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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귀여운 내 고양이 (47/155)


47화. 귀여운 내 고양이
2022.07.15.



 
한참을 웃던 황후는 갑자기 채찍 끝으로 세이라의 턱을 들어 올렸다.


“폐, 폐하!”

“세 치 혀가 참으로 길기도 하군. 어리숭한 내 딸을 조종했던 것처럼 나를 기만하려 든다면 네년의 목이 더 먼저 날아간다. 알겠느냐?”

황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세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 기만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폐하.”

“네년이 내 딸에게 입덧한 것처럼 헛구역질하라고 시켰다지?”

세이라는 놀라서 얼른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녀님을 도와드리려던 생각이 앞서서 그만.”

황후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건 됐고. 알아보니 스톤이 외교관으로 간 건 전대 후작이 요청한 거였다. 전대 후작과 종종 말다툼하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아델 때문에 괴로워서 외교관으로 간 건 아니라는 얘기지.”

세이라는 얼른 말을 바꿨다.


“송구합니다. 오래된 일이라 제가 헷갈렸나 봅니다.”

황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런데 아델이 응접실에서 잠든 건 정말 우연이었을까?”

“네?”

“나는 네가 부르라는 시간에 아델을 불러서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아델이 잠든 사이에 네 오라버니가 다녀갔지. 모든 게 마치 잘 짜여진 각본 같은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톤이 아델을 좋아한다는 건 확인했지만, 아델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거지. 그녀는 잠들어 있었으니까.”

세이라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소리쳤다.


“그 여자는 오라버니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잠든 척했을 거예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뭐가 아쉬워서? 바이스 백작의 귀에 그런 얘기가 들어가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 그건…….”

“네가 누군가를 매수해서 아델에게 미리 약을 먹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세이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황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세이라는 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고개를 조아렸다.


“폐, 폐하……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됐다. 그게 너와 손잡기로 한 이유니까.”

“예?”

“앞으로 내 시녀가 되도록 해라. 세이라 오스월드.”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세이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며 황후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예, 저는 이제 폐하의 사람입니다.”

 

***

비틀거리며 황후궁을 나온 아델은 분수대 난간이 보이자 얼른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조금 전 스톤이 다녀간 거라면 어쩌지?


‘설마 내 약혼 소식을 듣고 오르비스에서 돌아온 건가? 그렇다면 이대로 조용히 있지 않을 텐데.’

크리스틴에게 도움을 청할까? 그 작자와의 일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생각해야 할 일은 많았는데 정신이 너무 혼미했다.


‘일단 마차가 있는 곳까지만 가자.’

타냐가 기다리는 마차까지만 가면 그래도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까스로 일어나던 아델은 눈앞이 핑 돌아서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다간 이곳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 스톤이라도 만나게 되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델은 얼른 분수대의 얼음 조각을 떼어냈다. 차가운 얼음을 목덜미에 문지르면 정신이 좀 깰 것이다.

그러나 목덜미에 얼음을 대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

놀라서 돌아본 아델의 시야에 햇볕을 등진 키가 큰 남자가 들어왔다. 역광으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보고 싶었어, 아델.”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델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에게 잡힌 오른손은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렸다.


“이런. 넌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스, 스톤…….”

“아, 너무 반가워서 말도 안 나오는 건가?”

스톤은 고개를 숙여 아델의 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웃었다.

어두운 금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는 날렵한 턱선과 우뚝 솟은 콧날이 조각 같았다. 미궁이 깊고 진한 눈매로 인해 꽤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그런 얼굴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으면 대부분 여자들은 쉽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델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상냥하게 웃으며 그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이거 놔…….”

아델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손목을 잡은 스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툭!

결국, 아델은 손에 쥐고 있던 얼음 조각을 놓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비명 하나 안 지르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아델.”

아델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두 눈이 충혈되어 붉어지고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면서도.

그런 아델에게 자극을 받은 듯 스톤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궁금해. 이대로 손목이 으스러져도 비명을 안 지를지.”

순간 아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명을 지르는 건 네놈이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날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스컥!

아델의 손에 쥔 단검이 그의 팔을 그어버렸다.


“윽, 이 계집이!”

스톤은 재빨리 아델을 뿌리치며 팔을 빼냈다.

쿵!

생각보다 엄청난 힘에 의해 아델의 몸이 저만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쿨럭! 쿨럭!”

충격으로 기침을 해대던 그녀는 스톤을 노려보며 웃었다.


“아쉽네. 네놈 팔을 잘랐어야 했는데.”

스톤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아델은 다른 손으로 스커트 안에 숨겨둔 단검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소매를 베고 살갗을 조금 스쳤을 뿐이었다.

사실 아델이 허벅지의 가터벨트에 칼을 차고 다니기 시작한 건 스톤 때문이었다. 나쁜 짓을 하려는 놈들에게 언제라도 반격할 수 있기 위해서.


“아델, 내 귀여운 고양이. 못 보던 사이에 더 앙칼져졌네. 이러니 내가 안 좋아할 수가 있나.”

하지만 스톤은 태연하게 제 살갗에 배어 나오는 피를 할짝대며 웃었다.


“허튼소리 그만 지껄이고 꺼져!”

아델은 단검을 앞으로 내밀며 다시 휘두를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스톤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다.


“약혼했다는 소문, 진짜야?”

“그래. 그와 곧 결혼할 거야.”

스톤은 곤란한 듯 미간에 주름을 접었다.


