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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모두가 한통속이다 (46/155)


46화. 모두가 한통속이다
2022.07.11.



 
다음 날.

마빈은 평소보다 뚱뚱한 진료 가방을 들고 방문했다.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요.”

“예, 아델 양.”

“얘기가 길어질지 모르니 부르기 전엔 아무도 들어오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핸리는 어제처럼 사람들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마빈은 얼른 문을 잠그고 돌아섰다.

철컥!

긴장한 얼굴로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수술은 대략 1시간 정도면 끝날 겁니다.”

“그렇군요.”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후에는 상태를 봐서 한 번 더 하게 될 겁니다.”

“한 번 더 한다고요?”

“그게 안전하고 예후도 좋으니까요.”

그는 진료 가방에서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수술 도구들을 꺼냈다. 잘 소독된 기구들은 한낮에 들이치는 햇살을 받아 섬뜩하고 살벌하게 번쩍였다.


“많이…… 아플까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저 살벌한 도구들을 보니 아델은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자 마빈은 붉은색 물약을 건넸다.


“마시세요. 신경이 무뎌져서 고통을 덜 느낄 겁니다. 당분간 몽롱한 기분이 들겠지만 한두 시간 후면 회복될 거고요.”

물약을 받아든 아델은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꾹 감고 단숨에 마셨다.


“시작하죠.”

“그럼 상의를…….”

“아, 상의를. 그렇죠, 상의를 벗어야…….”

아델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드레스의 스트링과 훅을 풀어내려 갔다. 하지만 그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더 한 일도 겪었잖아. 이것만 없애면 다 끝날 거야.

그때였다.

똑똑.

평범한 노크 소리였지만 아델과 마빈은 흠칫 놀랐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당황한 나머지 아델은 성마른 소리가 나와 버렸다.

문밖에서 핸리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황후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



“다 왔어요. 아가씨.”

타냐의 말에 아델은 힘겹게 눈을 떴다. 마블 궁에서 황후궁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도 마차 안에서 깜박 졸았던 것이다.

황후는 예전부터 아델을 미워했었다. 그녀를 둘러싼 소문 때문인지 늘 끔찍한 악녀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에이프릴의 약혼자로 내정되어 있던 크리스틴과 약혼을 올렸으니 얼마나 미울까?

약혼식 내내 아델을 쳐다보던 눈빛에는 적의가 가득했었다.

그런 황후의 부름을 거절했다간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크리스틴까지 곤란해질 수 있었으니 아델은 수술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앗, 조심하세요!”

마차에서 내리던 아델이 휘청거리자 타냐가 얼른 붙잡아 주었다.

수술은 미뤘지만 이미 약을 마셔버린 후였다. 그런데 마블 궁을 나올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정신이 몽롱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약 기운이 생각보다 강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응, 근데 나 조금 아파 보여?”

“예, 좀.”

그러면서 타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좋아 보이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마빈을 만나고 난 후부터 상태가 좀 이상해 보였다.


“잘됐다. 황후 폐하께는 아프다고 인사만 하고 나와야지.”

“그러시는 게 좋겠어요.”

“잘 부축해줘. 엄청 아픈 환자처럼 보이게.”

“염려 마세요!”

타냐는 아델의 겨드랑이에 더 바싹 팔을 밀어 넣으며 황후궁으로 부축했다.

황후의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아델을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델 양.”

“안녕하세요. 황후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시녀들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어머, 어쩌죠? 황후 폐하께선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셨는데.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리시겠어요?”

“그럼 조금 후에 다시 오죠.”

아델은 이제 눈앞이 빙빙 돌고 시야조차 흐릿해졌다. 다행히 한두 시간 후면 약효도 떨어진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오면 되리라.


“그러면 좋겠지만 폐하께선 이후에 일정이 꽉 차 있으세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시녀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아델도 하는 수가 없었다.


“예, 그럼.”

겨우 타냐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시녀들이 타냐의 앞을 막아섰다.


“하녀는 밖에서 대기하거라.”

“예? 하지만 저희 아가씨가 지금 몸이 몹시 안 좋으세요.”

타냐가 아델의 팔을 더 꼭 붙잡고 떨어질 수 없다는 듯 말하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허! 감히 네년 따위가 황궁의 법도를 무시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아델은 하는 수 없이 타냐의 팔을 빼냈다. 이러다간 애꿎은 타냐만 화를 입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황궁의 법도를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대신 사과드리죠.”

그러고는 타냐를 달래며 속삭였다.


“마차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 타냐.”

“괜찮으시겠어요? 얼굴이 창백하세요.”

“염려 마.”

아델은 타냐를 안심시키며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갔다.

***

시녀들은 아델에게 차를 내어준 후 모두 나가 버렸다.

넓고 호화로운 황후궁의 응접실 안에는 아델 혼자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던 아델은 자꾸만 눈이 감겼다. 옆에서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길로 인해 온몸이 한층 더 나른해져 갔다.


‘아,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아델은 고개를 흔들며 애써 정신을 가다듬어보려 했지만 불가항력적이었다.

몽롱하던 의식은 점점 더 희미해졌고, 이내 머릿속이 아득해져 버렸다.

