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첫날 밤의 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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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첫날 밤의 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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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첫날 밤의 외박
2022.06.13.
다음 날 아침.
“아가씨…….”
타냐는 조심스럽게 아델의 침실 문을 열었다.
마블 궁의 하인들에게 이미 지난밤의 일에 대해서 들었다.
지난밤 아델이 아파서 의사가 다녀갔고, 크리스틴은 그대로 말을 타고 나가서 아직도 안 들어왔단다.
대체 지난밤 두 분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제의 분위기로 봐선 밤새도록 뜨겁고 달콤할 것만 같더니…….
퀭…….
침대에 앉아 있는 아델의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에 다크 서클까지 내려와 있었다.
“괜찮으세요?”
“응.”
아델은 웃어 보였는데 그 표정을 억지로 만드는 것 같아서 보기가 괴로웠다.
“저한테까지 숨기려고 하지 마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타냐…….”
“예, 말씀하세요.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약혼 같은 거 괜히 했나 봐.”
타냐가 깜짝 놀라 아델의 침대 옆에 앉았다.
“설마 백작님도 알고 보니 나쁜 놈이었던 거예요?”
“무슨 소리야!”
아델이 살며시 흘겨보자 타냐는 찔끔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아직 둘 사이가 그렇게까지 파탄지경은 아닌가 보다.
“그럼 왜……?”
“난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살아왔거든. 그런데 그가 고작 하룻밤 안 들어온 게 왜 이렇게 속상하고 못 견디겠는지 모르겠어. 내 기분이 온통 그에게 좌우되고 있는 것 같아서 속상해.”
아델은 밤새도록 크리스틴을 기다렸다.
문밖에서 들리는 작은 기척에도 그가 돌아온 걸까 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는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아델은 버림받은 기분에 우울해졌다.
“당연하죠. 이제는 두 분이 함께하기로 약속한 건데, 백작님께서 약속을 어기신 거잖아요.”
“하지만 난 그를 얽매고 싶진 않아.”
“그건 얽매는 게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고 예의라고요.”
“그런가? 그가 날 배려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한 거겠지?”
“그렇겠죠. 그런데 어제 백작님하고 왜 싸우신 거예요?”
“글쎄, 싸웠다고 해야 하나…….”
크리스틴도 나름 기분이 상했다면 싸운 게 맞는 걸까?
등의 표식을 숨길 생각만 급급해서 그의 기분을 배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몸 상태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아델은 모든 걸 털어내듯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를 만나서 얘기를 해야겠어. 이대로 서로 감정이 상한 채로 시간을 보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백작님은 아가씨에게 푹 빠져 계시니 대화만으로도 잘 풀리실 거예요.”
그건 아델도 동감했다. 그와 이렇게 어긋나 버렸지만, 크리스틴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먼저 손 내밀면 분명히 그가 잡아 줄 거야.’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길게 속을 끓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얼른 씻고 나오세요. 제가 최고로 예쁘게 해드릴게요. 아가씨를 보시는 순간 백작님의 화가 눈 녹듯이 녹아버리도록.”
눈을 찡긋하며 웃는 타냐를 아델은 살며시 끌어안았다.
“타냐, 네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안 그랬으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저도요, 아가씨.”
타냐가 함께라서 아델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랐다.
***
하지만 타냐는 크리스틴을 만나러 가겠다는 아델을 단호하게 막았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식당으로 향하는데 핸리가 다가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고서.
“좋은 아침이야.”
세이라가 한스 부인을 포함한 귀부인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늘 그녀를 시녀처럼 따라다니는 무리.
이름하여 세이라와 잔당들!
“예고 없이 방문하기엔 이른 시간 같은데?”
아델은 그녀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것을 표정과 말투로 확실히 드러냈다.
그러자 세이라를 제외한 잔당들이 움찔하며 눈치를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델은 그녀들의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이 퍼트린 소문에 손가락질당하고, 따돌려지고, 연회장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그림자처럼 서 있던 여자.
그럼에도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겁먹고 도망치지 않는 게 기분 나빴다.
그래서 여자들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악랄하게 굴었는지도 몰랐다. 혼자가 아니라서 죄책감 따윈 없었다.
세이라는 그녀들의 그 어두운 마음을 한껏 부추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아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머무는 마블 궁은 근위대들이 지켰고, 여러 명의 하인이 뒤에 늘어서 있었다.
게다가 특별히 화려하게 치장을 한 것도 아닌데 아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품있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그녀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델은 이제 자신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근위대장의 약혼녀.
황녀의 친구.
하지만 세이라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아델에게 여전히 당당했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말아요, 아델 양. 그래도 한때는 모녀지간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아침 일찍 왔다고.”
그러더니 아델의 뒤에 서 있는 핸리를 자신의 하인 대하듯 말했다.
“그쪽이 집사인가? 서둘러 오느라 우리가 아직 식사 전이거든. 부담가질 필요는 없고, 적당히 예의를 갖춘 식사면 되네.”
핸리가 난처하게 바라보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준비해줘요, 핸리.”
“예, 부인.”
***
식당으로 들어간 아델은 조금 놀랐다.
기다란 테이블은 손님들이 올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인들이 계속 음식을 날라왔다.
