선물인 은빛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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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이프릴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단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처럼 쉽게 단념이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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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대로 포기하실 건가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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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세이라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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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기서 웃고 계셔야 할 사람은 황녀님인데……. 죄송합니다. 보고 있자니 제가 다 화가 나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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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요, 다 끝난 일이니까. 저번엔 내가 아무래도 어떻게 되었나 봐요. 세이라 양의 말만을 듣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에이프릴의 말에는 세이라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거워서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정도였다.

하지만 세이라는 오히려 그런 에이프릴을 책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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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조금만 더 시치미를 떼고 폐하께 도움을 청하셨어야죠. 그랬으면 백작은 황녀님의 차지가 됐을 거예요. 황궁에서 자라오신 분이라 어느 정도 요령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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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바보 같아서 일을 그르쳤다는 건가요?”

에이프릴이 화를 내자 세이라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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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황녀님께서 보기 드물게 순진하시다는 걸 몰랐던 제 탓이죠.”

세이라는 비아냥거리듯 부채를 흔들며 돌아섰다.

에이프릴은 속상해서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눈앞에서 백작과 아델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세이라에게 바보 취급까지 당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힐끔거리며 속닥거리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만했다.

더이상 속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할 것 같아서 얼른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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