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같이 잘까?
(48/155)
48화. 같이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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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같이 잘까?
2022.07.18.
“그럼 표식이라는 게 뭐지?”
낮게 가라앉은 하늘 때문인지 그 목소리가 어쩐지 음산하게 들렸다.
“표식…… 이라니?”
아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하지만 심장이 울렁거렸다.
‘설마 스톤과의 대화를 들은 건가?’
‘지금이라도 다 얘기할까? 그래, 하자…….’
그때 저만치에서 타냐가 달려왔다.
“아가씨!”
그러자 크리스틴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평소처럼 웃었다. 조금 전의 심각한 모습 따윈 마치 아델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만 가봐. 난 돌아가 봐야 해서.”
돌아서는 크리스틴을 보면서 아델은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그를 붙잡고 다 얘기할까?’
그러는 사이 크리스틴은 일행들에게 돌아가고 타냐가 다가왔다.
“얼른 마차에 타세요. 곧 뭐가 내릴 것 같아요.”
아델과 타냐를 태운 마차가 곧 움직이며 멀어져갔다.
귀가 밝은 크리스틴은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그는 스톤과 아델이 나누는 얘기도 분명히 들은 것이다.
“아델, 놈에겐 아직 등조차 보여주지 않은 거야? 그래놓고 그의 여자라니.”
“궁금했거든. 놈이 네 등의 그 표식에 대해 알고 있는지. 둘이 잤는지.”
“설마 날 기다렸던 거야?”
그녀의 등에 있는 표식이라니…….
게다가 스톤에게서는 손수건에서 나던 불길한 피 냄새가 매우 진하게 나고 있었다.
지난밤, 식당의 창 너머에서 아델을 지켜보던 그자는 역시 스톤이었나?
그자가 귀국한 지 꽤 되었다고 했는데, 설마 그사이 아델과 만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아델이 잠자리를 피했던 것도…… 설마?
젠장!
크리스틴은 인상을 썼다.
한 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 아델의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웠다.
***
한편, 집으로 돌아온 아델은 쉽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스톤이 나타났다.
그가 뭔가 일을 꾸미기 전에 대비하려면 아무래도 혼자서는 안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자칫 크리스틴에게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표식’에 대해 묻는 걸 보면 그가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건지도. 그러면서도 캐묻지 않는 건 먼저 얘기해주길 바라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래, 다 얘기해버리자.’
‘크리스라면 그래도 내 편이 되어 줄 거야.’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래도 그를 속이고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밤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꾸물거리던 하늘에선 저녁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창틀에 소복하게 쌓여갔다.
하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경비를 서는 소수의 근위대만 깨어 있을 뿐이다.
그를 기다리며 아델은 침대에서 책을 읽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보니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성의 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근위대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옷 차림이던 아델은 얼른 그 위에 붉은 로브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늦었네.”
막 2층으로 올라오던 크리스틴과 계단에서 마주쳤다.
“음.”
“밖에 눈이 많이 오지?”
얼른 계단을 내려간 아델은 그의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뒤로 물리더니 제 손으로 털어냈다.
“됐어. 내가 할게.”
웃으며 손을 뻗었던 아델은 민망해서 그 손을 괜히 모아쥐었다.
하지만 다시 상냥하게 웃었다.
“배는 안 고파? 뭐 먹을 거라도 갖다 줄까?”
“고맙지만 괜찮아. 피곤할 텐데 그만 자.”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피곤해. 잠도 안 와서 책 읽던 중인걸.”
“그럼 들어가서 책마저 읽어. 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만.”
“지금까지 일하고 왔는데 또?”
“곧 황실 승마대회라서 준비 할 게 많거든.”
“아, 그렇겠구나. 그래도 좀 쉬면서 하지.”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럼.”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곁을 내주지 않으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거리감이 느껴져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응, 잘자.”
아델은 다시 용기를 내어 언제나처럼 크리스틴의 뺨에 입을 맞추려 했다.
‘굿나잇 키스 정도는 괜찮겠지?’
하지만 입술이 닿기 직전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짐머.”
“예, 단장님.”
“확정된 대회 참석자 명단이 아직 올라오지 않은 것 같던데?”
“예, 추가 인원이 몇 명 늘었지만, 전체적인 계획안은 큰 변동이 없어서 최종 보고 때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당장 올라가서 보고하도록.”
“예, 단장님.”
크리스틴은 아델의 옆을 지나쳐 짐머와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짐머에게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델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바쁜가 보네.”
어깨를 으쓱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곧 황궁의 큰 행사이니 책임자인 크리스틴이 정신없이 바쁜 게 당연했다. 일에 열중하다 보니 자신에게 신경 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고.
아델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서운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옆에 있는 내가 안 보이는 건 아닐 텐데.’
아니, 조금 전 그는 그녀를 명백하게 거부한 것이다.
‘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
크리스틴은 짐머와 함께 2층 집무실로 들어왔다. 외투를 의자에 대충 걸쳐놓은 그는 진열장에서 제일 독한 보드카를 꺼냈다.
그동안 짐머는 절도 있는 자세로 보고를 했다.
“승마대회에 스톤 오스월드 후작도 참가를 신청했습니다.”
“스톤, 그자가?”
“예, 갑자기 귀국해서 승마대회 참석이라니 좀 의외였습니다.”
“하긴, 9년 전에도 승마대회 우승자가 스톤이었다고 했지?”
“예, 오스월드가에선 그의 우승을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알겠다, 그만 나가보도록.”
하지만 짐머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단장님께서도 출전하시는 건…….”
“폐하의 호위는 누가 하고?”
