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너를 점점 더 모르겠어 (42/155)


42화. 너를 점점 더 모르겠어
2022.06.27.



 


“수고 많으세요, 급하게 아델 아가씨 심부름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타냐는 마블 궁을 지키는 근위대들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 시간에 어딜?”

밤이 꽤 깊은 시간이었다.


“아가씨께서 살던 저택에 두고 온 물건이 있는데 꼭 필요하다고 해서요. 여성들 용품이라 더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가 곤란한데.”

타냐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자 근위대들도 더는 깊이 묻지 않았다.

아델이 아끼는 하녀였으니 나름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대신 타냐의 뒤에 있는 여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여자는 케이프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같이 나가나?”

“예, 밤길이 위험하니 아가씨께서 같이 다녀오라고 하셔서요.”

아델의 지시라고 하니 다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예, 감사합니다.”

타냐는 그들에게 인사하고 후드를 쓴 여자와 함께 마블 궁을 나왔다.

마블 궁 앞에는 미리 불러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무사히 빠져나왔네요.”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타냐는 안심하며 웃었다.


“그래. 네가 고생했다, 타냐.”

후드를 벗은 여자는 아델이었다.

크리스틴이 짐머와 함께 나가는 걸 확인한 그녀도 몰래 마블 궁을 빠져나온 것이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그린힐의 시내로 들어갔다.

낮에는 번화한 상점과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곳은, 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등불을 밝힌 주점과 흥겨워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마차는 그곳을 가로질러 좀 더 좁고 소란스러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구토를 하는 취객들과 짙은 화장을 하고 호객을 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이곳은 헬밸리의 뒷골목.

그린힐에서 가장 은밀하고 불법적인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타냐는 안절부절못하고 울상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냥 백작님께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아니면 캐슬러 남작님께 부탁을 해보시던지. 이런 데서 일하는 의사를 어떻게 믿고…….”

아델은 타냐에게 헬밸리의 의사를 알아봐 달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스톤이 남긴 표식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말까지는 안 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타냐. 그냥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아델은 타냐를 안심시키며 웃었다.

칼라임에서 몸에 문신이 있는 여자들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주인이 있는 노예이거나, 몸을 파는 매춘부이거나.

그러니 헬밸리에서 매춘부들을 상대하는 의사라면 아델의 등에 있는 표식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다.

마차는 왁자한 주점 옆에 딸린 잡화점 앞에서 멈췄다.

타냐에게는 마차 안에 남으라고 한 후 아델은 혼자서 내렸다. 그리고 제일 먼저 손가락에 낀 약혼반지부터 뺐다. 이런 곳에서 눈에 띄는 반지를 끼고 있다간 위험해질지 몰랐으니까.

잡화점 안은 어두침침한 등불에 간신히 발밑만 보였다. 덕분에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지만 다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아델처럼 은밀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왔수?”

잡화점의 카운터로 가자 골동품 도자기를 닦던 주인 남자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여기에 의사가 있다고 해서 왔어요.”

아델은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들린 걸까?

흘러내릴 것 같은 안경을 고쳐 쓰며 주인 남자가 아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불빛에 아델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많은 것을 파악한 것 같았다.


“말투를 들으니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이런 곳에서 의사를 왜 찾는 거요?”

“이유를 말할 수 없으니 이런 곳에 온 거죠.”

그리고 아델은 카운터 위에 금화를 내놓았다.

잡화점 주인은 만족스러운 듯 클클클, 웃었다.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슈.”

그가 있는 카운터 뒤로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오른쪽 문을 열자,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더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흐릿하게 들리는 신음 소리였다. 아델은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괜히 온 걸까?

타냐에게는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크리스틴에게 알리라고 해두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2층으로 올라오자 제일 첫 번째 방문에 진료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삐걱.

낡은 문을 열자 안쪽에 푸른색 커튼이 쳐져 있었고, 커튼 뒤로 후덕한 덩치의 남자가 얼핏 보였다. 그가 낀 장갑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수술 중인 것 같았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피투성이 앞치마를 두른 간호사가 아델을 보고 소리쳤다.


“죄송해요. 수술 중인 줄 모르고.”

놀란 아델이 얼른 나가려고 하는데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났으니 거기 대충 앉아요. 나머진 자네가 정리하고.”

“예, 선생님.”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

의사는 피투성이 장갑을 쓰레기통에 벗어 던지며 커튼 뒤에서 나왔다.

그러다 아델을 보더니 ‘어!’ 하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아델 역시 너무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그는 의사 마빈이었다!

***

크리스틴은 곰팡내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짙은 화장을 한 30대 중반의 여자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자는 크리스틴을 보자 활짝 웃었다.


“어머, 인형처럼 아름다운 귀족 나리시네.”

이미 취했는지 여자의 혀가 반쯤 꼬여 있었다. 그녀는 크리스틴이 마음에 드는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왔다.


“흐응, 이렇게 순진한 얼굴로 이런 곳엘 오다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척!

하지만 여자는 짐머의 검에 막혀 더는 다가올 수가 없었다.


“꺅! 뭐, 뭐예요! 놀랐잖아!”

크리스틴은 탁자 옆에 있는 의자를 드르륵, 끌어다 앉았다.


“내가 좀 급하긴 해. 그러니 날 만족시키면 이곳에서 빼내 주지.”

그의 제안에 여자는 살짝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특, 특별히 원하는 거라도……?”

그는 여자에게 가까이 몸을 숙이며 물었다.