“이런…… 내 말을 잊었어? 네 영혼까지 전부 내 거라고 했었는데.”

“미친 소리! 난 이제 그의 여자야. 백작이 보면 네놈을 살려둘 거 같아?”

아델은 덜덜 떨리는 걸 감추기 위해 더 크고 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스톤에겐 먹히지 않았다.


“글쎄, 아직 놈의 여자가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는 재킷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한 귀퉁이에 ST이라는 머리글자가 새겨진 손수건을 조금 전 에이프릴에게서 돌려받은 것이다.


“놈이 네 등에 있는 문신을 봤다면 이 손수건을 보는 순간 표정이 참 재미있었겠지. 하지만 그냥 덤덤하던걸.”

그러더니 스톤은 활짝 웃었다.


“아델, 놈에겐 아직 등조차 보여주지 않은 거야? 그래놓고 그의 여자라니.”

키득거리는 그를 보며 아델은 입술이 달달 떨렸다.


“……그와 만났어?”

“먼발치에서만. 궁금했거든. 놈이 네 등의 그 표식에 대해 알고 있는지. 둘이 잤는지.”

그러더니 아델의 귀에 대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날 기다렸던 거야?”

아델은 있는 힘을 다해 스톤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닥쳐! 그리고 그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러나 스톤은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쳤다.


“멋져, 아델! 하지만 넌 아직 놈의 여자가 아니야. 잠자리도 안 했고, 신에게 혼약의 맹세를 하는 결혼도 안 했잖아. 두 사람,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아니야. 그와 난 이미 서로의 영혼을…….”

스톤은 제 손가락을 아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아델. 아직 되돌릴 기회는 많아.”

“되돌리다니?”

“찾아와야지. 집 나간 고양이를.”

“……!”

아델은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교활하고 잔인한지를.


“이제 정말 예뻐해 줄게, 도망칠 생각 따윈 못 하게.”

그러면서 스톤이 아델의 목덜미를 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였다.

스윽.

길고 서늘한 레이피어의 블레이드가 그의 손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나십시오, 후작.”

“크리스……!”

어느새 다가온 크리스틴이 칼을 빼 들어 스톤과 아델 사이에 경계를 만든 것이다. 그의 뒤에는 짐머를 포함한 근위대원들 서너 명이 함께였다.


“괜찮아, 아델?”

칼을 도로 집어넣은 크리스틴은 주저앉아 있는 아델을 일으켜 세웠다.


“응, 잠시 현기증이 나서.”

그러자 스톤도 아델과 말을 맞췄다.


“오해하지 마시오, 백작. 넘어진 어머니를 일으켜 주려는 것뿐이었으니.”

크리스틴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델은 이제 당신 가문과 상관없는 사람.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아, 그렇지. 하지만 황제께선 가주인 내 허락도 없이 그녀를 가문에서 제명하셨더군. 이 부분에 대해선 귀족회를 통하여 이의를 제기할 것이오.”

크리스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귀족회를 등에 업고 황제를 압박하시겠다?”

스톤은 5인의 원로 귀족회 일원이었다. 황제가 가장 견제하고자 하는 세력들.


“힘을 가지고도 쓰지 못하면 그게 바보 아니겠소? 판결이 나기 전까지 두 사람의 결혼은 물론 약혼도 효력이 없을 것이오.”

그러더니 스톤은 더없이 자상하게 웃으며 아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자, 손에 묻은 흙을 닦으세요.”

일부러인 듯 그는 자신의 머리글자가 잘 보이도록 건네주었다. 아델이 당황하며 받지 않자, 웃으며 손안에 쥐여 주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뵙지요, 어.머.니.”

그리고 돌아설 때였다.

휘익!

서늘한 바람이 스톤의 뺨을 스치는가 싶더니, 그의 바로 앞 나무에 수직으로 꽂혔다.

그것은 크리스틴의 레이피어였다. 칼끝에는 스톤의 손수건이 관통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스톤이 싸늘히 돌아보자,


“그 손수건으론 고양이의 다리나 싸매는 게 더 적합할 것 같군요, 후작.”

그러더니 아델을 번쩍 안아 들고 스톤의 옆을 지나쳐 갔다. 그 뒤를 근위대들이 호위하듯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스톤의 푸른 눈동자가 점차 매섭고 탁하게 변해갔다.


“크리스틴 바이스 백작……. 아주 마음에 들어.”

그의 붉은 혀가 탐욕스럽게 입가를 핥았다.


 

***

스톤에게서 빠져나오자 아델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약효도 떨어지는지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놔줘, 혼자 걸어갈게.”

“현기증이 나서 넘어졌다며.”

“그건…… 사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창피해서 둘러댔어.”

아델이 부끄러운 고백을 하듯 속삭이는데, 크리스틴의 걸음이 멈췄다.


“아델.”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왜?”

아델은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톤과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순간 무언가가 아델의 심장을 쿵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냐니? 그게 무슨 뜻이야?”

“둘이 좀 특별해 보여서.”

아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강하게 부인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내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아!”

아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크리스틴은 손을 들어 올려 사인을 보냈다. 짐머가 그를 따르던 근위대들과 함께 뒤로 멀리 물러났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먹구름이 몰려오며 하늘이 어두워졌다. 꾸물대는 하늘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에서 뭐라도 내릴 기세였다.


“그럼 표식이라는 게 뭐지?”

낮게 가라앉은 하늘 때문인지 그 목소리가 어쩐지 음산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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