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기분 좋은 데이트를 위한 필수자세
(40/155)
40화. 기분 좋은 데이트를 위한 필수자세
(40/155)
40화. 기분 좋은 데이트를 위한 필수자세
2022.06.20.
“하아, 하아!”
크리스틴이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청동 조각처럼 잘 짜여진 상체는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추운 겨울 날씨에 몸의 열기가 김을 내며 피어올랐지만 그는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번 더 하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 제발 봐주십시오, 대장님!”
“다리가 막 후들거려 죽겠다고요! 근무 서다가 쓰러지게 생겼습니다.”
근위대원들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잘 벼려진 검날을 훑었다. 그러다 일순 눈빛이 흔들렸다.
익숙한 향기……!
“이제 끝난 건가요?”
아델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각각 커다란 라탄 바구니를 든 타냐와 하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눈에는 다른 사람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길게 풀어 내린 머리에 초록색 리본을 두른 아델은 너무나 청초하면서도 고혹적이었으니까.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며 햇살을 반사해내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눈이 부셔서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젠장,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더니 이렇게 예쁜 얼굴로 나타나면 어쩌라고.’
그런데 아델은 그 예쁜 모습에 상냥함까지 더해서 근위대들에게 말했다.
“출출할 것 같아서 간식을 좀 싸 왔어요. 넉넉하게 가져왔으니 다들 드세요.”
아델은 약혼자의 왕성한 혈기에 희생양이 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미움받을지도 몰랐으니까.
“와아!”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던 근위대원은 멈칫하며 크리스틴을 쳐다보았다. 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델은 염려 말라는 듯 그들을 향해 더 예쁘게 웃었다.
“사실은 대장님께서 부탁하신 거랍니다.”
“와아아!”
병사들은 이제 거침없이 아델과 바구니를 든 하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결국, 크리스틴은 아델을 팔을 사납게 낚아채 끌고 나왔다.
“좀 천천히 가, 크리스!”
크리스틴에게 끌려가며 아델이 소리쳤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 오고 나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아델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진짜…… 부러지는 줄 알았네.”
엄살이 아니었다. 희고 가는 손목에는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아아, 미안. 당신이 아무 데서나 그렇게 웃으니까 그만…….”
크리스틴은 당황했는지 아델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델은 손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웃어줘서 질투가 났다?”
“질투는 무슨!”
“화를 내는 게 더 수상한데. 정말 당신 수하들에게 질투한 거야?”
아델이 놀리듯 생글거리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뭐, 뭐 하는 거야!”
크리스틴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사실은 나도 그랬거든.”
“뭐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 몸을 보는 거 좀 싫더라.”
고개를 갸웃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이 지금 반신 탈의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한겨울이었지만 대련을 하느라 땀이 나서 웃옷을 벗어버린 것이다.
“하녀들이 얼마나 힐끔거리면서 봤는 줄 알아?”
크리스틴은 어이없어했다.
“당신도 같이 힐끔거린 건 아니고?”
“어머, 내가 왜? 난 당당히 봐도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그렇군. 자, 그럼 실컷 봐.”
크리스틴은 민망하지도 않은지 양팔을 벌린 채 당당하게 아델과 마주 섰다. 이 상황에 오히려 민망해진 건 아델이었다.
제복을 입었을 때의 그는 늘씬하고 호리호리했다. 그런데 이렇게 벗은 몸은 드넓은 어깨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미끈하고 날렵한 근육으로 가득했다.
사람의 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탄탄한 피부와 조각처럼 잘 짜여진 복근, 그리고 허리 아래 살며시 드러난 골반까지 완벽…….
“핫!”
아델은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등 뒤에서 크리스틴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면 바지도 벗어서 보여줄 수 있는데. 벗을까?”
“미쳤어! 얼른 옷 입어!”
아델이 질색하며 소리치자, 크리스틴은 아쉬운 얼굴로 손짓을 했다.
저만치에서 짐머가 옷을 들고 대기하다가 뛰어왔다.
“당신, 지금 따로 일정은 없지?”
아델이 돌아보자 그는 어느새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재킷을 걸쳐 입는 중이었다. 벗은 몸은 짐승이더니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나니 금방 곱상한 귀족 나리가 되었다.
“없어.”
“그럼 같이 외출하자.”
“어딜?”
“반지 찾으러 가게.”
급하게 커플링을 맞추다 보니 최대한 서둘러 제작해도 오늘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약혼식 날은 아쉽게도 커플링을 끼워주지 못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 오늘이었지?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아델이 화사하게 웃자 크리스틴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저 약혼식을 했을 뿐인데, 아델의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젠장, 빌어먹을 겨울!
***
“이건 정말이지 역대급 커플링입니다!”
커플링의 상자를 열며 보석상 주인은 흥분해서 외쳤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라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상자를 들고 빙그르르 돌았다. 상점 안에 있던 직원과 손님들이 전부 흥미진진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거리를 걷던 행인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게 안을 흘끔거렸다.
이곳은 번화한 그린힐에서도 가장 유명한 보석상이었다.
“정말 마음에 드네요.”
아델은 그의 과장된 행동이 당혹스러웠지만, 커플링만은 꽤 만족스러웠다.