“네 얘기를 듣고 싶군.”

“내 얘기라니요?”

“오스월드 후작이 죽던 날 밤, 네가 뭘 봤는지.”

“……!”

여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다, 당신들 누구예요?”

대답 대신 크리스틴은 탁자 위에 짤그랑 소리가 나는 묵직한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네겐 두 가지 선택뿐이다. 그날 밤 일을 다 얘기하고 이걸 갖던지. 아니면 죽음으로 영원히 침묵하던지.”

그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듯 짐머가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곱상하던 얼굴에선 순식간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털썩!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곳은 그녀가 손님을 받는 방으로 허름한 침대와 낡은 탁자, 두 개의 의자가 가구 전부였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점점 쌓이는 빚에 허덕이며 이곳까지 흘러온 것이다.

오스월드 후작가의 하녀가 매춘부로 전락하게 된 것은 모두 스톤 때문이었다.

아니, 그날 그 일을 보지 않았더라면.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았더라면…….

여자는 체념한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묵직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러다 주머니 안을 가득 채운 번쩍이는 금화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이걸 다 주시는 거예요?”

“약속하지.”

 

***



“그 무렵 후작님께선 병세가 좋아지고 계셨어요. 어눌하지만 말도 했고, 조금은 움직이기도 하셨죠.”

여자의 이름은 바네사. 오스월드 가에서 5년 가까이 하녀로 있었다고 한다.


“그날은 아마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을 거예요. 후작님 침실의 종이 계속 울리길래 가봤어요. 낮엔 후작 부인이 수발을 들지만, 밤에 후작님을 돌보는 건 제 담당이었거든요. 후작님께서는 스톤 그 작자의 방에 가자고 하셨어요. 이상했죠.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아들의 방에 가자고 하시니까. 하지만 괜히 스톤의 잠을 깨웠다간 제가 매를 맞을 게 뻔했죠.”

“매를 맞는다고?”

바네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고용인들에게 툭하면 매질했죠. 그래서 저는 스톤의 방문을 두드리는 척하고 자고 있다며 거짓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후작님은 부인의 방에 가보라고 하시더군요. 후작 부인의 방은 후작님의 침실과 좀 멀리…….”

“멀리 떨어진 지하실에 있었겠지.”

“그걸 어떻게?”

바네사가 놀라서 쳐다보자, 크리스틴은 인상을 썼다.


“계속해.”

“그래서 지하실로 가봤어요. 하지만 비어 있었죠. 그제야 후작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것 같더군요.”

“스톤과 후작 부인이 그 시간에 함께 있었다는 건가?”

“스톤은 원래 자신의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요. 청소나 빨래는 다 새어머니인 후작 부인에게 시켰고요. 말이 후작 부인이었지, 사실 그 여자는 스톤의 전속 하녀나 다름없었죠. 하녀들 사이에선 은근히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어요. 그래도 그렇게 늦은 시간에 부른 적은 없었는데…….”

짐머는 숨을 고르며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그가 계속 듣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아델이 만일 스톤과 부정한 관계였다면 그가 미치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만일 스톤에게 나쁜 일을 당한 거라면 두 배로 미친놈이 될 것이고.

짐머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바네사는 계속 얘기를 했다.


“그때 스톤의 침실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순간 후작님께서 그대로 휠체어를 굴려 스톤의 침실 문을 들이받으셨어요. 그리고 문이 열렸죠. 정말로 후작 부인과 함께 있더군요.”

크리스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아났다. 덩달아 짐머도 긴장했다.


“그런데 좀 기묘한 분위기였어요. 침실이 멀쩡했죠. 술 냄새 같은 게 조금 났지만, 그 여자는…… 겁탈을 당했다기엔 너무 침착했고, 밀애를 즐겼다기엔 안색이 너무 파리했죠.”

바네사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피?”

“예, 깨진 와인잔을 치우다가 손을 베어서 그랬다더군요. 그런데 후작님께선 몹시 화를 내며 갑자기 스톤의 뺨을 때리셨죠. 그리고 어눌한 발음으로 유산과 작위를 한 푼도 못 준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화를 내신 건 처음 봤어요. 하지만 후작 부인은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고도 그냥 가버리더군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제야 사람들이 깨어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지켜본 사람은 오직 저뿐이었어요.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바네사는 그날 일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그리고 다음 날 후작님은 부인이 주는 차를 마시고 돌아가셨어요. 스톤과 세이라는 그 여자가 아버지를 독살한 거라고 소리쳤죠. 하지만 저는 스톤의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상속받지 못할까 봐 죽인 거겠죠.”

“그래서 이 얘길 누구에게 했지?”

“스톤의 눈치를 보다가 조사를 나온 경감에게 몰래 말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스톤과 한패였어요. 증언이 전해지기는커녕 장을 보러 가는 절 누군가 습격했고, 정신을 차리니…… 매음굴에 팔려와 있었죠.”

바네사는 울음을 참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붉어진 눈시울로 크리스틴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까지 제 얘기가…… 만족스러우셨나요?”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대로 그 돈을 주지.”

그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바네사의 방을 나오며 짐머가 물었다.


“점점 더 모르겠군.”

“무엇이 말입니까?”

하지만 크리스틴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러다 갑자기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막 잡화점을 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얼른 쫓아가자 여자는 밖에 세워진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눈이 밝은 크리스틴은 똑똑히 보았다. 후드에 반쯤 가려진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차가 떠난 후에도 그곳에는 익숙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