“경기만 참석하시는 거면 문제 될 게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도 아쉬워하셨잖습니까. 이 기회에 스톤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해주시면…….”
“왜 그래야 하지?”
크리스틴이 남의 일이라는 듯 말하자, 짐머는 어이가 없었다.
“아델 양에게 많이 유치하셨던 건 아시지요?”
“뭐가?”
그 살벌한 표정에 짐머는 혀를 찼다.
“제가 목숨이 하나라서 더 말은 못 하겠지만 이런 타이밍엔 질투보다 돌진이 더 좋은 전략일 수 있습니다.”
“됐다, 그만 나가.”
크리스틴이 미간을 모으며 경고했다.
“아까 아델 양을 보는데 제가 다 안쓰러웠습니다. 단장님 마음도 불편한 거 다 압니다.”
“짐머 크라이튼!”
그의 성난 목소리에 짐머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를 자극해선 안 될 타이밍.
오랫동안 곁에서 보아온 짐머는 알고 있었다.
“그럼 이만.”
짐머가 물러나자 크리스틴은 보드카를 병째 들이켰다.
높은 도수의 술은 빈속을 칼날처럼 긁어내렸다.
“젠장!”
그럴수록 조금 전 마빈과의 대화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취조에 더 가까웠지만.
***
“부, 부르셨습니까, 바이스 백작님.”
그의 앞에 불려온 마빈은 후덕하던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내 약혼녀의 건강을 챙겨주고 있다기에 감사 인사라도 할 겸 보자고 했소.”
“괜찮습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그런데 낮에 아델이 뭔가 좀 이상해 보이던데?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로.”
“그, 그게…… 빨리 완쾌되시라고 약을 드렸는데 좀 독했나 봅니다.”
“그러니까 경이 건네준 약 때문에 그렇게 됐다?”
마빈은 이마에 맺히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꼭 그렇다는 건 또 아니고…… 약이란 게 사람마다 효과가 다르니…….”
“당장 그녀에게 썼던 약을 가져오게.”
“이미 다 드셔서 없습니다.”
그러자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마빈 경, 자네가 도박을 그리 좋아한다지? 살던 집까지 저당 잡힐 정도로.”
“다 옛날 일입니다!”
“하지만 오스월드가에서 빚보증을 선 건 최근 일이던데? 게다가 빚을 갚기 위해 헬밸리에서 매춘부들을 상대로 무허가 수술도 하고 있고.”
“그, 그걸 어떻게……!”
“지금부터는 말을 잘해야 할 걸세. 안 그러면 황궁의 어의가 매춘부들을 진료한 죄목으로 목을 벨 수도 있거든.”
크리스틴이 레이피어를 뽑을 것처럼 손을 가져다 대는 것과 동시였다.
“살려주십시오, 백작님!”
마빈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았다.
“말해보게. 아델의 등에 무슨 표식이 있는 거지?”
아델과 스톤의 대화로 짐작건대 그녀의 등에 어떤 표식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델이 헬벨리의 의사를 찾아간 것도 그 이유였으리라.
“그, 그건…….”
“우선 손목부터 잘라 줄까?”
“무, 문신입니다!”
“문신?”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두 개의 철자였습니다. 아델 양은 그걸 몹시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두 개의 철자?”
“예, 무언가의 머리글자 같았습니다.”
두 개의 철자.
무언가의 머리글자.
크리스틴은 스톤의 손수건에 새겨진 머리글자가 생각났다. 놈은 제 물건에 병적일 정도로 자신의 머리글자를 새긴다고 들었다.
설마 그걸 아델의 등에도 새긴 건가?
정말 그녀의 몸에 새겨진 표식이 스톤의 그 머리글자라면…….
***
보드카를 반병 정도 비운 크리스틴은 집무실을 나왔다.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사실 그는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다. 거친 사내들을 통솔해야 하니 주량이 센 척하며 정신력으로 버텨온 것이다.
지금도 스스로는 멀쩡하다고 생각하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평소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라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걸음은 그대로 아델의 침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아델이 잠든 모양이다.
평소였으면 돌아섰을 크리스틴이었지만 오늘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들어간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크리스틴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레이스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는 비어 있었다.
대신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기에 소리가 더 잘 들렸는지도 몰랐다.
크리스틴은 물소리를 따라 홀린 듯 욕실로 향했다.
***
아델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이친 달빛이 물에 젖은 하얀 피부를 신비롭게 비췄다.
신이 만든 아름다운 피조물.
지금 아델의 모습을 봤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게 칭송했으리라.
아니,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악마의 힘을 빌렸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이 아름다움이 악마와 손잡은 대가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악마가 손을 내민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악마와 손잡은 대가로 그녀는 지금 이렇게 고통받고 있었다.
스톤은 아델을 다시 오스월드 가로 데려올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무슨 수단 방법이든 다 동원하려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크리스틴이 잘못될까 봐 아델은 그게 두려웠다.
그는 강한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었지만, 악마를 상대할 만큼 교활하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찰박.
욕조에서 나온 아델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물기를 닦았다. 그 위에 속살이 비칠 만큼 하늘거리는 슈미즈를 입었다.
수증기로 뽀얗게 흐려진 거울 앞에 서자, 가녀린 목선과 어깨가 고스란히 보였다.
아델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돌려 등을 바라보았다.
깊게 파진 슈미즈의 어깨끈 사이에 여전히 자리한 스톤의 머리글자.
볼 때마다 혹시라도 사라졌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크고 또렷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
그러다 아델은 거울 속에 자신 외에 또 다른 사람이 비치고 있는 걸 깨달았다.