“보십시오!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영롱한 푸른빛을! ‘눈의 여왕’이라는 이름답게 아주 오만하고 아름답죠?”
상자 안에는 푸른 다이아몬드가 박힌 두꺼운 반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눈의 여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다이아몬드는 크리스틴이 특별히 구해 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주이기도 했으니까.
하나처럼 보이던 반지는 사실 두 개가 합쳐진 것이었다.
아델의 것은 가느다란 로즈골드의 링 한가운데 눈의 여왕이 빛나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반지는 광택이 없는 두꺼운 링이었는데, 보석 대신 위쪽 모서리가 브이자 모양으로 잘려져 있었다. 두 개가 합쳐지면 ‘눈의 여왕’이 그의 반지에 잘린 곳을 채우는 디자인이었다.
불완전한 두 개가 합쳐져야 완벽한 하나가 되는 것.
아델은 커플링에 담긴 그 의미가 썩 마음에 들었다.
“손 내밀어봐, 아델.”
그녀가 수줍게 왼손을 내밀자, 크리스틴은 주저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 하는 거야, 크리스?”
아델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들이 많았다.
“원래 커플링은 이렇게 줘야 제맛이거든.”
그는 아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맹세할게 아델. 이 반지가 시들지 않는 한, 내 마음도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모여들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크리스틴은 마치 이야기 속 왕자님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아델은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그녀 역시 로맨틱한 여주인공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난처했지만 아델도 그 역할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의 저 그윽한 눈빛에 조종당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작게 숨을 고른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크리스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길고 두툼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맹세했다.
“나 역시 맹세할게. 이 반지가 깨지기 전까지 내겐 오직 당신뿐이야.”
로맨틱한 여주인공답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는 보너스였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소리쳤다.
***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들이 보석상을 나오자 상점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환호성을 보냈다. 아델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졌다. 조금 전엔 정말이지 뭐에 씌었나 보다.
“아까 왜 그랬어?”
이게 다 크리스틴의 완벽한 쇼맨십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있다 보니 저도 모르는 새에 동참하고 싶어져 버렸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우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고 행복한지.”
“그걸 보여줘서 뭐 하게?”
크리스틴은 바람에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 악의적인 루머를 퍼트리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일종의 선빵?”
그제야 아델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쇼맨십이 그의 계산이었다는 걸 알았다.
궁정 창가에서 그녀가 떨어뜨린 장미꽃에 보란 듯 입을 맞춘 것도, 세이라가 이끌고 온 무리 앞에서 거침없이 애정 표현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하긴, 칼라임의 영웅이 음침한 악녀와 맺어진 건 모두에게 불쾌한 스토리일 것이다.
영웅의 옆자리는 언제나 황녀나 성녀 같은 모두의 납득이 가능한 최고의 여인이어야 했으니까.
세이라처럼 드러내고 악의를 보이지는 않아도 다들 그의 옆에서 아델을 떼어내고 싶어 할 것이다. 둘 사이가 조금만 소원해 보여도 악의적인 소문이 퍼질 것은 당연했고.
그러니 일부러라도 둘 사이가 건재하고 행복하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러기 위해서 특별히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만.
“춥지 않아?”
그때 크리스틴이 물었다.
두 사람은 상점가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단둘만의 데이트를 위해 짐머와 마차는 모두 물린 후였다.
“별로…….”
“나는 추운데.”
그러면서 크리스틴은 팔짱을 끼라는 듯 한쪽 팔을 내밀었다.
“이것도 사람들을 향한 선빵인가요, 백작님?”
“아니, 기분 좋은 데이트를 위한 필수자세.”
크리스틴이 능청스럽게 눈을 찡긋하자 아델은 웃음이 나왔다.
“선빵보단 좋은데.”
그러고는 살갑게 그의 팔짱을 꼈다.
한겨울이라서 다행이었다. 춥다는 구실로 바싹 붙어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열이 날 지경이었다.
“어머, 저분이 바로 바이스 백작님이시죠?”
“역시 소문대로 훤칠하고 눈부시네요.”
지나면서 간간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델은 자신의 남자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다.
“당신, 생각보다 더 유명인이었나 봐. 일반 시민들도 다 알아보네.”
아델이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내가 칼라임 최고의 남편감이라는 기사를 못 봤군.”
“오오, 정말?”
하지만 문제는 크리스틴만 유명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백작님 옆에 저 여자가 바로 그 칼라임의 악녀?”
“의외네요. 좀 더 화려하고 야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그러니 백작님도 감쪽같이 속는 거겠죠.”
우뚝.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췄다. 굳어진 표정을 보면 당장이라도 사람들과 한판 벌일 기세였다.
아델은 눈앞이 아찔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트러블이라도 일으켰다간 무슨 소문이 퍼질지 눈에 훤했으니까.
‘악녀에게 조종당하는 영웅’
‘칼라임의 영웅, 악녀에게 물들다!’
……라는 식의 자극적인 소문이 돌 것이다.
“와, 예쁜 디저트 가게다! 우리 저기 들어가서 뭐 좀 먹을까?”
아델은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케이크가 잔뜩 진열된 가게를 가리켰다.
크리스틴도 그녀가 못 들었다면 굳이 나서서 일을 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잘됐군. 나도 출출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