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가 남긴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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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그가 남긴 표식
2022.07.08.
“아바마마!”
그때 저만치에서 에이프릴이 얀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에이프릴을 따라온 시녀들은 황제를 보자 황급하게 치맛자락을 들고 머리를 조아렸다.
“오, 에이프릴. 여긴 어쩐 일이냐?”
“창문을 열어놨더니 까미가 도망가서 찾으러 나왔어요.”
그녀는 품에 안고 있는 까만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크리스틴의 일로 한동안 우울해하던 에이프릴의 표정이 밝았다. 모두 이 검은 고양이 덕분이었다. 시녀들의 말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얀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딸이 마음잡을 동안만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런데 녀석이 다리를 다친 거냐?”
새끼 고양이의 다리에는 하얀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쳐서 못 내려오는 걸 어떤 분이 내려주었어요. 손수건도 직접 묶어주었고요.”
“어떤 분?”
“젊은 남자분이었는데 저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아바마마를 알현하러 왔다고 했는데…….”
얀은 뒤에 있던 크리스틴에게 물었다.
“오늘 특별히 알현하기로 한 자가 있던가?”
“없습니다, 폐하.”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에이프릴이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호오, 꽤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그토록 아쉬운 얼굴이라니.”
저도 모르게 크리스틴을 흘끗 쳐다본 에이프릴은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도움을 받고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죠.”
하지만 얀은 더 짓궂게 웃으며 에이프릴의 시녀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보기에는 어떻던가? 괜찮은 사내 같던가?”
시녀들은 서로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황제는 크리스틴 앞에서 에이프릴의 기를 세워주고 싶은 것이리라.
“보기 드물게 훤칠한 미남자였습니다.”
“행동과 말투에 기품이 배어있었습니다. 귀족가의 자제가 분명합니다.”
“그래? 누군지 정말 궁금하군.”
그러자 얀의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끼어들었다.
“고양이의 다리에 묶인 손수건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예,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 살펴보아라.”
시녀들은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다리에서 손수건을 풀어 살펴보았다.
“있습니다!”
보물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시녀 한 명이 얼른 얀에게 손수건을 내보였다.
그러나 손수건에 있는 문양을 본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가문의 문장이 아니었다.
“가문의 머리글자인가 보군.”
얀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그런가 봅니다. 머리글자만 가지고는 당장 떠오르는 가문이 없네요.”
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뭐, 짐을 알현하러 왔다니 조만간 나타나겠지. 누군지 알면 얘기해주마, 에이프릴.”
“헛, 아니에요. 아바마마! 그럼 저는 이만.”
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에이프릴은 크리스틴에게도 재빨리 눈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런 황녀의 뒷모습에서 크리스틴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몇 걸음 앞서가던 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 아이에게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황녀님이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얼른 얀의 뒤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느꼈다. 고양이의 다리에 묶여 있던 손수건에 짙게 배어 있던 기분 나쁜 냄새를.
고양이의 상처에서 묻었을 피 냄새와 뒤섞여서 나던 그것은 분명…… 사람의 피 냄새.
***
퇴근 후 마블 궁으로 귀가하던 크리스틴은 멈칫했다.
달큼한 애플파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애플파이군.”
“그런가요? 전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역시 개코이십…….”
무심코 대답하던 짐머는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치자 능청스럽게 웃었다.
“늑대의 코라고 하는 건 어감상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개코같은 소리 그만하고 따라와라.”
크리스틴은 그대로 홀을 가로지르고 복도를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 따윈 없었지만, 이 달큼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곳을 따라가면 틀림없을 것이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그를 본 하인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벽에 붙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10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아델의 어머니가 하던 빵 가게로 가고 있었으니까.
광산에서 일을 마치고 주린 배를 안고 돌아오면 골목길을 가득 채우던 그 달콤하던 냄새.
그 냄새가 마치 지친 그를 마중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는 사실만으로도 포만감에 웃음이 나오곤 했었다.
그리고 기대에 차서 문을 열면,
“다녀왔어, 크리스? 얼른 저녁 먹자.”
그래, 그때에도 너는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었지.
새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이렇게도 눈부시게 예쁜 얼굴로.
그런 일들이 특별할 것 없던 일상.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믿었었지.
하지만 다시 돌아오기까지 십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간 크리스틴은 아델을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크리스?”
그는 고소한 버터와 달큼한 사과 향이 가득 밴 아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잠깐, 잠깐만 이대로.”
그래, 이건 환영이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현실. 그때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향기를 흘리며 그녀는 분명히 여기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품 안에.
“진짜 행복하다, 아델.”
사실은 하루종일 마음에 걸렸었다.
아침 식탁에서 행복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아델에게 똑같이 대답해 주지 못한 것이.
그때 그녀의 마음이 지금의 자신과 같았을까?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서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다행이다. 아침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는데.”
“내가 원래 아침엔 기분이 좀 가라앉을 때가 많아.”
“그렇구나. 참고해야겠네.”
그러면서 아델은 크리스틴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나도 정말 행복하다, 크리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부둥켜안고 놓을 줄을 몰랐다.
