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짐승도 함부로 목덜미를 물어뜯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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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짐승도 함부로 목덜미를 물어뜯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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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짐승도 함부로 목덜미를 물어뜯진 않는다
2022.07.04.
아델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오자 크리스틴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식사 후에 출근할 예정이라 근위대 정복 차림이었다.
“좋은 아침, 크리스.”
그에게 다가간 아델은 부드럽게 뺨에 입을 맞췄다.
“좋은 아침, 아델.”
크리스틴도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춰 화답했다.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핸리가 하인들에게 아침 식사를 나르라고 지시했다.
마블 궁에서의 아침은 언제나처럼 평온했고, 한겨울이었지만 볕이 잘 드는 곳이라 벽난로의 온기만으로도 훈훈했다.
하지만 아델은 크리스틴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여, 크리스.”
“나보단 당신이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어느새 사람의 속을 꿰뚫을 것 같은 눈빛으로 아델을 응시했다.
아델은 뜨끔했다. 설마 어젯밤 밖에 나갔다 온 걸 눈치챈 건가?
하지만 그가 캐묻기 전까지 숨기고 싶었다. 아니, 숨겨야 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어젯밤 당신이 내 꿈속에 나타나서 아주 음흉한 짓을 하려고 했다는 거?”
“하, 당신 꿈이니 당신이 원한 거겠지. 음흉한, 아델 양.”
“어머, 날 볼 때마다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게 누구시더라. 네 강력한 의지가 내게 그런 꿈을 꾼 게 만든 거라고.”
“빌어먹을 우기기 대장!”
그가 버럭 화를 내자 아델은 까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을 그치고 얼른 말했다.
“진짜 행복하다, 크리스.”
“뭐?”
“못 들었으면 됐고. 얼른 먹자. 배고프네.”
아델은 포크와 나이프를 바쁘게 움직이며 쾌활하게 식사를 했다.
크리스틴은 그런 아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는 계속 즐거워 보였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 애처로워 보였다. 마치 행복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그 여자는…… 겁탈을 당했다기엔 너무 침착했고, 밀애를 즐겼다기엔 안색이 너무 파리했죠.
그가 모르는 곳에서의 아델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게 여전히 숨기는 게 많았다.
점점 더 모르겠다, 너를.
“아델…….”
나직한 목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응?”
‘당분간 근위대 숙소에서 지낼 생각이야.’
크리스틴은 사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기다리며 웃는 아델을 보고 있으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행복하다, 크리스.”
어떤 게 진짜 그녀의 얼굴인지, 뭘 숨기는지는 몰랐지만, 그 말을 할 때만큼은 진심으로 보였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아델, 그거 알지?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내게는 제일 소중하다는 거.”
“……!”
아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크리스틴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심장함을 알아챈 것처럼.
“얼른 먹자. 식겠어.”
그는 아델의 불안해진 눈빛을 피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
식사를 마친 크리스틴이 마블 궁 나오는데 짐머가 다가와 속삭였다.
“스톤 오스월드의 소식입니다.”
스톤의 이름이 언급되자 크리스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놈에 대한 건 주머니 속 먼지까지 모두 털라고 시켰던 것이다. 만일 놈이 아델에게 참담한 짓이라도 했다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럴 리 없지.’
떠오르는 의혹을 털어내며 그가 말했다.
“말해.”
“조금 전 오르비스 왕국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스톤은 이미 한 달 전 왕국을 떠났답니다.”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칫했다.
오르비스 왕국은 스톤이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나라였다.
“임기가 이번 달까지로 알고 있는데?”
“그게 스톤이 뭔가 불미스러운 문제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양국의 외교 문제로 번질까 봐 추방하는 조건으로 조용히 무마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톤은 이미 칼라임에 들어와 있다는 건가?”
“한 달 전 국경에서 봤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크리스틴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접혔다.
한 달 전에 국경을 넘은 그가 아직까지 오스월드 가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걸까? 황제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 사이 아델과 스톤이 만난 건…….
빌어먹을!
크리스틴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아델을 믿는다고 다짐해놓고 수시로 스톤과 그녀의 관계를 의심하는 꼴이라니.
***
“아델, 그거 알지?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내게는 제일 소중하다는 거.”
아델은 내내 크리스틴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너무 깊었다. 마치 그녀가 감추려는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설마 어젯밤 몰래 헬밸리에 다녀온 걸 눈치챈 걸까?
하기야 그는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칼라임 최고의 실세였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힘과 조직을 갖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일 그 일로 자신을 의심이라도 한다면…….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타냐가 들어왔다.
“아가씨, 마빈 경께서 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듣자 아델은 어젯밤의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겨우 마음먹고 찾아간 헬밸리의 의사가 하필 그였다니.
하지만 오히려 더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델 양.”
그사이 진료 가방을 옆구리에 낀 마빈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옷차림으로 후덕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자한 황궁의 어의로만 보였다.
아델은 마빈과 같이 들어 온 핸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단둘이 해야 할 얘기가 있어요.”
“알겠습니다. 아델 양.”
핸리는 타냐와 응접실에서 차를 따르는 하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일단 앉으세요.”
침착하자, 아델. 침착하는 거야.
아델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침착하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우아한 귀부인처럼.