툭.

아델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질 때였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감싸더니 그녀가 제 무릎을 베고 편안하게 눕도록 도와주었다.

카우치 소파에 앉은 그는 한쪽 팔을 등받이에 올린 채 무릎을 베고 잠든 아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뺨을 만지던 손은 새근거리는 붉은 입술을 지그시 문질러 희롱하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으으음…….”

아델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지, 이토록 소름 돋게 차가운 손이라니.’

이건 크리스틴의 손이 아니었다.

아델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수마의 늪에 삼켜진 것처럼 팔다리도 꼼짝할 수 없었다.


‘아아, 일어나야 하는데.’

“여전하구나, 아델.”

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었다.


‘……누구…… 였더라?’

정신이 온통 혼미해서 아델은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목소리가 끔찍하게 두려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다는 것.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동안 차갑던 그 손은 그녀의 목덜미를 훑고, 뱀처럼 스르르 등 뒤로 훑어 내려왔다. 그러더니…….


“내 표식은 잘 지니고 있지, 아델?”

“……!”

아델은 모골이 송연해지며 머리카락이 주뼛 섰다.


‘아, 아닐 거야! 아니야!’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으으음, 으음! 으…….”

신음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헉!”

그리고 겨우 숨을 토해내며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질식할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서 크게 헐떡거릴 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점차 의식이 돌아오자 아델은 황후의 응접실 소파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서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이었나?

하지만 너무나 생생했다. 꿈속의 그 손이 쓸고 지나간 등은 끔찍한 벌레라도 기어 다니는 것처럼 소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고 젖은 이마와 목덜미에는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엉망이었다.


 


“황후 폐하십니다.”

그때 시녀들이 응접실로 들어오며 알렸다.

아델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약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현기증이 났다.


“오래 기다렸나요, 아델 양?”

전쟁터에서 직접 적들과 싸웠다던 황후는 평범한 귀부인들과 다른 압도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가 아닌 호피 무늬 가죽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부채 대신 말 채찍을 들고서.

그 모습에 웬만한 사람들은 기가 죽고는 했다.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하온데 무슨 연유이신지요?”

“황궁의 안주인으로서 마블 궁의 손님을 챙기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리고 반가운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기도 했고.”

“반가운 사람이요?”

황후가 시녀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찌 된 거지? 아직 오지 않은 거냐?”

시녀들은 아델을 흘끗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습니다.”

아델은 당황했다.


‘잠시 기다리다니? 설마 내가 잠든 동안 같이 있었다는 건가?’

설마…… 조금 전 그 일이 꿈이 아니었던 게…….

혼란스러워하는 아델을 보며 황후가 야릇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델 양은 그를 못 봤다?”

“송구합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깜박 잠이 들었던 터라…….”

그러자 시녀들은 기묘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그러게요. 몸이 많이 안 좋았나 봐요. 그분의 무릎을 베고 얼마나 정신없이 자던지.”

“깨우면 안 될 것 같아서 저희도 그냥 물러났답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연인으로 오해하겠던걸요.”

아델은 그녀들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건 그 사람은 크리스틴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델은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는 일.


“오해십니다, 폐하! 전…….”

아델이 소리쳤지만, 황후는 듣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요. 몸이 좋지 않다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아델 양.”

그러더니 어느새 시녀들과 함께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델은 무력감을 느꼈다.

황후가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가 뭐였을까?

왠지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일은…….


‘다녀갔다는 그 사람이 설마…… 그 작자였을까?’

 

***

응접실을 나온 황후는 바로 옆 방에 있는 소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세이라가 있었다.

황후는 아델만큼이나 세이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지 못할 게 없었다. 더구나 같은 적을 두었다면 더 말해 뭘 할까?

그녀는 자신의 딸을 비참하게 만든 아델을 이대로 둘 수 없었다. 크리스틴을 빼앗아다 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녀를 망쳐놓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 황후에게 세이라가 찾아온 것이다. 아델이 과거에 자신의 오라버니와 심상치 않은 관계였다면서.


“이제 제 말을 믿으십니까, 폐하?”

세이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방긋 웃었다.

사실 황후는 세이라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아델을 기다리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에 스톤을 불러서 단둘이 있도록 했다.

시녀들은 차 심부름을 하는 척 응접실을 드나들며 계속 상황을 전해주었다.

아델이 잠들자, 스톤이 그녀를 제 무릎 위에 눕히고 바라보고 있노라고.

황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좀 더 야릇한 양념을 치기도 했다. 둘이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라거나, 연인 사이처럼 보인다거나, 과거에 틀림없이 뭔가 있었다거나.

하지만 황후는 섣불리 휘둘리지 않았다.


“한데 두 사람이 부정한 사이라는 게 알려지면 오스월드 가에도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세이라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전…… 그런 악마가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여자는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오라버니를 망쳐놓았어요. 오라버니가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도 그 여자 때문에 괴로워서였죠. 그러니 황후 폐하께서라도 제발 사악한 그 여자를 벌해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 하나뿐이랍니다.”

세이라가 울먹이며 간청을 마치는데,


“푸흡!”

황후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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