그동안 부엌 한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계속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파이를 꺼내지 않으면 숯덩이가 될 거예요.”
요리사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타냐가 속삭였다.
“두 분은 숯덩이가 된 파이를 드셔도 행복하실걸요.”
“하긴 그러네요.”
크리스틴과 아델이 부둥켜안고 있는 곳은 애플파이가 한창 구워지고 있는 오븐 앞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파이를 꺼내야 하니 비켜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달큼하던 파이의 냄새가 매캐하게 탄 냄새로 변하고 있었지만, 하인들은 살금살금 부엌을 나갔다.
둘의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그들도 곧 오븐 속의 파이가 될 것만 같았으니까.
***
“미안. 다음엔 정말 맛있는 파이를 구워줄게.”
“아니야. 맛있어.”
다행히 아델은 파이가 반 정도 탔을 때 정신을 차렸다. 덕분에 반은 멀쩡하게 건질 수 있었다. 물론 탄 냄새가 짙게 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하지만 개 코보다 더 예민한 늑대의 코를 가진 크리스틴에겐 탄 냄새 따윈 맡아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파이를 먹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는 탄 부분을 긁어내서 너덜너덜해진 파이 조각을 참 맛있게도 먹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힘이 아닐 수 없었다.
“풉!”
맞은편 식탁에 앉아 있던 아델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왜?”
“입술. 검댕이 잔뜩 묻었어.”
“와서 닦아줘.”
크리스틴은 턱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뭐야, 어린 애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아델은 냅킨 천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순간 크리스틴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러려고 날 오라고 했지?”
“아닌데. 이 자세가 편할 거 같아서.”
“하나도 안 편한데.”
“긴장돼서 그런가?”
아델은 뜨끔했지만,
“긴장은 그쪽이 하는 것 같은데요, 백작님?”
장난스럽게 눈웃음치며 냅킨 천으로 크리스틴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서로 몸을 붙인 채 가까이 있으려니 심장의 울림이 느껴졌다. 자신의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 모를…….
하지만 아델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입술을 닦는 데만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더니 손가락 위에 입을 맞췄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아델의 표정을 살피며 그 손가락을 살며시 두 입술로 머금었다.
뜨겁고 야릇한 촉감.
“핫! 뭐, 뭐야!”
아델은 화들짝 정신이 들어서 그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당신 손가락이 무척 달아 보여서 그만.”
입맛을 다시며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내 손가락이 무슨 막대 사탕이야?”
“제대로 먹어보지 않았으니 모르지. 어쩌면 더 달지도?”
그의 야릇한 눈빛과 말투에 아델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진짜 이러다간 그녀 역시 욕구불만으로 밤새 잠 못 이루게 될지도 몰랐다.
“참, 타냐에게 할 얘기가 있는 걸 깜박…….”
야릇해진 분위기에서 도망치려고 아델이 몸을 돌릴 때였다.
“잠시만!”
크리스틴은 아델을 확 당겨 안더니 창가를 등지고 섰다.
“왜?”
그는 대답 없이 창가로 걸어갔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야릇하고 뜨겁던 눈이 맹수처럼 날카롭고 서늘해졌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자,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와 살풍경한 바람 소리뿐 아무것도 없었다.
“왜, 뭐가 있어?”
아델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오자 고개를 저으며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아니, 그냥 야생 짐승이 지나갔나 봐.”
“여기에서 그걸 느꼈어?”
“전쟁터에서 살다 보니 감각이 좀 예민하거든.”
아델은 크리스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버텨온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터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두렵고 끔찍했을까?
“안심해. 여긴 전쟁터도 아니고, 감히 바이스 백작님을 해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응.”
“그리고 헤치려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지켜 줄게.”
“아델, 당신이?”
크리스틴은 코웃음 치며 눈썹을 살며시 올렸다.
아델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내가 또 칼라임의 악녀잖아. 내 약혼자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악녀가 될 수 있지.”
황당하게 보던 크리스틴은 곧 귀엽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든든하군.”
“어머, 빈말 아니야!”
“네네, 악녀님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크리스!”
***
차를 마신 후 크리스틴은 아델을 침실로 들여보냈다.
가벼운 굿나잇 키스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 짓도 며칠하고 나니 나름 견딜 만했다. 이러다간 평생 수절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블 궁의 정원으로 나가는 그는 아델과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침입자라도 있었습니까?”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그에게 짐머가 다가왔다.
“그런 것 같군.”
크리스틴은 식당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 분명히 느꼈다. 그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던 시선을.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니.
식당 창가 앞으로 가자 마른 나뭇가지가 꺾여있고, 풀들이 눌려 있었다.
“평범한 성인 남자의 몸무게와 체격을 가진 자다.”
“근위대가 순찰하던 게 아니었을까요?”
크리스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위대들이 아니다.”
엷게 맡아지는 기분 나쁜 피 냄새.
낮에 그 손수건에서 풍기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당분간 경계를 강화하라. 그리고 아델의 주변도.”
“예,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