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변태가 된 기분이야
(41/155)
41화. 변태가 된 기분이야
(41/155)
41화. 변태가 된 기분이야
2022.06.24.
딸랑~
가게 안으로 들어온 크리스틴은 움찔했다.
“여긴……?”
“응, 예쁜 디저트 가게지?”
그는 예쁘다는 말에 동감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림색 바탕의 내부는 온통 핑크색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게다가 가게 안에는 대부분 젊은 여자 손님들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크리스틴의 존재는 심하게 이질적이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외모였으니 다들 포크를 문 채 넋 놓고 쳐다보았다.
“여자들은 이런 걸 예쁘다고 하는군.”
“불편하면 나갈까?”
“전혀.”
그리고 그는 가게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때 정장을 입은 젊은 점원이 달려왔다.
“예약하셨습니까?”
아델은 점원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예약은 안 했는데, 제일 눈에 안 띄는 구석 자리가 있을까요?”
아무리 크리스틴이 불편하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는 건 피곤한 일일 것이다.
그러자 점원은 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마침 딱 좋은 자리가 있습니다.”
아델에게 속삭이…… 려다가 크리스틴에게 강제로 떨어뜨려 졌다.
“여기서도 충분히 들려.”
***
“마음에 안 들면 나갈까?”
아델은 다시 한번 난감해하며 크리스틴에게 물었다.
점원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가게에서 제일 구석진 룸이었다. 아담한 크기의 룸은 분위기가 그야말로 야릇했다.
창가에는 반짝거리는 비즈가 매달려 있었고, 핑크색 의자와 카펫이 깔린 바닥에 빨간 하트 쿠션들이 정신없이 놓여 있었다. 벽 선반에는 꽃무늬 찻잔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인형들이 진열된 곳이었다.
어린 소녀들의 파티 룸으로 사용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그곳에 크리스틴이 앉아 있으니 뭔가…….
“변태가 된 기분이군.”
건조한 그의 목소리에 아델은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런데 그가 긴 다리를 뻗기 위해 의자를 뒤로 빼는 순간, 선반에 진열된 인형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순식간에 레이스 인형들 속에 파묻힌 그를 보자 아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푸흡!”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침 주문한 케이크와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점원도 웃음을 참느라 벌게진 얼굴로 인형들을 정리하고 황급히 나가버렸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아델이 배를 잡고 웃는 동안 티포트에 담긴 차를 찻잔에 따르고, 그녀가 먹기 좋게 케이크 조각을 작은 접시에 담았다.
티스푼과 포크를 가지런히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창가에서 들이치는 햇살이 비즈에 부딪혀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는 오후.
향기로운 차향과 달큼한 케이크.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아델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나른하고 여유로운 기분이었다.
“정말 변태인 건지도…….”
이런 곳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이 크리스틴은 조금 어이없었다.
“염려 마. 그래도 난 여전히 당신을 좋아할 거니까.”
“고맙군.”
품위 있게 차를 홀짝이는 그의 잘생긴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델도 이제 웃음을 멈추고 케이크와 차를 마셨다. 그때마다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반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신의 것과 한 쌍인 또 다른 것이 크리스틴의 손가락에 있는 걸 보니 묘한 일체감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눈치 빠른 크리스틴도 그 마음을 알아차렸나 보다.
“응, 특히 이 다이아몬드 뭔가 참 오묘해.”
아델은 반지를 어루만지며 흡족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성 한 채를 줘도 구하기 힘든 거니까.”
아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비싼 거야? 난 그저 신비로운 푸른 빛이 왠지 당신 눈동자랑 비슷한 거 같아서…….”
“그러라고 어렵게 구한 거야. 그거 볼 때마다 날 떠올리라고.”
레드벨벳 케이크 한 조각을 입안에 넣으며 아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얘기 듣고 나니까 왠지 이 반지가 날 감시하는 기분이 드네? 나쁜 짓 할 땐 빼놔야겠어.”
“설마 나 몰래 바람 피울 예정인가?”
“허!”
아델이 황당하게 눈을 뜨자, 크리스틴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코코아 가루를 닦아주며 야릇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항상 끼고 있어. 그건 당신이 내 거라는 표식이니까.”
“……!”
순간, 아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표식이 있는 한 영원히 날 벗어나지 못해. 네 영혼까지 내 거라는 증거니까.”
표식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스톤의 그 잔인한 목소리가 겹쳐진 것이다.
이 행복한 순간에 그의 존재가 불쑥 끼어들었다는 것이 아델은 끔찍했다.
“……왜 그래?”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굳어졌는지 크리스틴마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미안. 갑자기 케이크가 목에 걸렸나 봐. 콜록!”
아델이 일부러 기침하자, 크리스틴은 얼른 찻잔을 입가에 대주었다.
“좀 마셔.”
아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이제 됐어.”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이제 스톤의 존재가 자리 잡은 채 떠나질 않았다.
외교관으로 떠나면서 그가 왜 그녀의 등에 자신의 표식을 새겨넣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아델에게 일종의 족쇄를 채운 것이다.
다른 어떤 남자도 만나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잊지 말라며.
진짜 적은 그녀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한 스톤일지도.
***
아델의 표정이 계속 좋지 않자, 크리스틴은 디저트 가게를 나왔다.
미리 연락을 받은 짐머가 어느새 가게 앞에 마차를 대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안. 첫 데이트를 망쳐버렸네.”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보다 몸이 덜 회복됐는데 내가 괜히 무리를 시켰나 보군.”