아침 식사가 아니라 당장 연회를 열어도 될 정도였다.
아델의 옆에서 물잔을 채우며 핸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원래는 주인님과 부인을 위해 준비한 아침 식사였답니다. 저 떨거지들을 먹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델은 귀를 의심하며 쳐다보았다.
떨거지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핸리가 그런 저속한 말을 쓸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 따윈 한 적 없다는 듯 점잖게 자리를 옮겨 세이라의 물잔을 채웠다.
잠시 후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세이라를 따라온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아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문이란 정말 믿을 게 못 되네요. 황녀님과 백작님의 이상한 소문이 결국 거짓이었잖아요.”
“그러게요. 어제 아델 양과 바이스 백작님을 보는 순간 진실이 뭔지 딱 알겠더라고요.”
“아델 양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죠. 누가 그렇게 악의적으로 퍼트렸을까요. 몹쓸 사람들!”
아델은 포크를 입에 문 채 황당해서 쳐다보았다.
그 소문을 퍼트린 당사자들이 고해성사라도 하러 모인 건가?
아니면 아침부터 자신을 웃겨주려고 찾아온 건가?
어쨌거나 그녀들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이상 아델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까지처럼 사교계와 척을 지면 크리스틴에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으니까.
“저 대신 화를 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소문 따위 별로 신경 안 써요. 진실은 결국 밝혀지는 법이니까요.”
아델이 우아하게 대꾸하자,
“역시 아델 양은 현명하시네요.”
“그러니 바이스 백작님을 단숨에 사로잡았겠죠.”
다들 맞장구를 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식사 내내 조용하던 세이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백작님은 안 보이시네.”
“백작님께선 아침 일찍…….”
핸리가 얼른 둘러대려 하자, 아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표시였다.
“근위대에 급한 용무가 생겨서 나가셨어.”
“정말 근위대의 용무 때문인가?”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세이라가 야릇하게 웃었다.
아델은 그게 마음에 걸려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세이라 넌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네?”
세이라는 피식 웃으며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럴 리가. 그냥 좀 걱정이 되어서 물어봤어. 백작님이 혹시 어제 내 얘기를 듣고 무슨 오해라도 한 게 아닐까…….”
“네 얘기라니?”
결국, 세이라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아델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제 백작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그만 스톤 오라버니와 아델 양의 얘기를 말해버렸지 뭐야.”
“……!”
스톤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아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스톤과 나의 일이라니……?”
아델은 떨리려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물었다.
“둘이 꽤 친했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함께 침실에 있었을 정도로.”
쾅!
아델은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이라!”
아델이 흥분하자 세이라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다시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었다. 미디움으로 익혀져 나온 고기는 칼질을 할 때마다 붉은 핏물이 접시에 고였다.
“어머, 뭘 그렇게 흥분해? 아델 양이 오라버니의 침실에 자주 드나든 건 사실이잖아. 빨랫감을 가지고 나오거나, 청소해야 했으니까. 오라버니는 자신의 침실에 아델 양 말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지. 덕분에 오라버니의 전담 시녀가 따로 필요 없었잖아. 둘 사이가 정말 특별했다니까.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세이라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오스월드 가에 살 때 스톤의 방은 아델이 청소를 전담했다. 다른 하녀들이 실수로 그 방에 들어갔다간 끔찍할 정도로 매를 맞았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얘기였다.
크리스틴 역시 그 얘기를 들었다면 오해를 했을지도 몰랐다.
설마?
그럼 어제 화를 내고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 것도 나와 스톤 사이를 오해해서였나?
내가 스톤 때문에 자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역시 스톤과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해야 하는 건가?
“그럼 식사 잘했어, 아델 양.”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아델을 보며 세이라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여인들은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녀들도 똑똑히 본 것이다. 스톤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아델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두 사람의 반응으로 미루어 스톤과 아델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소문처럼 정말로 둘이 부정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아델이 크리스틴에게 파혼을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면 다시 예전의 천덕꾸러기 악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은 일단 서로 눈짓을 하며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뭐 하세요? 계속 계실 건가요?”
그때 세이라가 노선을 분명히 하라는 듯 여인들을 재촉했다.
“그럼 우리도 그만 일어나죠.”
한스 부인이 선동하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럼 저, 저희도 그만…….”
다른 여인들도 못 이기듯 따라 일어섰다.
세이라를 선두로 떨거지들이 다시 우르르 식당을 나갈 때였다.
“내가 때마침 잘 왔나 보군.”
식당 문 앞에 근위대의 정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정복에 대비되는 눈부신 은발이 아침 햇살 아래 흩날렸고, 물빛을 담은 청회색 눈동자가 사람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미남자였다.
뜻하지 않게 그를 마주한 귀부인들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다들 바이스 백작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늘 사람들이 많은 공식 행사에서 먼발치로만 볼 수 있는 유명인이었으니까.
하지만 크리스틴은 다른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 따윈 아랑곳없이 성큼성큼 식당을 가로질렀다. 그러더니 아델의 앞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볼에 입을 맞췄다.
“몸은 좀 어때? 나의 사랑스러운 피앙새.”
뭐, 뭔…… 새?
아델은 새가 아닌 닭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