침착해, 아델.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다행히 마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잊어주십시오. 친구가 갑자기 진료소를 비우며 부탁하는 바람에 아주 잠시 환자들을 돌봤던 것뿐입니다. 깨끗이 잊어주신다면 저도…….”
“그곳에서 나를 만난 일도 잊겠다고요?”
“물론입니다.”
“내가 그곳에 다녀간 건 불법도 아니고, 처벌받을 일도 아닌걸요.”
“예?”
아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궁의 어의가 헬밸리의 주점에서 불법 수술을 한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더구나 폐하께서 아시면…….”
마빈은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델 양 그건!”
협상에선 흥분하거나 조급해하는 쪽이 진다. 늘 크리스틴과의 협상에서 지면서 아델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잊지 말아요. 당신이 내게 약점을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마빈은 아델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래서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잠시 망설이던 아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문신을 지울 수 있나요?”
뜻밖의 단어에 마빈은 귀를 의심했다.
귀부인들이 헬밸리의 진료실을 찾는 이유야 대개 뻔했으니까. 그래서 아델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신…… 이라고요?”
“그래요. 흔적도 없이 깨끗이 지울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피부를 벗겨 낸다면 또 모를까.”
“피부를?”
“부위가 넓다면 다른 피부 조직을 이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흉터가 남을 거고요. 문신이라는 게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으니까요.”
“불로 지지는 건요.”
그는 귀를 의심했다.
“문신을 없애려고 생살을 불로 지진다고요?”
아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목까지 채워진 드레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델 양, 이 무슨!”
깜짝 놀란 마빈은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바이스 백작의 약혼녀. 갑자기 누가 들어와서 오해라도 한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그 사이 아델은 돌아선 채 드레스의 상의를 내리고, 슈미즈도 어깨에서 끌어 내렸다.
이내 마빈의 앞에 그녀의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의 피부는 눈으로 보기에도 유난히 탄력 있고 매끄러웠다. 눈처럼 새하얀 살결은 창가에서 들이치는 빛을 받아 눈이 부셨다.
그로 인해 고운 피부에 낙인처럼 새겨진 두 개의 철자가 기괴하리만큼 도드라졌다.
“누가 이런……!”
마빈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완벽한 작품에 생긴 흠집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도 갔다. 너무나 완벽한 것을 보면 흠집을 내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으니까.
“의사로서 소견을 말해 보세요. 피부를 벗겨 내는 게 좋을지, 불로 지지는 게 좋을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놓고도 아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아까부터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 안쪽을 짓씹고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마빈은 등에 새겨진 문신을 유심히 살피며 의사로서 소견을 말했다.
“일단 피부를 최대한 얇게 벗겨 내 보도록 하죠. 하지만 아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열흘 넘게 시간이 있으니까.”
“열흘이면 완전히 낫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델은 다시 단정하게 옷을 추스른 후 조용히 말했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문신에 대해선 오직 우리 둘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했던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경의 비밀도 지켜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의 엄포에 마빈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염려 마십시오! 제 입은 아주 무겁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럼 수술은 언제가 좋을지…….”
“가능하면 빨리요.”
“알겠습니다. 내일 필요한 도구들을 챙겨오도록 하지요.”
그리고 마빈은 간단히 진료를 마치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아델은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모두 잘 해결될 거야. 그래야만 해.
***
얀은 여러 귀족을 거느리고 승마장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며칠 후에 있을 승마대회를 앞두고 일꾼들은 막바지 점검으로 정신이 없었다.
“올해 열리는 모든 대회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이네. 전쟁도 끝났으니 다들 신나게 놀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대외적으로 칼라임의 건재함을 알리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럼요. 그깟 전쟁으로 칼라임 제국이 눈곱만큼이라도 타격을 입었겠습니까?”
얀의 주위에서 아첨하는 귀족들을 보며 크리스틴은 코웃음을 쳤다.
만일 전쟁이 1년만 더 길어졌다면 칼라임은 파산했을 것이다. 다들 그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
“이번 승마대회에 출전을 하나, 바이스 백작?”
불현듯 던져진 얀의 질문에 크리스틴은 절도 있게 대답했다.
“제 임무는 폐하를 호위하는 것입니다. 대회는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아쉽군. 자네가 출전한다면 우승은 따 놓은 것인데.”
크리스틴도 그 부분에 대해선 동의했다. 그래서 굳이 겸양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 양보해야지요.”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에 다들 왁자하게 웃었다. 마음속으로는 시기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을 사냥대회에는 꼭 출전하게, 백작.”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얀의 목소리. 크리스틴이 서늘하게 바라보자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작은 승마보단 사냥 실력이 더 뛰어나거든.”
“오오, 그렇습니까?”
“백작은 도대체 못 하는 게 뭡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들은 황제와 크리스틴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얀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있으면 마치 짐승 같지. 달려들어 목덜미라도 물어뜯을 것 같거든.”
크리스틴도 가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짐승도 함부로 목덜미를 물어뜯지는 않는답니다. 생존을 위협받을 때는 또 모르지만.”
둘의 기묘한 분위기에 귀족들은 조금 당황했다. 그들은 서로만 알 수 있는 의미심장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분명했다.
“아바마마!”
그때 저만치에서 에이프릴이 황제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