크리스틴은 아델을 에스코트해서 조심스럽게 마차에 태웠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등에 쿠션을 기대게 하고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덮어주었다.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녀가 잘못될까 봐 애지중지 다루면서도 그는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아델은 먹었던 케이크가 목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그와 커플링을 끼고, 그와 즐겁게 데이트를 하면서도 끔찍한 다른 남자를 계속 생각했으니까.
반지를 낀 크리스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델은 힘겹게 웃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반지도, 디저트도, 그리고 인형 속에 파묻혀 있던 당신의 모습은 특히…….”
“그건 잊도록 해.”
“의외로 잘 어울리던걸.”
“됐으니까 눈 감고 쉬어.”
그는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기대라는 듯 제 어깨를 두드렸다.
넓고 단단한 어깨를 보자 아델은 근위병들과 대련을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렇게 단정한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상의를 벗은 채 칼을 휘두르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꽉 짜여진 근육들이 불끈거리며 힘줄이 불거졌고, 탄력 있고 미끈한 피부는 칼날마저 튕겨낼 것만 같았다. 그 날렵하고 역동적인 모습은 사냥하는 야수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렇게 혈기가 왕성할 수밖에.
단둘이 있는 마차에 붙어 앉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델은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설마 병사들을 다루듯 침대 위에서도 그렇게 험악한 건…….
“내가 해주길 바라는 건가?”
“어?”
화들짝 놀라 바라보자, 크리스틴은 그녀의 뺨을 상냥하게 감싸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제 도착할 때까지 자면 돼.”
그의 손에서는 기분 좋고도 익숙한 향이 났다. 그와 춤을 춘 후 그녀의 몸을 베서 밤새도록 잠을 설치게 만들던, 종종 가까이 다가올 때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데 일조하던 그 향기.
숲을 닮은…….
“열이 좀 있는 거 같네.”
아델의 뺨을 만지던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크고 따뜻한 그의 손이 얼굴을 감쌀 때마다 아델은 자꾸만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그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좀 더 오랫동안, 좀 더 다정하고 은밀하게…….
“보름만 기다려줘, 크리스.”
크리스틴이 얼른 손을 떼며 ‘크 흠’ 헛기침을 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려다가 들킨 사람처럼.
“물론이야, 아델. 의사 선생이 네가 완전히 몸을 회복하려면 보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까진 기다려 줄 거야. 물론 그 이상은 하루도 힘들겠지만.”
“그래, 그거면 돼.”
아델은 몸에 힘을 풀고 크리스틴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보름.
‘그 안에 스톤의 표식을 없애는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
“아델을 부탁한다, 타냐.”
“예, 염려 마세요.”
마블 궁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아델의 침실 앞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아직 초저녁이라 아델은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의 혈기를 책임질 수 없었으니 곱게 보내주기로 했다.
“당신도 얼른 들어가서 쉬어, 크리스.”
“그러게. 나도 좀 피곤하군.”
“그럼, 내일 봐.”
아델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크리스틴이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조금은 떼를 쓰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굿나잇 키스는?”
심통 난 것처럼 쀼루퉁한 표정에 아델은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는 광산 마을의 소년 크리스로 돌아간 것 같았다.
“괜히 키스했다가, 또 근위대원들을 못살게 굴까 봐 걱정돼서.”
“이 정도 갖고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
아델은 크리스틴의 목을 끌어안고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초옥, 살며시 입술을 붙였다가 떼며 그의 청회색 눈동자를 깊이 응시했다.
“꿈속에서 만나, 크리스.”
“꿈속에서는 변태가 될지도 몰라.”
놀란 그녀를 보며 그가 씩 웃었다.
“변태라도 여전히 좋아할 거라던 말 잊지 마.”
아델은 난처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는 타냐와 짐머 그리고 핸리도 함께 있었다. 물론 다들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고 있었지만.
“크리스, 그런 얘긴 둘만 있을 때 하라니까.”
아델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곱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그에겐 야릇해 보이니…….
“그럼.”
그는 아델이 침실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지 못하고 몸을 홱 돌려버렸다.
쾅!
침실에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야 끄응, 앓는 신음을 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점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어.”
온몸의 세포들이 아델과의 합방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예전보다 더 쉽게 흥분하고 몸이 달아올랐으니.
뒤따라 들어오던 짐머가 보다 못해 쯧쯧 혀를 찼다.
“보름 동안은 그냥 근위대 숙소에서 지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크리스틴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놈은 달콤한 고통이란 걸 몰라.”
“달콤한 고통이라니…… 정말 변태같이 들립니다.”
그의 농담에도 크리스틴은 화를 내지 않고 진지했다.
“보름이 지나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짐머는 오싹해졌다. 아델을 위해서라도 빨리 그녀의 몸이 회복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의 상태가 점점 더 이상해져서 손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러다 짐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그리고 찾았답니다. 오스월드 전대 후작이 죽던 날 스톤과 말싸움하는 걸 봤다던 하녀 말입니다.”
“그래? 지금 어디 있지?”
조금전까지 욕망으로 몸부림치던 한 마리의 늑대는 다시 날카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짐머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만나시려고요?”
“그래 당장. 안내해.”
크리스틴은 오스월드 후작의 죽음에 대해 재조사하는 중이었다. 특히 스톤에 대해서는 의아한 점이 많았다.
“그녀가 제 오라버니 스톤 오스월드와 특별한 사이였다는 건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세이라의 얘기를 믿지는 않았지만, 아델과 놈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아델이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도 반박하지 않았으리라.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아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